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를 방어하라!
티벳에서의 반혁명적 폭동들
노동자 전위 911호
정정이 첨가됨
"반(反) 중국 폭동의 야단법석". 이것이 라사[Lhasa]에 있는 유일한 공식적인 외국 특파원을 보유했던 이코노미스트 온라인(3월 14일자)이 티벳 자치주에서의 항의들을 묘사했던 방식이다. 중국 지배에 대항했던 1959년 봉기 - CIA에 의해 사주되고, 무장되었으며, 재정지원을 받았던 - 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3월 10일에 시작되었던 시위들은 라마승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티벳인들이 많이 있는 간쑤, 칭하이, 그리고 스촨 성들에서 이에 대한 동조시위가 있었다. 승려들에 의해 주도된 시위대는 "티벳이여 영원하라", "달라이 라마여 만수무강 하소서"를 외치면서, 10대 무리들의 앞장을 서서 중국인들이 운영하던 가게들을 불태우고 파괴하면서, 그리고 적어도 13명의 인명을 살상하면서 라사의 구 티벳 중심지를 휩쓸었다. 이 지역의 소수계 무슬림 또한 이들 공격의 대상이었다. 이코노미스트는 3월 22일자에서 "티벳인들 소유의 상점들은 전통적인 하얀색 수건으로 표시되었다.... 그들은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티벳에서의 시위들은 반동적이고, 반공산주의적이며 반혁명적인 것들이다. 트로츠키주의자(즉, 진정한 맑스주의자들)로서 우리 국제공산주의동맹은 제국주의 공격과 자본주의 반혁명으로부터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를 위해 투쟁한다. - 우리는 현재 남아 있는 다른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인 북한, 베트남, 쿠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자본의 지배를 타도했던 1949년 혁명은 1959년 중국이 승리할 때까지 노예제적 "라마독재"에 의해 지배 받던 티벳의 인민들을 포함하여 중국의 노동자와 농민 대중들을 위한 엄청난 성취들로 귀결되었다. "해방 티벳"이라는 대의는 중국을 다시 한번 반식민지적 종속으로 떨어뜨리게 될 중국에서의 자본주의 복구를 목적으로 하는 CIA와 다른 제국주의 세력들의 음모에 의해 시작되었다. "해방 티벳"에 대한 호소는 반혁명의 슬로건이며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티벳 대중들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를 의미할 것이다.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의 반혁명적 파괴는 티벳 인민들을 포함하여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엄청난 패배일 것이다.
1959년 인민해방군에 의해 분쇄되기 전, 티벳의 라마주의 종교지배는 농민들, 보리 농사꾼들, 그리고 야크 목부로부터 경제적으로 부양을 받던 역사상 아마도 가장 거대하고 가장 게으른 지배계층이었다. 근저에서, 이것은 승려들과 "원죄"를 지은 후 수도사적 삶을 따라 하던 적지 않은 비중의 남성들이 명상이라는 직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허리가 휘어지는 노동은 주로 여성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1959년 CIA의 지원을 받았던 봉기를 진압한 후, 중국정부는 울락(농민의 강제노동)을 폐지했고, 범죄에 대한 징벌의 형태로서의 태형, 불구로 만들기, 수족절단행위에 종지부를 찍었다. 망명길로 도망쳤던 귀족들의 땅, 가축, 그리고 장비들은 농민들에게 분배되었으며, 봉기에 참여했던 수도원들의 땅과 소유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는 비종교적인 교육을 확립했으며 라사에 수도와 전기를 건설했다. 그 결과, 1950년에 35살이었던 티벳인들의 평균 수명이 2001년에는 67살로 높아졌다. 1950년에 43%라는 놀라운 영아사망률은 2000년에 0.661%로 극적으로 줄었다. 티벳과 중국을 잇는 라사-칭하이 철도의 최근 개통은 경제발전과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이들 성취들은 자본가계급과 지주들에 대한 몰수와 1949년 중국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던 프롤레타리아트 소유양식이라는 제도로부터 발생한 사회적 진보에 대한 증거이다.
특히, 동유럽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과 1991-1992년 소련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의 반혁명적 붕괴 이후 중국은 한층 제국주의자들의 표적의 중심이 되었다. 반혁명을 촉진하기 위하여, 제국주의자들은 중국 내 반혁명을 촉진하기 위하여 베이징 스탈린주의 관료세력에 의해 추진되는 경제개방과 점증하는 군사적 압력을 함께 사용한다. 남아 있는 가장 강력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인 중국은 미국 군사기지의 전체 체계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 북한과 함께 중국은 선제 핵 공격의 잠재적 타겟으로 펜타곤의 공격 리스트에 올라있다. 한편, 미국의 국가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은 중국의 상대적으로 허약한 핵 능력을 무력화하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하고 있다.
제국주의 지배자들은 달라이 라마에 대한 그들의 지원을 통하여 중국에 대한 그들의 압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다가오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활용하고 싶어한다. 티벳에서의 소요들의 모습을 미리 예측하도록 했던 도발 차원에서, 달라이 라마는 지난 9월을 기점으로 하여 5주안에 베를린에서 독일 수상 안젤라 메르켈을, 워싱턴에서 미국 대통령 부시를 - 최초의 미국의 현직 대통령의 공공연한 달라이 라마 회견 - , 그리고 캐나다 연방수상 하퍼를 만났다. 이제, 영국 수상 브라운이 돌아오는 5월에 달라이 라마를 런던으로 초청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부시 행정부가 티벳에 대해서 "자제"하라고 중국에 요구하는 반면, 민주당은 중국에 대한 호전성에서 부시 갱을 넘어서려고 노력해왔다. 티벳 소요가 발생한 후, 민주당 하원 대변인 낸시 펠로시는 인도의 다람살라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본부를 방문했다. 3월 12일자 성명에서 펠로시는 "티벳에서 평화적 항의자들에 대한 중국 군대에 의한 폭력적 대응"을 비난했다. 민주당 대통령 예비 후보 힐러리가 "티벳에서 중국의 탄압이 계속된다"고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한 한편, 오바마의 성명은 "평화적 항의를 진압하기 위한 폭력의 사용"을 비난하는 펠로시의 것에 동조했다. 이코노미스트 온라인 3월 16일자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는 폭력적 소요 동안에 중국의 보안군들은 "상대적으로 자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 편에서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은, 구 소련 인민들에게 황폐화와 비참함을 가져왔으며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 역사적 패배였던 소련의 반혁명적 파괴를 지지했던 것처럼, 중국에서 반혁명을 선동하기 위한 그들의 제국주의 지배자들의 시도들의 바로 뒤에서 행진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미국의 사회주의 행동[Socialist Action]과 제휴하고 있는 이름과는 상관없는 Ligue Communiste Révolutionnaire는 중국 정부에 의해 가해지는 억압을 비난하고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면서 즉각적으로 라마들과 연대했다(3월 18일 성명). 그들의 일본 지부 가케하시는 "티벳 민중을 위한 자기 결정의 권리"를 주장했으며 중국이 "국제 조사 팀을 수용"하라고 요구했다(가케하시 3월 24일자).
한편, 중국 노동자를 발행하고 있으며 미국에 있는 사회주의자 대안[Socialist Alternative]과 연계되어 있는 CWI[Committee for a Workers' International]의 개량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티벳의 "독립의 권리"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한편으로 "자본주의에 기초한 민족의 독립은 결코 헐벗는 대중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달라이 라마의 "화해주의적 접근"에 반대하는 티벳 청년들 사이의 가상의 "급진적 층들"에게 경의를 표한다(중국 노동자, 3월 18일자).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의 적들, 혁명적 국제주의적 노동자 운동의 적대자들은 티벳 인민들을 라마관료층의 지배로의 회귀로 인도하려고 하고 있다. 티벳의 "독립"을 위한 사이비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은 2005년에 "중국의 물질적 발전이 전진하면, 우리는 철도와 같은 물질적 성과를 획득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분리된 국가라면, 그것은 매우 힘들 것이며, 우리는 아무런 혜택을 얻지 못할 것이다."고 인정했던 달라이 라마 보다도 오른쪽에 있다(South China Morning Post, 3월 14일).
스탈린주의 관료에 의한 노동계급으로부터의 정치권력 찬탈 이후의 소련을 모방한 중국 노동자 국가는 시작에서부터 기형화되었다. 1949년 혁명을 수행했던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CCP)은 노동계급보다는 농민에 기초한 당이었다. 처음부터 CCP 정권은 노동계급을 권력으로부터 배제하면서, 노동계급에 의한 독립적 행동을 탄압했다. 집산화된 경제의 꼭대기에 있는 민족주의적 관료계층을 대변하는 베이징의 스탈린주의 정권은 물질적 풍요에 기초한 계급 없는 평등사회인 사회주의가 일국에서 건설될 수 있다고 하는 뿌리깊은 반 맑스주의적 관념을 설파했다. 실제에 있어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세계 제국주의에 대한 타협과 국제 노동자 혁명의 전망에 대한 반대를 의미했다.
세계 제국주의와의 "평화적 공존"을 쓸데없이 추구하면서, 스탈린주의 실정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중국 노동자 국가의 방어를 침식한다. 티벳에서의 소요들을 비난하는 베이징으로부터의 공식 성명들은 달라이 라마만을 비난하고, 제국주의의 역할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러나 런던에 있는 "티벳 해방 캠페인"의 과거 지도자 패트릭 프렌치의 뉴욕 타임즈(3월 22일자) 특집기사가 말했던 것처럼, "워싱턴에 있는 티벳을 위한 국제 캠페인이 이제는 인도 북부에 있는 달라이 라마 집단보다 세계적 의견에서 더욱 강력하고 효과적인 세력이다." 이 "해방 티벳" 지지자는 "유럽과 미국의 친 티벳 조직들은 티벳 망명정부라는 개를 흔드는 꼬리"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옮겨갔다. 그는 또한 "다람살라에 있는 문서들을 샅샅이 뒤진 후에" 1950년 중국이 티벳에 들어온 이후 120만 명의 티벳인들이 살해당했다는 그의 그룹과 다른 "해방 티벳" 그룹들에 의해 제기되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동시에, 중국 스탈린주의는 민족주의와 한(漢) 배외주의를 의미해왔다.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으며 모택동이 관료내부의 분파투쟁에서 자신의 지위를 보강하기 위하여 수백만의 청년학생을 동원했던, 이름과는 상관없었던 "위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혁명" 동안, 모택동은 티벳인들을 ‘위대한 한(漢)’배외주의에 종속시켰다. 티벳 언어와 전통 의상이 금지되었다. 승려들을 실제 노동으로 강제하는 유익한 부수 효과에도 불구하고, 티벳 문화의 핵심이었었던 많은 것들이 간단하게 분쇄되고 파괴되었다.
모택동 사망 후, 등소평은 티벳 언어, 복장, 머리 스타일에 대한 금기를 없앴다. 동시에, 수도원들이 다시 건축되고 수리되었으며, 게으름뱅이 승려들이 떼지어 돌아왔고 그 숫자가 1990년대 후반에 4만에서 5만에 이르렀다. 한편, 등소평 하에서 시작되었던 "시장개혁"은 이 지역에서 한(漢)특권을 증가시켜왔다. 1949년 중국 혁명으로부터 티벳 인민들에 의해 성취된 진정한 성과들이 계속되는 불평등과 함께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
중국 인구의 92% 이상이 한[민족]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의 한[족] 배외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것과 티벳인들, 진장의 무슬림 위구르인들 그리고 다른 민족적, 인종적 소수계들에 대한 모든 차별을 반대하는 것은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필요한 것은 중국에서 스탈린주의 관료 지배를 일소하고, 그것을 노동자 농민 위원회를 통해 표현되며 맑스주의 국제주의에 뿌리박은, 노동자 민주주의에 기초한 통치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혁명이 아니라 노동자 정치혁명이 될 것이다. 이 정치혁명은 중국 노동자 국가의 방어와 국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에 기초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망을 현실화하기 위한 핵심은 중국에서 트로츠키주의 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티벳 인민들의 운명은 중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치 혁명과 인도에서 일본, 미국과 다른 제국주의 중심국가들까지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사회주의 혁명과 긴밀하게 이해를 같이 한다.
1959년 티벳 봉기가 실패한 후, 우리 국제 경향의 창설 지도자들 중의 하나이며, 스파르타시스트 리그의 전국 의장인 제임스 로버트슨이 당시 트로츠키주의 사회주의 노동자당[SWP-토니 클리프의 영국 SWP와 다른 조직(해석자의 첨가)] 청년 그룹의 선조격인 청년 사회주의자 클럽의 신문인 청년 사회주의자(1959년 6월)에 출판되었던 리플렛을 하나 썼다. 로버트슨은 소련에 대한 "제3 진영"(즉, 방어주의를 거부하는)입장을 가졌던 샤흐트만(Shachtman)주의 조직의 성원이었다.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트로츠키주의에 의해 획득되었고 SWP에 합류했다. "티벳인들의 부대: 악어의 눈물이 승려복을 얼룩지게하다"라는 제목으로 버클리의 유진 데브스(Eugene V. Debs) 클럽에 의해 발행된 이 리플렛은 그의 트로츠키주의적 소비에트 방어주의의 첫 번째 선언이었다. 이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국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을 경우 티벳의 실제 선택은 자주적 독립국가가 아니라 미국의 무기, 자금, 그리고 고문관들에 대한 비참한 종속이 될 것이다......
"중국 공산주의 정권의 승리는 현재의 싸움에서 명백하게 진보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국 지배정권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왜곡된 방식에서라도 그것은 중앙아시아에서 거대하고 긍정적인 변화이며, 궁극적으로는 모택동주의자들의 파멸의 원인이 될 변화들이다. 바로 이들 성과들을 통해서, 정권은 특권화된 엘리트의 개입 없이 자신들의 운명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민대중의 열망에 의해 타도될 것이다. 이것이 미래이다; 티벳 승려들의 지배는 지나간 과거이다."
— 끝 —
정정
“티벳에서의 반혁명적 폭동들”(노동자전위 911호, 3월28일)에서, 우리는 “티벳과 중국을 잇는 라사-칭하이 철도의 최근 개통은 경제발전과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강조는 첨가된 것임). 이것은 티벳이 중국의 일부가 아님을 암시한다. 우리는 “티벳과 그 외의 중국을 잇는”이라고 썼어야 했다. 같은 기사에서, 우리는 또한 아래와 같이 썼다.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으며 모택동이 관료내부의 분파투쟁에서 자신의 지위를 보강하기 위하여 수백만의 청년학생을 동원했던, 이름과는 상관없었던 "위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혁명" 동안, 모택동은 티벳인들을 대한 배외주의에 종속시켰다. 티벳 언어와 전통 의상이 금지되었다. 승려들을 실제 노동으로 강제하는 유익한 부수 효과에도 불구하고, 티벳 문화의 핵심이었었던 많은 것들이 간단하게 분쇄되고 파괴되었다. “
이 인용문은 문화혁명 동안 모택동이 티벳 문화의 정수였었던 많은 것들을 “박살내고 파괴하기” 위하여 학생청년을 동원했다는 달라이 라마 진영과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조장된 광범위한 왜곡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나 많은 불교 유적과 궁전들을 파괴했던 자들은 대개 티벳 청년이었다. 왕 리숑은 그의 매우 사려깊은 기사, “티벳에 관한 생각들”(New Left Review, 2002년 3-4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진실은 열악한 운송과 먼 거리 때문에 단지 제한된 숫자의 한(漢) 뷹은 근위대만이 실제로 티벳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들 중 일부가 사찰들을 무너뜨리는데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행위는 단지 상징적인 것이 될 수 있었을 뿐이다. 수백 개의 사당들이 마을들, 목장들, 그리고 험난한 산중턱들에 산재해 있었다. 지역 인민들의 참여 없이는 누구도 그것들을 파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티벳자치주[TAR]에 도달했던 붉은 근위대의 대다수는 다른 지역의 대학들로부터 귀환하는 티벳 학생들이었다…
“분명히, 이 행동들은 티벳 농민들이 일단 자기 자신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분명한 해방의 몸짓으로 너무도 오랫 동안 그들을 괴롭혔던 내세(來世)라는 망령을 떨쳐버렸고, 저 세상의 혼령이 되기 보다는 이 세상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증거이다.”
문화혁명은 그것이 중국인민공화국의 다른 지역에 그렇게 했던 것 처럼 티벳에 엄청한 인명과 경제적 피해를 입혔다. 문화혁명은 서구뿐만 아니라 한(漢)중국의 것들도 포함하는 예술과 음악에 대한 반(反)문화적인 것이었다. 동시에, 과연 한(漢) 배외주의가 있었다. 문화혁명 동안에는 모든 소수 민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티벳 언어와 전통 의상들이 공격을 당했다.
“무미아는 당장 석방되어야만 한다!”(노동자 전위 913호, 4월 25일자)에서, 우리는 4월 19일 오크랜드에서 있었던 무미아 아부 자말 석방을 위한 공동전선 시위에서 스파르타시스트 동맹의 연사 루벤 사무엘스[Reuben Samuels]가 했던 발언을 출판했는데, 그 발언에서 그는 “중국 혁명의 티벳으로의 확장은 노예제와 짐 나르는 짐승으로서의 여성의 지위를 끝장 냈다”고 선언했다. (비슷한 선언이 폴라 다니엘스의 연설에 등장했으며, 노동자 전위 914호 5월 9일자의 “노동자들의 미국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에게 합류하라!”에 실렸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노예제도가 지배적인 생산양식이었음음을 암시할 수도 있다. 티벳에서 지배적인 강제적인 농민 노동(예를 들면 울락)의 형식들은 그 성격에서 중세적인 것들이었다. 농민들은 노예가 아니라, 지주들/라마독재에 정기적으로 무보수의 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개별적인 노예들은 존재했으나 이것이 경제의 기초는 아니었다.
"Counterrevolutionary Riots in Tibet"
Workers Vanguard No. 911, 28 March 2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