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주의 -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들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는 어떻게 교살당했는가?
옐친 반혁명을 쓸어없앨 사회주의 혁명을 위하여
11월 7일은 볼셰비키 혁명 7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연 최고의 성취이면서 인류를 위한 중대한 전진이었던 볼셰비키 권력에 의해 수립되었던 노동자 국가는 75주년을 넘기지 못했다. 1991년 8월 보리스 옐친의 친 제국주의 역 쿠데타가 선도했던 공개적인 반혁명의 시기는 대중적인 노동계급 저항이 없는 가운데 벌어졌던 부르주아지 국가의 수립 – 아무리 유약하고 되돌이킬 수 있는 것이었기는 했어도 - 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오늘날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하고 있는 임무는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을 복구하기 위한 사회주의 혁명과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국제주의의 기초 위에 소비에트 연맹을 재건하는 것이다.
옐친과 옐친을 지원하는 자본주의 재 복구주의 세력들의 상승은 소련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사건이기는 하였지만, 아직은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즉각적으로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10만 부 이상이 소련 전역에 배포되었던 우리의 1991년 8월의 기사, "소비에트 노동자들: 옐친-부시의 반혁명을 쳐부숴라!"에서, 우리는 노동자들에 대한 투쟁으로의 조직화들이 옐친의 바리케이드들에 있는 반혁명적 오합지졸들을 쓸어 없애야 하며, 이렇게 해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고 썼다. 옐친의 승리의 결과로서:
"수 십년 동안의 스탈린주의 관료의 잘못된 지배에 의하여 약화되고 침식당해 온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국가는 누더기가 되었다. 국가권력에는 금이 갔고, 공산당은 KGB와 무장세력들에 의해 박살나고 금지되었으며, 다민족으로 구성된 연맹은 공화국들이 하나씩 분리를 선언하면서 찢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옐친과 그 도당들이 신속하고도 강력한 자본주의의 재도입을 밀어부치기 위한 탁 트인 들판을 바라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그 결과가 분명하게 결정된 것은 아니다.... 자본가의 공격의 참상에 반대하는 공장들로부터의 반대가 ... 반혁명의 급속한 공고화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 노동자 전위 533호, 1991년 8월 30일
그 사이에 그 공고화를 멈추기 위한 결정적인 실천이 없었다. 거의 70년 동안의 정치 활동에 대한 스탈린주의의 찬탈로 인해 정치적으로 무기력해지고, CIA의 지원을 받던 친 옐친 "자유노조"와 무수한 스탈린주의의 잔재들인 적의에 찬 배외주의적 독약에 의해 무력화된 다민족의 소비에트 노동계급은 반혁명의 조류에 압도당했다. 옐친 정권은 소비에트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의 모든 흔적을 갈갈이 찢어버리고, 반혁명의 공고화를 착착 밀어부치기 위한 유리한 고지를 장악했다. 이제 양이 질로 전화되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정세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옐친과 다른 복구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정권을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대중들에게 새로운 질서가 있음을 알리는 유혈 참사의 가능성이 높다. 비참한 상황에 내몰린 노동자들에 의한 투쟁의 폭발이라는 조건에서, 혹은 심지어 이러한 투쟁이 없다고 해도, 이제 막 생겨난 부르주아지 세력들은 "강한 국가"를 통하여 압제적인 질서를 강요하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최근 항공 관제사들의 파업에 대한 러시아 OMON 폭동진압 경찰을 사용한 사악한 탄압은 어떠한 노동계급의 저항도 진압하고자 하는 착취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의 결의를 미리 보여준다. 러시아 주요 도시들에 있는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 출신 인민들에 대한 점증하는 인종주의적 히스테리는 소수민족 학살의 징후를 만들고 있다. 발틱으로부터 그루지아의 아브카지아와 몰도바의 트랜스드니에스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코카서스에 있는 아르메이나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오랜 민족주의적 내전에 이르기까지의 러시아 공화국 주변에 있는 여러 국경들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종주의 분쟁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형태의 동족산장의 유혈참극의 가능성 또한 모두 현실이다.
한때 이 세상의 착취 당하고 억압 당하는 인민들을 위한 횃불로서 복무했으며, 히틀러의 홀러코스트 기구를 박살냈고, 수십 년 동안 미국 제국주의가 세계의 반식민지 인민들에게 자신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막아왔던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는 죽었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죽지 않았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다른 곳의 막 생겨난 부르주아지 국가들은 유약하고, 고립되어 있으며,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들은 밀착된 자본가 계급의 공고한 기초에 서 있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기업가 층은 몇 안되는 소규모 투기꾼들과 마피아 조폭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과거 산업에서 공장 운영자의 직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비중을 강화하고 있는 중이다. 무장 군대들은 분개해 있고, 사기가 저하된 상태이다.
오늘날 구 소련에서 확실한 단 한가지는 점증하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다. 인민대표자대회의 12월 1일의 전야 회기에서, 모스크바에는 쿠데타들과 역 쿠데타들 그리고 "슬며시 다가오는" 쿠데타들에 관한 소문이 무성했다. 한편, 옐친은 군국주의자인 러시아 부통령 알렉산더 루츠코이와 동맹하고 있던 강력한 산업가들의 당대표인 아카디 폴스키와 격렬한 협상들을 하고 있었다. 현재 정세의 폭발성은 리투아니아에서 우익 민족주의 사주디스[Sajudis] 운동을 몰아낸 구 스탈린주의 민주노동당의 최근 선거 승리에서 확인된다. 자본주의적 참상의 현실들로 인해 얼마가지 않아 리투아니아 인민들을 도취시켰던 민족주의적 도취감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새로운 리투아니아 지도자 브라자우스카스 또한 폴스키-루츠코이와 똑같은 경제정책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한편, 구 소련의 노동계급은 계속되는 공격들에 직면해 있다. 사회는 분해되고 있으며, 대량 실업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투자가 50%까지 갑작스럽게 하락한 한편으로 산업생산은 1992년 초 이후 18%가 떨어졌다. 정부는 총체적인 붕괴를 막기 위하여 산업에 신용을 공급해오고 있다: 국가 예산적자가 1조 루블로까지 치솟고 있으며, 기업들의 부채는 2조 루블을 넘었다. 그 결과는 모스크바 타임즈에 의하면 연 14000%, 코머산트에 따르면 연 20000% 처럼 다양하게 추산되는 과도한 물가인상이었다. 10월 한 달 동안에만, 루블은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1월 이후 빵 가격은 100배 정도 올랐다. 경제가 분해되면서, 많은 인민들이 완전한 기아의 벼랑에서 비틀거리고 있다. 어떠한 불똥이라도 옐친과 동료들이 깔고 앉아 있는 부싯깃 통을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다.
떠오르던 반혁명에 맞서 필사적으로 투쟁했던 우리 국제공산주의동맹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는 죽었지만, 공산주의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 속에, 그리고 혁명적 전위의 강령 속에 살아 있다고 말한다. 국제주의적 강령 – 그것들을 통하여 소련이 수립되었던 - 은 제4 인터내셔널의 기치하에서 진척되어 왔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에 대한 계속적인 목 조르기가 10월의 파괴로 귀결될 것임을 유일하게 경고했던 사람들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반혁명에 맞서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를 위해 투쟁했고,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아직 시간이 있는 때에 정치혁명을 통하여 스탈린주의라는 혹을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러시아 문제"는 혁명가들에게는 시금석이었으며, 20세기의 핵짐적인 정치적 문제였다. 올해 초가을에 있었던 국제공산주의동맹(제4 인터내셔널주의자) 2차 총회에 앞서, 1991년 8월 이후 구 소련에서 있었던 사태 전개들에 대한 평가에 토론이 집중되었다. 총회의 주요 문서는 자본주의 국가의 점차적 공고화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최근의 사태 전개들은 비참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 '자본의 시초축적' 즉 도둑질에 관한 이야기들이 매체들에 가득하다: 국제 제국주의가 북돋우고, 교사하고, 조언을 해주는 운영자들과 과거 관료들은 모든 부정한 짓거리들을 활용하는 가운데 사회화된 재산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친듯이 싸우고 있다. 최근 러시아 연방의 항공 관제사들의 파업은 OMON과 MVD와 KGB의 인자들을 활용한 옐친 정부에 의해 치명적으로 파괴되었다. 언론의 병적 흥분상태의 인종주의적 갬페인이 한창인 중에, 파트리스 루뭄바 대학의 한 아프리카 출신 학생이 모스크바 무장대원에 의해 사살되었다. 맑스, 엥겔스와 레닌의 수많은 저작들이 순전히 이데올로기적 반공산주의적 광란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 "레닌과 트로츠키의 공산주의를 위하여"
총회는 이번 사태들에 관한 평가를 도출하고, 만장일치로 다음과 같은 9월 26일 문서를 승인했다: "1991년 8월의 사태들('쿠데타'와 '반쿠데타')은 소련에서의 사태 전개의 방향에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본가 이데올로기나 물질적 특권의 영향 밑에 있는 자들만이 당시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문서는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의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는 파괴되었음에 주목하고 이 입장으로부터 결론을 도출"할 것을 결의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야에 작성되었던 제4 인터내셔널의 창립 강령에서 레온 트로츠키는 "인류의 역사적 위기는 혁명적 지도력의 위기로 환원된다"고 썼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 지도력의 위기는 오늘날에도 첨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박해받고 있는 다민족의 구 소련 프롤레타리아트와 군대와 지식인들 중에서 사회주의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자들에게 우리는 동지들이 직면하고 있는 핵심적인 임무는 동지들의 선조들이 1917년 승리하도록 이끌었던 국제주의적 강령을 통한 투쟁 속에서 건설되는 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 전위당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 노동자들은 일어서지 않았는가?
구 소련과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노동계급은 쓰라린 패배의 교훈들을 깨달아야만 한다. 1917년 이래, 사회민주주의는 10월의 성취들을 파괴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직접적으로 제국주의자들의 복수를 교사함으로써 자신의 부르주아지 주인들에게 복무해왔다. 1923-24년 정치적 반혁명을 통하여 소비에트 노동계급을 짓밟고 권력에 오른 이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차례차례 국제적인 혁명적 기회들을 억압하면서 최초의 노동자 국가에 숨막히는 고립을 강요했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스탈린주의자들은 공포와 거짓말들을 통하여 소비에트 노동계급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부대로 만들었던 혁명적 국제주의적 의식의 모든 측면을 조직적으로 공격하고 침식했다.
고립된 노동자 국가는 소비에트 경제를 파탄시킬 목적을 가진 군사적 포위와 군사력 증강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세계시장의 압력까지 제국주의의 끊임없는 압력을 받았다. 트로츠키가 레닌 이후의 제3 인터내셔널에서 썼듯이: "소비에트 경제에 아마도 즉각적으로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군사적 개입보다는 값싼 자본주의 상품들의 개입이다." 비록 계획경제가 광대한 성장의 기간 동안에 자본주의적 무정부성에 대한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질과 강력한 발전을 위한 필요성이 전면에 대두되면서, 관료적 억압이 경제를 점점 더 침식하게 되었다. 결국, 페레스트로이카 "시장 개혁"과 동유럽 전반에 대한 자본주의 복구에 대한 묵종을 통하여, 고르바쵸프는 옐친과 그 도당에 의한 직접적인 반혁명적 학살에 수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부르주아지 계급과 스탈린주의자들은 똑같이 오랫동안 레닌의 10월을 스탈린의 보수적인 관료적 지배와 동일시하려고 해왔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스탈린주의는 레닌의 국제주의의 반정립이다. 퇴행화된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 (그리고 스탈린주의를 모델로 하여 나중에 수립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후진적이었던 러시아의 고립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로 확산시키는데 실패한 것에서 비롯된 역사적인 이형체였다. 스탈린주의는 사회주의를 향한 진보에 대한 장애물을 의미했다. "노동자들의 국가도 부르주아지 국가도 아닌?"에서 트로츠키가 썼듯이:
"'관료적 기형화'였던 것이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유산계급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국유화된 소유의 폐허 위에서 노동자 국가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집어삼키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극도로 가까워졌다."
스탈린주의 정권은 2차 세계 대전에서 나찌의 침략에 대한 소비에트 대중들의 영웅적인 승리의 결과 자신의 존재를 연장할 수 있었던 반면, 불행하게도 트로츠키의 맑스주의적 분석은 궁극적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증명되었다.
왜 소비에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성과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투쟁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반혁명이 승리했고, 내전도 없이 노동자 국가를 파괴하였는가? 프롤레타리아트 정치 혁명의 전망을 기획했던 자신의 1933년의 독창적인 저작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지배하에서 소련이 어떠한 국가기구나 혹은 소유형태들에서의 질적인 변형도 없이 노동자 국가에서 부르주아지 국가로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변화했다고 주장하던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다양한 "신 계급" 이론들의 옹호자들을 논박했다:
"한 계급의 수중에서 다른 계급의 수중으로의 권력의 이행의 격변적인 성격과 관련된 맑스주의 테제는 역사가 미친듯이 전진하는 혁명적 시기에 뿐만 아니라 사회가 뒤쪽으로 굴러가는 반혁명의 시기에도 적용된다. 소비에트 정부가 점차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그것에서 부르주아지의 그것으로 변화해왔다고 주장하는 자는 단지 소위 개량주의의 필름을 뒤로 돌리고 있는 자일뿐이다."
-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1933년 10월)
구 소련에서는 분명히 점차적이거나 알아차리지 못할 사회적 반혁명이 없었다. 반혁명은 소비에트 블럭 전체에서 극도로 격렬했고 격동적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또한 소련에서 자본주의를 복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근본적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내전이 필요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동유럽과 DDR(동독)에서의 반혁명적 전복들에 관한 2년 전의 광범위한 ICL 토론에서, 트로츠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회혁명과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서의 사회적 반혁명에 관하여 과도한 유추를 했다는 것이 지적되었다.(조셉 세이모어의 "동유럽에서의 스탈린주의 지배의 붕괴에 관하여"와 알버트 세인트 존의 "맑스주의적 명료화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위하여"를 보시오. 스파르타시스트 45-46호, 1990-91년 겨울)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에 대한 직접적인 소유권을 행사하는, 그리고 그래서 자신들의 소유를 방어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체제의 타도에 격렬하게 저항할 수 밖에 없는 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의 보존은 주로 노동계급의 의식성과 조직화에 달려있다.
트로츠키 자신이 1928년 그의 글 "이제 무엇?"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의 국가 산업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 당의 역할,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자발적인 내부적 결속, 행정가들, 노동조합 근무자들, 공장 소조원들 등의 의식적인 규율 등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결정되고 보장된다."
- 레닌 이후의 제3 인터내셔널
그리고 "노동자 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티즘"(1935년 2월)에서 다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와는 정반대로, 사회주의는 자동적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건설되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이 글들을 썼던 때에는, 비록 스탈린주의의 왜곡과 수정으로 이미 상당부분 왜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월 혁명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은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 대중들의 개인적인 직접적 경험의 한 부분이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민족주의 관료집단은 "위대한 10월 사회주의 혁명"으로 우상화되었던 것에 대한 어떠한 진정한 이해라도 박멸하기 위해 많은 짓을 했다. 소비에트 대중들의 의식 속에서,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하여 "위대한 애국적 전쟁"으로 칭해졌고, 전쟁기간 동안 스탈린이 만들어냈던 러시아 민족주의적 선전으로 가득했던 2차 세계대전은 소비에트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으로서 10월 혁명을 대신하게 되었다. 결국, 스탈린과 그의 계승자들은 소비에트 인민들에게 그들의 민족주의적 전망을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는 "혁명의 수출"이라는 불명료한 "트로츠키주의 이단"으로 조롱 당하거나, 기껏해야 아무 내용도 없는 냉소적인 립 서비스에 그쳤다.
모든 제국주의의 최후통첩에 대한 비굴한 굴종이었던 고르바쵸프의 "신사고"와 함께, 볼셰비키 혁명의 이상에 대한 립 서비스조차 버림받았다. 소련의 국경에 있는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반동에 맞서 투쟁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국제주의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들었고, 그렇게 믿고 있던 소비에트 병사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하여 "러시아의 베트남"과 같은 죄를 짓고 있다고 비방 당했다. 고르바쵸프의 굴욕적인 아프가니스탄 철군과 DDR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합병에 대한 허용은 소비에트 대중들 사이의 패배주의와 무기력을 더하는 것에만 복무했다. 한편 고르바쵸프의 양보들을 비난했던 소위 스탈린주의 “애국자들”은 노골적으로 짜르 시대의 냄새를 다시 맡으면서 대 러시아 제국의 야심들에 관한 북만을 두드릴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쵸프의 “시장 사회주의”의 참상에 반대하는 1989년 여름 소비에트 광산에서 발생했던 즉자적인 파업들은 전투적 노동계급 투쟁을 위한 잠재력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보리스 카갈리츠키가 그의 책, 이젠 안녕 페레스트로이카(1990년)에서 썼듯이, 많은 지역에서 파업위원회들은 식량 분배를 조직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대중 권력의 실질적인 중심"이 되었다. 우리가 당시 지적했듯이, 쿠즈바스[Kuzbass] 파업들은 "파업위원회들과 노동자 민병대들을 포함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의 조직적 형식들을 재빠르게 만들어냈다"("소비에트 노동자들이 그들의 힘을 과시하다", 노동자 전위 482호, 1989년 7월 21일).
이러한 사태의 발전은 집합적 농민들, 여성들, 연금 생활자들, 병사들과 사무원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정치 혁명을 통하여 관료집단을 몰아내면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정치권력을 위한 기초로 복무할 수 있었던 진정한 소비에트들의 가능성을 가리켰다. 그러나 고르바쵸프 정권이 광산 노동자들에 대한 약속을 어기자, "AFL-CIA"에 의해 훈련받은 친 제국주의 선동가들이 지도부의 공백을 틈타 침투하여 옐친을 위한 공성망치로서 광산 노동자들 중에서 소수의 활동가들을 조직하면서 독립광산노조를 설립했다.
그러나, 광산노동자들의 다수뿐만 아니라 나머지 소비에트 노동계급은 옐친이 이끄는 "민주주의자들", 고르바쵸프, 그리고 그보다 더 보수적인 부위의 스탈린주의자들 사이의 3파전에서 수동적인 채 있었다. 노동자 대중들은 "시장 경제"의 친서방 옹호자들에 대하여 완전히 적대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솔리다르노스크가 상승하던 동안의 폴란드에서와는 달리, 자본주의 반혁명 세력들은 반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소비에트 대중들을 조직하지는 못했다.
동시에, 엘리트 관료 (소위 노멘클라투라)는 브레즈네프 시대의 언어도단의 부패와 냉소주의에 의해 완전히 불신 당하고 있었다. 예고르 리가쵸프와 같은 고르바쵸프 정권의 보다 보수적인 인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던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이따금 씩의 호소들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예를 들면 노동자들의 공동전선(OFT)에서 조직된 스탈린주의적 "애국자들"은 상대적으로 작은 숫자의 노동자 활동가들을 조직할 수 있을 뿐이었다.
원자화되고, 어떠한 반자본주의적 지도력도 갖추지 못한, 어떠한 일관되고 철저한 사회주의적 계급의식도 부재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계급투쟁 가능성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던 소비에트 노동계급은 서서히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자본주의 반혁명에 맞서는 저항에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트로츠키가 레닌 이후의 제3 인터내셔널에서 지적하였듯이: "만약 어떤 군대가 전투없이 결정적인 상황에서 적에게 굴복한다면, 이 굴복이 '결정적인 전투'의 자리를 완전히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전투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그렇다."
군대와 관료집단
그렇다면 맑스주의적 이해에서 국가의 핵심인 무장군대들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노동계급이 단순히 자기 자신의 목적들을 위하여 부르주아지 국가를 활용할 수 있다는 개량주의적 관점에 반대하여 쓰여진 국가와 혁명(1917년)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혁명은 과거 국가기구의 조력을 받아 지휘하고 통치하는 새로운 계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과거 기구를 분쇄하고 새로운 기구의 조력을 받아 지휘하고 통치하는 새로운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비슷하게 사회적 반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를 분쇄하고 부르주아지 계급을 위해 복무하는 새로운 국가기구의 수립을 필요로 한다. 이 작업은 10월 혁명에서 시작된 노동자 국가에 질적 퇴행의 영향을 미쳤던 스탈린주의 정치 반혁명에 의해 광대하게 촉진되었다.
하층부에서 소비에트 군대는 사회의 다른 부문들에서와 똑같은 압력들과 무기력의 영향을 받았다. 이와는 반대로 군사 지휘관들인 상층부들은 소비에트 관료집단의 구성부분이었다. 트로츠키는 관료집단은 노동자 국가와 적대적인 제국주의 외부 포위세력들 사이에서 조정자적 역할을 하는 깨지기 쉬운 모순적인 계층이라고 설명했다. 이 모순적 지위가 관료집단 내부에서 일정 정도의 모순적인 정치적 충동을 만들어냈다: "관료집단 사이에서는 진정한 볼셰비키주의(이그나스 라이스)에서 완전한 파시즘(부텐코)까지 모든 정치적 사상의 색조가 발견된다”(이행의 강령). 라이스는 제4 인터내셔널을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살해되었던 소비에트 정보기관의 지도적 중핵이었다; 부텐코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로 탈주했던 소비에트 외교관이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이중적 성격과 관료집단이 품고 있던 서로 충돌하는 정치적 욕구들은 볼셰비키 "고참 수호자"의 잔재마저 박멸했던 1930년대 피비린내 나는 숙청들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프롤레타리아트적 소유형식들에 의존하고, 이 소유형식으로부터 자신들의 특권들을 획득하면서도 이것을 방어하기 위하여 단호하게 전념하지는 않았다. 관료집단은 사회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나 혹은 반혁명으로부터의 강력한 정면 공격의 충격 하에서, 관료집단은 산산조각으로 박살 날 것이다. 트로츠키가 썼듯이:
"프롤레타리아트가 행동으로 나설 때, 스탈린주의 기구는 공중에 매달린 채 있을 것이다. 만약 여전히 프롤레타리아트가 저항을 시도한다면, 그렇다면 관료집단은 노동자들의 행동에 맞서서 내전의 방책들보다는 경찰을 통한 방책들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진정한 내전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 부활하는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와 적극적인 반혁명 세력들 사이에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두 개의 대중적 진영들 사이의 공개적인 충돌의 경우, 관료집단이 하는 독립적인 역할에 관해서는 일언반구 조차 있을 수 없다. 관료집단의 양극의 세력들은 바리케이드의 서로 다른 쪽으로 던져질 것이다."
-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
1956년 헝가리 혁명의 경우에, 거의 대부분의 관료계층이 봉기를 일으킨 친 사회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으로 넘어갔다. 반대로, 보다 근래에 소련에서는 제국주의와 내부적 시장 세력들에 대한 화해라는 지속적인 압력이 훨씬 더 많은 부문들의 관료집단을 옐친이 일찍이 수석 대변인이 되었던 자본주의 복구주의 진영으로 가도록 강요했다.
독립적인 역할을 하는데 있어서 관료집단의 완전한 무능력은 1991년 8월의 사태들에서 강력하게 증명되었다. 이들 답답한 관료들이 복구의 강령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제국주의 열강을 옹호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건 대항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사실이 (고르바쵸프의 주요 부관들에 의해 구성되었던) "비상 위원회"의 외관상의 무능력의 – 옐친을 체포하지 못한 것이나 옐친의 워싱턴과 직접 연결되는 라인을 끊지 못한 것 – 뒤에 있다. 만약 옐친의 바리케이드에 집결해 있던 이윤을 착취하던 혐오받던 "협동조합주의자들", 투기꾼들, 루블 백만장자들을 쓸어내기 위한 투쟁을 조직하면서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섰더라면, 이것은 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적극적인 반혁명 세력들 사이의 내전을 직접적으로 제기했을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의 시작을 의미했을 것이다. 반혁명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을 위하여 조직되는 것을 훨씬 더 두려워하던, 고르바쵸프/옐친에 대한 소위 "골수" 스탈린주의 "애국자" 반대파 중의 단 한 명도 옐친 지지 세력들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그렇게 하기는 커녕 쿠데타 위원회의 무기력한 선포 뒤에 숨었다.
권력에 대한 지휘권을 장악하면서 옐친 정권은 보다 폭 넓은 층의 군 장교들을 임금 인상으로 매수하는 한편, 자신을 추종(예를 들면, 샤포쉬니코프)하거나 혹은 요란한 민족주의를 분명히 하던 보다 젊은 장교 층을 배치하면서 군대의 최고 지휘계통을 재조직하는 것으로 즉각적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반공산주의적 금지를 역겨워 하면서 일부 친 사회주의 장교들이 군대를 떠나면서 자기 숙정이 있었다. 어떤 경우든, 트로츠키가 배반당한 혁명(1937년)에서 언급했듯이, "부르주아지 복구는 아마도 [국가기구로부터] 보다 혁명정당으로부터 더 많은 인자들을 쫓아내야만 할 것이다."
1991년 12월 소련의 법률적 해체는 사산한 "독립국가연맹"의 명목상의 지휘하에 있었던 모든 연맹의 무장군대들을 일부가 "16번째 공화국"이라고 이름 붙인 것처럼 허공에 매달린 채로 버려두었다. 다음 달 크렘린에서의 한 장교 대회는 다민족 기관으로서의 군대를 유지하는 것을 지지하는 감정을 압도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우리가 당시 경고했듯이 "다민족의 소비에트 국가와 군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기초하여 창설되었던 사회화된 소유를 구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노동계급이 움직였더라면, 의심의 여지없이 군대의 일부는 노동계급의 쪽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옐친의 반쿠데타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1991년 12월 포고에 의해 형식을 갖추었던 원심력들이 군대를 분열시키고 노동자 국가의 잔존물들을 제거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몰도바에 대한 요란한 배외주의적 주장에서와 같은 민족주의는 무장군대를 새로운 자본주의적 질서에 충성하도록 결합시키는 데 있어서의 추진력이었다.
2월 옐친에 반대하는 항의를 해산하기 위하여 러시아 OMON 군대를 활용한 것은 새로운 정권에 충성하는 억압적 기구의 출현을 의미했다. 우크라이나와 그 외 공화국들이 분리된 군대들을 창설하고, 자신들의 영토에 주둔하고 있는 소비에트 군대로부터의 충성서약들을 요구하자, 5월에 옐친은 쿠데타 동안에 옐친과의 동맹을 선언했던 거친 러시아 민족주의자였던 상대적으로 젊은 장군 그라체프를 새로운 러시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면서 다른 군대와 구별되는 러시아 군대의 창설을 포고했다. CIA의 "자유 유럽 라디오/자유 라디오"(RFE/RL) 리서치 리포트(8월 21일)의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많은 중요한 측면들에서, 1991년 12월 CIS[독립국가연방]이 정치적 영역에서 소비에트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던 것처럼, 1992년 5월 18일 군장성 파벨 그라체프에 대한 러시아 국방장관 직위로의 임명은 안보 영역에서 붕괴 후 소비에트 시대의 시작을 의미했다.”
7월 26일 해군의 날, 세인트 앤드류의 십자가인 구 짜르 시대의 해군 상징깃발이 함대 전역에 게양되었다. 한편 해군 대장 애드머럴 체르나빈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러시아 함대는 자신의 깃발을 되찾아야만 한다. 소비에트 해군이 과거의 깃발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러시아 해군의 정신에 조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인디펜던트[런던], 7월 27일). 10월 혁명에서 볼셰비키주의의 요새였던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에서, 그리고 겨울 궁전에 대한 집중 포격으로 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트 봉기의 승리를 알렸던 함정 오로라의 꼭대기에서 펄럭이는 짜르 시대의 깃발은 비록 기괴한 형식으로이기는 하지만 승리한 반혁명 세력들에 의한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의 분해를 적절히 상징했다.
옐친과 다른 공화국들의 그와 대등한 직위의 상대방들은 현재 초기 단계의 부르주아지 군대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군대들의 자본주의에 대한 충성은 아직 피의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 "전체 군대가 정치노선들 혹은 인종적 노선들에 따라서 분해될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한 평자는 "러시아의 지도자들이 국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신중할 것이다"로 언급했다.(마크 크래머, "붕괴 후 소비에트 국가들의 군대들", Current History, 1992년 10월)
참상에 대한 죄는 누구에게 있는가?
옐친의 바리케이드들에 자리를 잡았으며, (일부는 글자 그대로) 부끄러움도 없이 서둘러 소련은 죽었고 매장 당했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나아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여럿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결국에는 10월 혁명 이래 부르주아지 계급이 증오했으며, 파괴하려고 노력했던 소련에 대한 (더욱더 형식적이고 공허한) 방어라는 골칫거리를 털어 버렸다.
1933년 그의 저작에서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가 "내외부의 적들의 합동 공격들에 의하여 붕괴할" "비극적인 가능성"에 관하여 경고했다:
"그러나 이 가능한 최악의 경우에, 참상의 죄인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문제가 이후 계속될 혁명적 투쟁의 과정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같게 될 것이다.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에게는 털끝만큼의 오명도 부과되지 말아야만 한다. 치명적으로 위험한 시기에 그들은 마지막 바리케이드에 남아 있어야만 한다.
-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
그리고 이것이 국제공산주의 동맹이 해왔던 것이다. 우리의 제한된 역량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우리는 반혁명을 역전시키고 패배시키기 위한 강령으로 소비에트 노동계급을 획득하기 위한 혁명적 척도를 제공하기 위해 투쟁했다. 지난 2월 모스크바에서 살해당한 우리의 동지 마르타 필립스는 이러한 대의를 위한 투쟁에서 최고의 희생을 했다.
5년 전, 최초의 공개적인 반혁명 세력 - 팜야트의 반유대주의 토착주의 파시스트들 - 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자신의 머리를 쳐들었을 때, 우리는 달걀 속의 오늘 날의 흑백인조를 분쇄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중심이 된 대중적 투쟁으로의 조직화를 요구했다. 옐친이 기획했던 전면적인 자본주의 복구 계획을 1990년 8월 고르바쵸프가 승인했을 때, 우리의 첫 번째 러시아어 유인물은 "소비에트 노동자들: 옐친/고르바쵸프의 500일 계획을 분쇄하라!"(노동자 전위 510호, 1990년 9월 21일)라는 요구를 제기했다. 그 해 11월, 레닌그라드에서의 혁명일 기념식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깃발이 소련에서 최초로 공공연하게 펄럭였다.
우리의 빈약한 자원들과 제한적인 러시아어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르바쵸프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시작된 격동의 정세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1989년 여름의 극적인 광산노동자 파업들에 뒤이어, 우리는 그들의 투쟁으로 소비에트 노동계급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뒤흔들었던 이들 전투적인 노동자들의 수중에 우리의 트로츠키주의 선전이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ICL의 대표자들이 1990년 10월 도네츠크에서 있었던 광산 노동자들의 총회에 개입했고, 여기서 그들은 영국 광산 노동자 지도자 아서 스카길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 색출 마녀사냥에 소비에트 노동자들을 참여시키려던 CIA에 의해 획책된 시도를 일시적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1989-90년 동독에서의 격변 동안에, 동독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을 실행하기 위한 ICL의 투쟁의 일환으로서, 우리는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소비에트 병사들을 향한 것이었고, 이들 병사들 가운데 광범위하게 회람되었던 우리의 러시아어 선전물을 출판했고, 이후 우리는 소비에트 장교들과 병사들의 집회들에서 발언했다. 1991년, 나찌 독일에 대한 적군 승리 기념식에서, 독일 스파르타시스트 노동자당과 폴란드 스파르타시스트 그룹은 베를린 외곽의 한 공군기지에서 수백 명의 소비에트 군과 고용된 사람들을 위한 공동 토론회를 열었다.(노동자 전위 526호, 1991년 5월 10일자를 보시오.) 그리고 나서, 옐친의 반쿠데타 한 달 전에, ICL 대표 마르타 필립스는 모스크바 노동자 대회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을 중단시키기 위한 진정한 소비에트들의 건설, 모든 형태의 배외주의적 반동에 대한 반대, 그리고 국제 사회주의 혁명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1991년 8월의 "소비에트 노동자들: 옐친-부시의 반혁명을 쳐부숴라!"는 우리의 요구는 옐친의 복구주의 공세에 반대하여 소련 전역에 광범위하게 배포되었던 최초의 선언이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복구에 반대하는 그리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정치권력의 기관들로서의 진정한 소비에트들을 위한 독립적인 노동계급 투쟁을 위한 강령을 제출했다:
"독립적인 노동자 위원회들이 공장들을 접수하고 생산을 통제함으로써 정리해고들과 사유화를 막아내기 위하여 공장들, 광산들, 철도 작업장들과 다른 기업들에서 조직되어야만 한다.... 병사와 장교들의 위원회들이 숙청에 반대하기 위하여 그리고 군대가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공격하기 위하여 활용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하여 조직되어야만 한다.... 노동자 민병대들이 폭력적인 폭도들과 인종주의적 학살자들에 맞서 ... 방어하고 그들을 분쇄하기 위하여 조직되어야만 한다.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를 방어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새로운, 진정으로 공산주의적 전위정당을 건설하는 것이고, 현재와 같은 절박한 때에 이것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길로 복귀하자!"
우리는 부활하는 반유대주의와 대러시아 배외주의에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여성들이 자본주의 복구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992년 2월의 시위들에 대한 옐친의 OMON과 모스크바 민병대(경찰)의 동원에 뒤이어, 우리는 "'백색 짜르' 보리스가 새로운 피의 일요일을 원한다."는 긴급성명을 발표했다. 식량과 다른 필수품들에 대한 가혹한 물가인상이 광범위한 기아를 위협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투쟁강령을 제기했다:
"기업들로부터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된 독립적 자기자신의 위원회들을 통하여, 노동계급은 식량 공급을 통제하고 분배를 책임져야만 한다. 다시 한번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사이비 소비에트들, 그리고 무기력한 오늘날의 의회들과 같은 공문구가 아니라 현장들과 병영들로부터 선출되고 소환될 수 있는 대표들로 구성되는 투쟁을 위한 기관인 진정한 소비에트들을 조직하는 것이다. 강력한 소비에트들로 조직된 - 국제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이며 혁명적인 - 노동 인민들은 손가락 한번 튕기는 것으로 불안정한 자본주의 복구주의자들의 정권들을 쓸어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짜르 반대 - 옐친을 쫓아내라 - 노동인민의 공화국을 위하여!"
이들 요구들은 오늘날 비록 부르주아지 국가의 강화가 정치혁명이 아니라 갓 태어난 자본가 계급을 쓸어 없애기 위한 사회주의 혁명을 제기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력하게 유효하다.
참상에 대한 죄는 누구에게 있는가? 무엇보다도 책임은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있다. 1923-24년 스탈린이 주도했던 정치 반혁명에서 시작하여,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국가기구는 "노동계급의 무기에서 노동계급에 대한 관료적 폭력의 무기로, 그리고 나라 경제에 대한 사보타지를 위한 무기로 이행했다"(이행의 강령). 브레즈네프 후반기가 되면서, 계획화되고 중앙집중화된 경제에 대한 관료적 오경영은 소비에트 경제성장의 급격한 감소로 귀결되었다. 한편, 만연한 부패는 관료집단의 제멋대로인 자식들로 하여금 서구의 자본가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욕구들을 자극했다.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들을 폐지할 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으로 인해, 강력한 경제성장을 위해 관료집단이 생각한 유일한 선택은 신부하린주의자들의 시장에 기반을 둔 "개혁"이라는 강령 -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1991년 8월 "비상위원회"가 "개방 없는 개혁"에 불과한 것을 제안했던 반면, 오늘날 옐친을 반대하는 척하는 빅토르 안필로프의 RKRP, 크류츠코프의 RPK, 프리그린의 SK 그리고 니나 안드레야바의 VKPB 등과 같은 스탈린주의의 잔재들은 자본주의 반혁명에 대한 "붉은" 덮개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들은 계급투쟁을 조직하기 위하여 시도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들의 배외주의적 정책들이 그들로 하여금 여전히 다민족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흥미를 끌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본가 계급의 "평화"를 혼란스럽게 할 어떠한 투쟁에도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1992년 "합동 반대파 창립선언"에서 분명하게 선언되었다. 이 선언에는 모든 스탈린주의 잔재들과 메드베데프와 데니소프의 SPT도 서명했다. 이것은 대러시아 배외주의, 군주주의자, 그리고 명백한 파시스트들 사이의 구역질나는 "적-갈색의" 연합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내적 평화와 민족적 신뢰에 기초하여... 조국을 구하자고 요구했다. 그래서 이들 모든 조직들은 최근 항공관제사들의 파업에 반대했다.
"작업 집단들"을 통한 사유화를 주장하면서, 이들 한 때 스탈린주의자였던 자들은 반혁명들의 기업주의 세력의 "좌익" 쪽이 되려고 하는데, 이들의 가장 강력한 대표가 폴스키와 루츠코이의 시민조합[Civic Union] 연합이다. 현재 스스로를 러시아 독립노조연맹(FNPR)으로 부르고 있는 과거의 공식적인 노동조합 관료집단이 그들에 줄을 대고 있다. 옐친의 수상 가이다르가 자본 유입을 위하여 서구 국가들에 굽실거리고, 주식소유 증서를 전체 인민들에게 분배하는 것을 통하여 사유화를 하겠다는 환상적인 계획을 추진하는 반면, 폴츠키/루츠코이 분파는 소유권을 과거 운영자들의 수중에 직접 쥐어줌으로써 강력한 군사산업 부문을 유지하기를 희망한다.
강국 러시아를 위한 짜르시대 표어인 데르자바 건설의 이름으로, RKRP와 그 도당은 기꺼이 반 공산주의적 파시스트 러시아 전국 소보르[Russian National Sobor], 반유대주의 스테르리고프[Sterligov](이제는 짜르 왕정복고를 추진하고 있다)으로부터 새롭게 조직된 "좌-우" 민족구원전선[National Salvation Front]에 이르기까지 모든 반동적 임시변통적 조직들과 함께 해왔다. 참으로, RKRP로부터 SPT에 이르기까지 과거 CPSU에 기원을 둔 모든 조직들은 "시장경제"(자본주의의 복구)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단순히 조건에 관하여 말다툼할 뿐이다 - 누가 과실을 챙길 것인가(같은 팜플렛의 "한 때 스탈린주의자였던 자들: 민족주의 반혁명의 좌익"을 보시오). 반면, 보리스 카칼리츠키의 명백하게 사회민주주의적인 노동당(PT)은 FNPR 관료집단의 한 부분과 동침하고 있으며, 폴츠키 쪽 사람들이 집중되어 있고, 의장 콘스탄티노프가 소보르(Sobor)의 부의장인 러시아 총 노동 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수 많은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조직들 모두는 "작업 집단들" (즉, 공장 운영자들)을 통한 사유화를 주장하면서 기업주의적 선택의 뒤를 따라 보조를 맞추어 왔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많은 노동자들은 실업과 참상에 대한 절박한 마지막 방어막으로서 그들의 공장 운영자들이 산업의 소유권을 장악하는 것을 바라볼지도 모른다.
소비에트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계들이 기업주의적 정권 하에서 보장될 것이라는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폴스키/루츠코, 옐친/가이다르 혹은 이들의 중간에 있는 다양한 많은 자들 누구의 지배하에 있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잔혹한 착취의 채찍과 광범위한 실업을 의미한다.
"국가자본주의": 반 공산주의적 신화
소련의 붕괴가 더러운 스탈린주의의 역사에 최종적인 묘비명을 붙였다면, 그것은 다양한 트로츠키주의의 배신자들이 그것들의 뒤에서 자신들의 10월 혁명의 성과들에 대한 방어의 거부를 위장하고자 했던 수많은 잘못된 "이론들" 또한 박살을 냈다.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는 "이론"은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분석을 거꾸로 세웠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진정으로 기괴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상정한다 - 자본가적 경쟁과 가치법칙이 체제의 외부에 있는 자본주의, 주기적인 과잉생산의 위기들이 아니라 행정적 명령에서 기인하는 왜곡들과 병목현상들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고질적인 대량 실업이 아니라 노동력 부족들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그것이 토니 클리프의 펜에서 나왔건 그보다 앞선자들에 의한 것이건 이러한 용어학 상의 교묘한 재주의 목적은 소련에 대한 방어를 위한 기초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제3 캠프"("워싱턴도 아니고 모스크바도 아닌")를 장악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으로, 오늘날 "국가자본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사망"을 축하하는 것에 있어서 제국주의자들에게 합류한다. 1991년 8월, 클리프주의자들은 "공산주의는 붕괴했다"며 환호했고, "끝이 아니라 시작"(사회주의 노동자 1991년 8월 31일)으로서 옐친 세력의 상승을 환영했다. 제국주의적 반공산주의와의 공감대는 명백하지만, "국가자본주의"의 논리는 엉터리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기 보다는 간단하게 자살을 자행했던" 전체 "자본가 계급"이라는 소위 진풍경을 목격했다. 그리고 참상과 실업, 그리고 동족상잔에 의하여 지금 사기가 저하된 수 많은 동유럽과 구 소련의 노동 인민들은 자신들이 단지 한 종류의 자본주의로부터 다른 종류로 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그런 생각을 더더욱 환영하지도 않는다.
데이비드 노스의 "국제 위원회"와 정치적 도적떼 등등과 같은 "제3 진영주의자들"의 후발 조직들은 스탈린주의는 "철저히 반혁명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트로츠키의 관료집단의 "이중적 지위"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보다 적절하게 말하면, 클리프의 이론처럼, 목적은 소련 방어로부터 자신들의 손을 씻자는 것이다. 노스는 처음부터 고르바쵸프는 “모든 남아 있던 10월 혁명의 성과들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청산”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페레스트로이카 대 사회주의[1989년]). 그리고 나서 노스는 옐친이 그 소련의 법적인 해산을 포고하는 순간, 구 소련의 "어느 한 공화국이라도 노동자 국가로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서둘러 선언했다.("소련의 종말", 불리틴, 1992년 1월 10일)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새로운 계급"이나 "완전히 반혁명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다양한 이론들은 무릎반사적 도덕주의에 호소하는 것에서 단결한다. 반대로, 배반당한 혁명 등의 저작들에 정교화되었던 소비에트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에 대한 트로츠키의 변증법적이고 유물론적인 분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실천의 강령을 제공한다. 스스로를 맑스주의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는 이러한 우리는 최초의 고르바쵸프 개혁의 모순적인 성격에 관하여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물질적 이해들에 역행하는 것일뿐더러 노동자들의 깊이 축적된 집단적 감정을 모욕한다. 동시에, 정권의 글라스노스트에 대한 요구는 공식적인 정책들에 대한 조직화된 반대를 어느 정도 허용한다." 고 최초의 고르바쵸프 개혁들의 모순적인 성격을 지적했다. (스파르타시스트 동맹/미국 총회 문서, "혁명적 정세를 향하여", 1987년 6월)
처음 몇 해 동안, 고르바쵸프의 신 부하린주의 개혁들은 소비에트 경제를 되살리는데 일정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하버드 경제학자 마샬 골드만은 그의 책 페레스트로이카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1991년)에서 고르바쵸프의 1985-86년 "강화"와 "가속"의 강령에 관하여 “이들 개혁들이 처음에는 작동하”고 "산업 성장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였다”고 지적한다. 고르바쵸프는 심지어 소비에트 역사 상 최대의 곡물 수확(1990년 2억 4천만 톤)을 성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의 1988년 새해 첫 해의 기업 자기 경영의 도입은 붕괴로 가는 결정적인 수순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계획화된 경제에서 계획의 포기는 경제 행정업무의 붕괴와 광범위한 결핍들과 약탈로 이어졌다. 골드만은 그 결과는 "계획 체제의 침식과 경제의 붕괴"였다고 쓰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 개혁들이 실패하면서, 1990년 8월 고르바쵸프는 "500일 계획"을 승인함으로써 자본주의 복구에 대한 그의 지지를 공공연하게 선언했으나, 끊임없이 지그재그로 흔들리면서 후에는 이것으로부터 후퇴했다.
"시장 사회주의" 개혁들로부터 완전한 자본주의 복구의 강령으로의 고르바쵸프의 진화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넘어서(1989년)를 쓴 어니스트 만델 같은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스탈린주의 정권을 "개혁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그들의 사소한 차이들이 무엇이건 간에, 옐친 반혁명에 대한 지지가 이들 모든 수정주의자들을, 클리프에서 노스, 만델까지, 그리고 과거 테드 그란트가 지도했던 러시아의 세르게이 베이츠의 노동자 민주주의와 연합하고 있던 영국의 밀리턴트 그룹 역시도 함께하게 했다. 이들 모든 조직들의 근저에 깔려 있는 노선은 10년 전에 이들 모두가 단결하여 폴란드에서 반혁명적 솔리다르노스크를 환호했고, 적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비난했던 것처럼 사회민주주의적 반소비에트주의에 대한 굴종이었다.
반대로, 스파르타시스트 경향은 "아프가니스탄의 적군을 환영하라!"고 선포했고, 폴란드에서는 "솔리다르노스크의 반혁명을 중단시켜라!"라고 선언했다. 1989년 워싱턴을 달래기 위한 고르바쵸프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에 대하여, 우리는 소련 국경 내에서 보다 그곳에서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고르바쵸프 정권은 어디에서도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는 결정은 최초의 그리고 가장 힘든 조치"였으며 "다른 모든 것들이 그것으로부터 기인했다."고 고르바쵸프의 외무장관 에듀아드 셰바르드나제가 최근 말했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1년 후, 고르바쵸프는 독일의 자본주의적 재통일에 대하여 파란등을 켜주었다.
ICL만이 유일하게 동독의 제국주의적 편입에 대하여 분명하고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의 붕괴로부터 벗어나는 방도를 보여주는 트로츠키주의 강령의 위력이 1990년 1월 3일, 독일 스파르타키스트가 제안했던 베를린의 트레프토브 공원에서의 25만 명이 넘는 반파시스트 친소비에트 집회에서 강력하게 나타났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이 한 국가에서의 반혁명은 용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DDR을 팔아 치운 것이 직접적으로 소련의 파괴를 준비했다.
제4 인터내셔널을 재건하라!
소련의 붕괴와 계속되는 제국주의자들간의 경쟁의 격화는 세상을 훨씬 더 위험한 곳으로 만들어왔다. 고르바쵸프가 찬성을 했던 미국이 주도했던 페르시아 만에서의 제국주의자들의 학살 동안에 선포되었던 "새로운 세계적 혼란"이 1차 세계 대전이라는 학살로 귀결되었던 구 세계 질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이번에는 핵으로 인한 대재앙의 위협을 제기하면서. 경쟁하는 열강들이 자기들끼리 반목하면서, 그리고 과거의 소비에트 블럭을 신식민지들로 분할하려고 경쟁하면서,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인하여 수십 년 동안 유지되었던 제국주의자들의 단결이 깨어졌다.
동시에, 강화된 계급투쟁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이제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소비에트라는 대항력에 의해 제약받는다고 느끼지 않는 세상의 반식민지 인민들이 완전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제국주의 서방 국가들에서, 증가하는 무역전쟁과 착취는 이미 독일,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거대한 계급전투들로 귀결되었다. 로드니 킹 폭행 사건에서 인종주의적 경관들에 대한 석방 판결에 뒤이었던 로스앤젤레스에서의 다인종 격변은 미국에서의 사회적 불안정성을 증명한다. 동유럽과 구 소련에서, 노동계급은 반혁명이라는 망연자실케 한 경험으로부터 곧 회복하여 자본주의적 착취의 참상에 맞서 투쟁을 시작할 것이다. 이미 지난 해 내내 거대한 파업들이 폴란드를 휩쓸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기타 구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노동자들은 생존가능한 자본주의 착취의 체제가 응결되기 전에 재조직하여 반격할 시간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옐친과 그 도당들에 대한 증오와 신랄함이 끓어오르고 있다. 독일 마르크로의 편입이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거짓말에 노동인민 대중들이 속았던 구 동독에서와는 달리, 구 소련에서는 이러한 긍정적인 환상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구 소련에는 "시장"에 대한 다른 대안이 없다는 광범위한 관점이 있고, 이것에 관하여는 파산한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주요한 책임이 있다.
완전한 자본주의의 재창조를 향한 길은 네프스키 프로스페크트[Nevsky Prospekt]만큼 순탄하지는 않다. 착취자들과 억압자들이 되려는 자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노동계급은 스스로가 모든 경우의 반유대주의와 반여성, 그리고 반동성애에 반대하는, 러시아의 아프리카, 아시아 학생들과 중앙아시아 인민들을 포함하여 점점 더 많이 폭력적인 인종주의적 테러에 노출되는 인민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일어서는 "인민의 호민관"임을 주장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배외주의와 민족주의에 의하여 부추겨지는 분열들을 극복할 수 있으며, 스탈린주의에 의하여 조장된 수십 년 동안의 잘못된 의식을 쓸어 없앨 수 있는, 그리고 구 소련에서의 투쟁들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들과 연결시킬 수 있는 혁명적 지도부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대중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신뢰를 잃게 했다고 불평하지만, 스탈린주의의 이보다 훨씬 더 큰 범죄는 친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머리를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인민전선", 그리고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이라는 유토피아와 같은 반맑스주의적 환상들로 가득 채우면서 친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의식을 왜곡시켰던 방식이었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외국에서의 혁명적 투쟁에 대한 억압을 의미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계급투쟁과의 모든 연계로부터 소비에트 노동계급의 고립을 의미했다. 60년 이상 동안, 소비에트 노동자들은 세계의 정치 발전들로부터 담을 쌓아 그들을 분리하는 누에고치 속에 있었다. 노동자들을 빈곤과 처참함으로 몰아넣었던 반혁명을 되돌리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소비에트 노동계급은 빼앗겼던 혁명적 유산을 필연적으로 다시 빼앗아 활용해야만 할 것이다.
10월 혁명을 성취했던 프롤레타리아트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로부터 10월 혁명은 국제적인 투쟁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배웠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전망이 주로 독일을 의미하는 더욱 선진화된 산업 열강들로의 혁명의 확대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기회들이 많이 있었으나 소비에트 러시아 외부의 혁명 정당들이 혁명을 수행하기에 너무도 유약했고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 1918-19년 독일 스파르타키스트 봉기와 1919년 헝가리 코뮨은 피비린내 나는 패배를 당했다. 1920년 필수드시키의 폴란드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전개함으로써 독일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려던 적군의 가능성은 좌절되었다. 최종적으로 1923년 독일 10월의 패배와 함께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는 장기간의 고립이라는 무기력한 전망에 굴복했고, 이것이 스탈린이 이끌던 관료층이 정치권력을 찬탈하도록 허용했다. 그래서 혁명은 배반당했다.
그러나 이 배반에 대한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레온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는 진정한 레닌주의 강령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하고 확대하기 위한 투쟁에서, 좌익반대파는 약화된 프롤레타리아트를 회생시키고 고립된 노동자 국가가 제국주의의 포위에 맞서 버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계획화된 산업화 정책을 주장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갓 태어난 관료집단의 대러시아 배외주의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했다. 그들은 첫째로 1925-27년 중국 혁명의 타도와 1926년 영국 총파업에 대한 배신으로 귀결되었던 영러 노동조합 연합이라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로부터 나오는 배신적인 정책들에 맞서 투쟁했다. 이 배신적 정책들은 독일 노동계급의 히틀러의 군화에 대한 굴복과, 1930년대 후반 스페인 혁명에 대한 철저한 진압으로 귀결되었다. 2차 세계대전 말미에 있었던 혁명적 기회들을 - 특히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그리스에서의 – 배신함으로써, 스탈린주의는 자본주의가 생존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래서 자기 자신의 궁극적인 죽음의 길을 준비했다.
세계 혁명을 위한 기관으로서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완전한 파산과 함께 트로츠키는 1938년 제4 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조직했다. 오늘날 국제공산주의동맹은 그 중핵들이 스탈린주의자들과 히틀러 도당의 테러에 의해 근절당했고, 1950년대 초에 독립적인 혁명적 지도부의 필요성을 부정하던 내부의 수정주의적 도전에 최종적으로 굴복했던 제4 인터내셔널의 재탄생을 위해 투쟁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진정한 세계 정당을 재건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서만 구 소련의 노동자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지도부를 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기괴한 공포들을 쓸어 없애는 것에 결합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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