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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시스트 영어판 61호[2009년 봄]로부터

당시와 현재, POUM의 배신을 옹호하는 자들에 반대하며,

스페인 내전에서의 트로츠키주의와 인민전선주의

1937년 바르셀로나의 5월의 나날들은 1930년 프리모 드 리베라 군사독재와 그 1년 후 왕조의 몰락에서 시작되어 1939년 장군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의한 공화국의 분쇄로 끝이 났던 스페인에서의 10년 동안의 혁명과 반혁명의 정점이었다. 대부분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의 지지를 받던 프랑코 반동의 뒤로 집결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주장하였듯이, 이 “그림자”가 노동자 조직들의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종속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탈선의 핵심이었다.

부르주아지 국가의 허약하고 파편화된 세력들이 무장한 채 봉기에 나선 프롤레타리아트와 1936년 7월 19일 노동자들이 프랑코의 군사반란을 격퇴하기 위하여 일어섰을 때 만들어졌던 민병대들, 공장위원회들, 그리고 농경 공동체들과 같은 권력의 맹아적 기관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려 하자, 프랑코 군대와 공화국 민병대 사이의 군사적 분쟁과 나란히, 공화국 진영 내부에서 계급투쟁이 일어났다. 카탈로니아의 산업 중심지의 주 도시이며 혁명적 스페인의 전위였던 바르셀로나가 이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카탈로니아의 인민전선 자치정부와 바르셀로나의 주로 아나코-생디칼리스트 노동자들 사이의 계속되던 충돌들은 1937년 5월 3일, 월요일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 3대의 트럭에 올라탄 스탈린주의 경찰국장이 이끌던 증오를 받던 강습부대가 텔레포니카(주요한 전화교환국)을 장악하고 통제하고 있던 전국노동연맹(CNT) 노동자들로부터 이 전략적 통신 허브를 장악하려고 시도하자, 도시 전체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바리케이드들을 세웠다. 부르주아지 무장 군대들은 순식간에 패주했고, 해군시설의 해군들은 봉기세력과 우호관계에 있었다. 로이스 오르「Lois Orr]의 현장보도는 이 장면을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화요일 아침, 무장한 노동자들이 바르셀로나의 가장 중요한 곳을 장악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대포로 항구와 도시를 통제하고 있던 몽츄이치「Montjuich] 요새를 점령했다. 티비다보[Tibidabo], 항구, 그리고 노동자들이 살고 있던 모든 도시 주변지역들이 그들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몇 안되는 고립된 바리케이드들을 제외하고는, 정부군대들은 완전히 수적으로 열세였고 부르주아지 거주지역인 도시의 중심에 집중해 있었는데, 이들은 1936년 7월 19일 봉기세력들이 그랬던 것 처럼 모든 방향으로부터 쉽게 포위될 수 있었다.”

- “5월 사태들: 배반당한 혁명” 1937년 7월 제4 인터내셔널 국제사무국이 발행한 정보통신

영웅적인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이 권력을 그들의 수중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주가 끝나면서, 노동자들은 무장해제 되었고, 그들의 바리케이드들은 해체되었다. 이것은 군사적 패배의 결과가 아니라 잘못된 노동자 지도자들이 유포한 사보타지와 혼란, 그리고 패배주의의 결과였다. 발렌시아(이전에는 마드리드)에 있던 중앙정부와 마찬가지로, 카탈로니아 자본가 정부의 중심에는 스탈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들은 카탈로니아에서 통합하여 통합사회당(PSUC)이 되었다], 이베리안 무정부주의자 연맹(FAI)의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 그리고 FAI가 이끌던 CNT 노동조합 연맹이 있었다. 스스로도 잠깐 동안 자본가 자치정부의 일부였던 중도주의 통합 맑스주의 노동자당(POUM)은 외부로부터 인민전선 정부를 위한 좌익적 얼굴을 제공해주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인민전선 정부에 들어갔으며, 사적소유의 불가침성을 선포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시끄러웠다. 그들은 “부르주아지 공화파 반혁명의 투쟁하는 전위”였다.(레온 트로츠키, “계급, 당, 그리고 지도부” 1940년 8월 20일, 스페인혁명[1931-1939] [패스파인더, 1973년 뉴욕]). 그러나 그들이 바리케이드들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이 임무는 CNT/FAI와 POUM의 지도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그들의 투사들이 바리케이드들에 있었다. CNT 지도부는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무기들을 내려 놓으라”고 요구했다(펠릭스 모로우(Felix Morrow)의 스페인에서의혁명과반혁명‘ [패스파인더 1974년 뉴욕]으로부터 인용). POUM 지도부는 CNT의 뒤를 따랐고, POUM의 신문 La Batalla(1937년 5월 6일)은 봉기세력들에게 “거리를 떠나”서 “일자리로 돌아가라”고 권고했다(같은).

트로츠키는 스페인 스탈린주의자이며 소비에트 GPU의 암살자인 라몬 메르카더「Ramon Mercader]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끝내지 못한 채 남겨졌던 글인 “계급, 당, 그리고 지도부”에서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올바른 길을 향해 그들의 길을 뚫으려고 노력했던 대중들이 혁명의 요구들에 조응하는 새로운 지도부를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만들어내는 것이 그들의 힘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봉기에 나섰던 노동자들이 CNT/FAI와 POUM 지도자들의 배신에 반대하여 분노하게 되면서, 오직 좌익 무정부주의자들인 두루티의 친구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인 볼셰비키-레닌주의자 스페인 지부(SBLE)만이 혁명을 앞으로 끌고가기 위하여 애썼다. 비록 조직적으로 정치적으로 CNT/FAI와 궁극적으로 분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루티의 친구들은 노동자들에게 사회혁명을 위해 투쟁할 것을 주장했다. 혁명적 맑스주의의 목소리는 자신들의 전단에서 아래와 같이 선언했던 소규모의 SBLE에 의해서만 제기되었다.

“혁명적 공세 만세

“타협 반대. 전국 공화국 경비대와 반동적 강습부대 해체. 지금이 결정적인 순간이다. 다음 순간에는 너무 늦을 것이다. 반동적 정권 퇴진 때까지 전쟁 수행과 관련된 곳을 제외한 모든 산업들에서의 총파업. 프롤레타리아트 권력만이 군사적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

- SBLE 전단, 1937년 5월 4일, 정보통신 1937년 7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승리는 노동자 농민의 스페인으로 귀결될 수 있었고, 2차 대전의 전야에 유럽을 혁명적 투쟁으로 불타오르게 할 수 있었다. 패배가 POUM에 대한 억압과 그 지도자들에 대한 살해와 투옥을 포함하여 강화된 억압의 길을 열었다. 이렇게 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해제 시키면서, 인민전선은 프랑코의 군대들과 피비린내 나는 우익 반동의 통치를 위한 문을 열어주었다.

인민전선: 문제 중의 문제

70년이 지난 지금, 당시 패배의 교훈들을 비판적으로 학습하는 것은 트로츠키주의 제4 인터내셔널의 재창립에 있어서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러한 평가의 중심적인 출발점은 이 글에서 많이 인용되는 영어판 스페인 혁명을 포함하는 트로츠키의 저작들이다. 보다 방대한 저작집으로는 프랑스어로 된 트로츠키 저작의 Pierre Broue판인 La revolution expagnole(1930-1940)(스페인 혁명)(1975년 Les Editions de Minuit, 파리)가 있다. 내전의 와중에 펠릭스 모로우가 썼던 읽어주는 듯한 필체의 글인 스페인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또한 굉장히 소중하다. 노동자들의 영웅적 실천과 그들의 지도자들의 배신행위들에 대한 생생한 서술인 모로우의 책은 맑스주의적 분석과 강령에 기초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5월의 나날들 몇 달 후에 트로츠키는 아래와 같이 투쟁을 요약했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 공화국 영토에서는 2개의 화해 불가능한 강령들이 서로 대결했다. 한편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사적 소유를 지켜내고, 프랑코로부터 가능한 많은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강령과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장악을 통하여 사적소유를 폐지하고자 했던 강령. 첫 번째 강령은 노동귀족이라는 매개와 최고의 소부르주아지 부위들, 그리고 특히 소비에트 관료집단을 통한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표현했다. 두 번째 강령은 완전하게 의식적이지는 않았지만 강력했던 혁명적 대중운동의 경향들을 맑스주의의 언어로 바꾸었다. 혁명을 위해서는 불행하게도, 한 줌의 볼셰비키들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인민전선이라는 반혁명적 장벽이 서 있었다.”

- “스페인의 교훈들: 마지막 경고” 1937년 12월 17일

노동자들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혁명적 정당이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1930년대 초반 스페인에서 트로츠키 좌익반대파의 최고 지도자였던 스페인공산당(PCE)의 과거 지도자들인 안드레스 닌[Andres Nin]과 장 안드라데[Juan Andrade]의 정치적 굴종에서 기인했다. 닌과 안드라데는 결국에는 1935년에 조아퀸 모린[Joaquin Maruin]의 우익중도주의 노동자농민연합[Workers and Peasants Bloc](BOC)과 통합하여 POUM을 만들고, 이것으로부터 부르주아지 인민전선이라는 둥지와 1936년 자본가 카탈로니아 정부로 나아가면서, 무원칙한 블럭들과 술책들을 추진하기 위하여 스페인 공산주의의 축적된 자산을 던져버렸다. 1930년대 스페인에서의 격렬한 투쟁의 과정에서, 닌과 안드라데는 반(半)혁명적인 것에서 비혁명적인 것으로 그리고 반(反)혁명적인 것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중도 이탈은 한줌밖에 되지 못하는 볼셰비키들이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그리고 경험과 뿌리 혹은 자원이라고는 거의 없는 가운데, 트로츠키에 의해 정리된 강령적 방침의 기초 위에서 새로운 혁명적인 전위의 중핵을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하도록 남겨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르주아지 정당들과 노동자 정당들의 연합인 인민전선은 스페인 혁명을 교살시킨 장치였다. 인민전선 내에서의 하찮은 좌익 공화주의 정치인들의 존재는 “‘민주주의 혁명’ 의 원칙, 즉 사적소유의 신성불가침성을 실현하면서”(같은 책) 다름이 아니라 부르주아지 지배의 유지에 대한 인민전선의 헌신을 위한 보증인으로서 복무했다. 이 계급 협조적 연합을 “작은, 일시적인 기술적 선거 협정”으로 간단히 치부해 버렸던 POUM 옹호자들을 통렬하게 비난하면서, 트로츠키는 “현재 문제들 중의 문제가 인민전선이다. 좌익 중도주의자들은 인민전선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들의 상품을 팔기 위하여, 이 문제를 전술적인 것, 혹은 심지어 기술적인 술책으로 설명하려고 애쓴다. 실제로는 인민전선은 이 시대의 주요한프롤레타리아트계급전략의문제이다. 이것은 또한 볼셰비키주의와 멘셰비키주의 사이의 차이를 위한 최고의 표준을 제공한다”(“POUM과 인민전선” 1936년 7월 16일)라고 강조했다.

여전히 그렇다. 스페인 내전에 관한 수없이 많은 책과 글들이 나왔다. 이것들의 목적은 압도적으로 패배의 길을 닦았던 인민전선이라는 배신적인 정책들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 적어도 CNT/FAI 지도자들의 배신들에 대한 솔직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 좌익 무정부주의자 베르논 리차드스[Vernon Richards]의 스페인혁명의교훈들(런던, 자유 출판사, 1953년)이 몇 안돼는 예외들 중의 하나이다. 다양한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역사가들은 트로츠키를 장문으로 인용하는 너무나도 박식한 설명들을 제공하지만 트로츠키가 자신의 총구를 겨누었던 POUM 중도주의자들에게는 면죄부를 제공한다. 이 중에서 프랑스 램버트[Lambert] 그룹의 지도적 성원이었으며, 프랑스어 트로츠키 저작들의 편집인이었고, 스페인 내전에 관한 몇 가지 저작들의 지은이였던 지금은 사망한 피어 브루에[Pierre Broue]와 다양한 색조의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개인들과 조직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영국 노동당을 추종하는 “비(非)당” 출판물인 혁명적역사가 으뜸이다. 혁명적역사는 고(故) 토니 클리프가 창립했던 개량주의 경향의 지지자였고, 오랫동안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지도자였던 앤디 더간[Andy Durgan]이 쓴 2개의 글을 출판했다(“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과 POUM의 기초”, 혁명적역사 4권 1-2호, 1991-2년 겨울, 그리고 “맑스주의, 전쟁, 그리고 혁명: 트로츠키와 POUM”, 혁명적역사 9권 2호, 2006년).

닌과 POUM에 대한 개량주의자들의 방어는 그 근저에서 스페인 혁명의 실패는 스페인에서 혁명은 불가능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하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냉소적 숭배로 귀착된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 어디에서라도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권력을 위한 투쟁에 대한 그들 자신의 사회민주주의적 반대의 반영일 뿐이다. 구 소련과 동유럽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서의 자본주의 반혁명 세력들을 칭송하면서, 이들 기회주의자들은 이제 러시아 혁명은 기껏해야 실패한 실험이라는 “공산주의의 사망”을 외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미래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가능성을 단념하고, 과거에 있었던 혁명적 기회들을 부정하기 위하여 역사를 다시 쓴다.

우리의 나침반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다. 스페인 혁명은 볼셰비키 유형의 혁명적 노동자당들을 건설할 필요성에 대한 부정적 측면에서의 반대의 교훈이다. 혁명적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 있는 이 결적적으로 중요한 장을 검토함에 있어서 우리의 목적은 세계적으로 새로운 10월들을 위한 투쟁을 지도할 레닌주의 전위의 미래 중핵들을 교육하고 무장시키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과 3동안의 볼셰비키주의

10월 혁명은 스페인의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는데, 이것은 특히나 그들이 짜르 러시아에서 자신들의 것과 비슷한 나라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도 또한 국가교회에 의해 지지를 받아왔던 쇠퇴기에 접어든 왕조가 중세적 반(反)계몽주의와 거대한 귀족적 군사 장교들의 진흙탕 속에 빠져 있었다. 그 곳에서도 또한 대규모 농민들이 과거의 봉건 귀족들 출신의 지주계급에 의해 잔혹하게 착취당해왔었다. 그곳에서도 또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젊고, 가공되지 않았으며 전투적이었고, 겨우 그들의 농민적 기원으로부터 한두 세대가 지났었다. 그리고 짜르주의 러시아처럼, 스페인은 자신의 국경 내에서 바스크와 카탈로니아 인민들에 대한 민족적 억압을, 식민지 모로코에 대한 식민지적 억압을 강요하고 있던 “인민들의 감옥”이었다.

레닌의 볼셰비키 지도부 하에서, 자신의 뒤로 농민 대중을 결집시키면서, 러시아의 다민족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자들의 계급독재를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위원회들(소비에트)들의 기초 위에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대체하면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볼셰비키가 이끌던 새로운 정부는 러시아를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제국주의 간 살육전으로부터 끄집어냈고,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러시아의 예를 따를 것과 세계 사회주의 혁명과 전 지구적으로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를 위한 투쟁에 합류할 것을 호소했다.

볼셰비키의 승리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에는 스페인 그 스스로가 한창 사회적 격변의 와중에 있었고, 이 소식은 노동자와 농민 대중들에게 전기충격과도 같은 충격을 주었다. 제랄드 미커(Gerald H. Meaker)는 자신의 이 시기에 대한 매력적인 설명인 스페인에서의혁명적좌익, 1914-1923(스탠포드,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대학교 출판사, 1974년)에서 “평등과 정의의 노동자 사회의 도래가 더 이상은 꿈이 아니라 가능한 일이라고 카탈로니아 대중들이 믿게 했던 이 시기 그들에 퍼져있던 모호하지만 강력했던 희망의 감정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혁명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러시아 열병”은 남부 농촌지역, 특히 안달루시아(Andalusia)를 휩쓸었는데 이곳에서는 3년의 농민봉기가 3동안의볼셰비키주의로 불렸고 일부 도시의 노동자들이 “볼셰비키 유형” 공화국들을 선포했다. 친 볼셰비키 모임들과 집회들이 어느 곳에서나 흔했었다. 1919년 발렌시아에서 일주일을 끌었던 파업 동안에, 거리들과 상가들은 “레닌”, “소비에트들”, “10월 혁명”으로 재명명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에는 혁명적 맑스주의 정당이 없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PSOE)이 맑스주의를 고수한다고 주장했지만, 부르주아지-민주주의적 단계의 실현 이후로까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미루었고 부르주아지 의회주의와 “민주적”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연합들을 위하여 노동계급의 혁명적 조직화를 거부하던 이 당은 러시아의 멘셰비키에 더 가까왔다. 스페인은 1차 대전에서 공식적으로는 중립이었지만, PSOE 지도부는 스페인 군주에 의해 지지를 받던 독일에 반대하여 “민주적” 제국주의자들인 영국과 프랑스(그리고 러시아라는 그들의 전제적 동맹)을 지지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PSOE가 지도하던 노동조합 총연맹[General Workers Union](UGT)이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의 CNT보다 더 오래되었고 규모도 훨씬 컸지만, 카탈로니아의 산업 중심지들에 있는 노동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층들은 맑스주의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에 의지했다.

스페인 무정부주의는 산업화에 위협을 느끼던 지방의 농민들과 도시 경제 속에 있던 소규모 장인들에 기원을 두었다. 제1 인터내셔널의 스페인 지부는 대부분이 바쿠닌과 맑스가 1870년대 초에 분리했을 때 무정부주의자인 바쿠닌과 함께 했다. 20세기 초가 되면서, 스페인 북쪽 지역들, 주로 아스투리아스[Asturias], 비즈카야[Vizcaya], 그리고 카탈로니아에서 대규모 노동계급이 성장했다. 그러나 특히 무정부주의의 중심지인 카탈로니아에서는 노동계급이 볼셰비키의 요새였던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던 비보르그[Vyborg] 지구와 같은 하나의 지붕 아래에 수천 명의 산업 노동자들을 집중시켰던 현대화된 공장들과 같은 것들이 아니라 경공업에 주로 기초하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무정부주의는 생디칼리즘 노동계급 운동의 발전을 통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에 순응했다.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들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고유한 사회권력을 인정했지만, 모든 정당들과 국가들 그리고 모든 중앙화된 권위의 형성에 대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적개심을 공유했다.

비록 1911년 창립 이후 3년 동안 불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CNT는 전쟁 기간과 전후 기간의 사회적 격변의 와중에서 급속하게 성장하여 1919년에는 70만 명 정도의 조직원 수를 호령했다. CNT가 성장하면서, 그 지도력은 바쿠닌의 소규모 자치 공동체사회를 옹호했고 종종 게릴라/테러주의 “유연조직들” 속에서 활동했던 부에나벤츄라 두루티[Buenaventura Durruti]와 같은 “순수” 무정부주의자들과 PSOE/UGT 지도자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발레로[Francisco Largo Caballero]와 훨씬 더 유사한 본질적으로 노동조합 개량주의자들인 안겔 페스타나[Angel Pestana]같은 “순수” 생디칼리스트들로 점점 더 분열되었다.

사회주의 운동과 무정부주의 생디칼리스트 운동들 모두에서 볼셰비키 혁명의 충격이 감지되었다. PSOE 다수파의 친 연합국(Aliadofilismo) 라인을 거부했던 평화주의/중립주의 인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고, 멘셰비키의 단계주의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정당들과의 정치적 연합들에 반대하는 주변으로 모였지만, 이 광범위한 좌익은 또한 개량주의 PSOE 다수파와의 분리에 반대했다. 장 안드라데가 지도하던 마드리드의 청년 사회주의자들이 1920년에 처음으로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분리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경험이 미숙한 세력들을 가지고 공산당의 창립을 선포했다. 그 다음해에, 아스투리아스와 비즈카야에 중심을 두고 있던 PSOE의 한 세력 또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연대로 분리했다. 코민테른에 의한 많은 촉구가 있은 후인 1922년에야 비로소 두 당 사이의 조직적 통합이 성취되었다.

CNT 투사들에 대한 러시아 10월의 효과는 더욱 분명했다. 급진적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에서의 처음의 열광의 일부는 러시아의 “맥시멀리스트” 즉 볼셰비키들이 실제로는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는 오해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커[Meaker]가 서술했던 것처럼: “볼셰비키 혁명에 홀린 나머지,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은 과거와는 달리 권위의 활용과 폭력에 대한 이론적 설명들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사상이 그들 사이에서 놀라운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했고, 혁명은 조직되어야만 하며, 자생적인 활동들에 남겨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레닌주의 입장을 그들은 점점 더 수용하게 되었다”(미커, 같은 책). 레닌의 국가와 혁명(1917년)은 부르주아지 국가는 분쇄되어 새로운 유형의 국가, 노동자 국가에 의해 대체되어야만 한다는 진정한 맑스주의적 관점을개량주의 사회민주당에 반대하여 재차 주장했다. 이 저작은 세계적으로 그리고 특히 스페인에 있던 무정부주의자들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비옥한 토양에서 어떠한 대중적 공산당도 등장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실패는 제국주의 사이의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스페인의 중립에서 기인했다. 전쟁 참가국들의 노동자 운동에서 목격되었던 것과 같은 날카로운 분극화가 PSOE에서도 CNT에서도 목격되지 않았다. 이들 국가들에서는 사회-배외주의적인 잘못된 지도자들이 “조국 방위”를 위한 애국주의적 호소들 안에서 뒹굴었고, 노동계급의 혁명적 단결에 대한 진실을 고수했던 국제주의자들과의 가차없는 분리를 조장하면서 자기 “자신들의” 제국주의 지배자들을 위한 신병모집 하사관으로서 활동했다. (당시에는 심지어 개량주의자들과 혁명적 국제주의 세력들 사이의 분리가 종종 독일의 칼 카우츠키 주변부의 것들처럼 처음에는 대규모 중도주의 조직들의 발전으로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절망적인 부르주아지 의회주의에 반발했던 많은 수의 무정부주의자들과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들을 끌어들였다 - 예를 들면, 프랑스의 빅토르 서지[Victor Serge]와 알프레드 로즈머[Alfred Rosmer], 그리고 미국 공산당 창립자이며 후에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던 제임스 캐넌을 포함하는 미국의 세계산업노동자(IWW) 출신의 일부 활동가들. 1921년에 창립된 적색 노동조합 인터내셔널 혹은 프로핀테른은 이러한 생디칼리스트 인자들에 개입하여 그들과 함께 활동하고 그들을 공산주의로 획득하고자 했다.

안드레스 닌과 조아퀸 모린(Joaquin Maurin)은 바르셀로나 CNT의 공산주의적-생디칼리스트 세력의 지도자들이었고, CNT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위해 투쟁했다. 두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3차 대회와 동시에 개최되었던 프로핀테른 창립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1921년 모스크바로 갔다. 모린은 스페인으로 돌아왔지만 1924년까지 PCE에 합류하지 않았다. 카탈로니아 중심의 그의 공산주의적-생디칼리스트들은 PCE로부터 사실상 완전한 독립성을 유지했다. 스페인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가 실패하자, 닌은 모스크바로 되돌아가 프로핀테른의 서기장이 되었다.

스페인에서의 혁명의 조수가 뒤로 밀려나게 되면서, CNT는 1922년에 프로핀테른과의 모든 관계들을 깨뜨리면서 공공연하게 반(反)공산주의자들이 되었다. 1923년 미구엘 프리모 드 리베라(Miguel Primo de Rivera)의 군사 쿠데타에 직면하여, PSOE/UGT와 카탈로니아 CNT 모두가 쿠데타에 대항하는 공동전선 투쟁에서 PCE와 함께하려 하지 않았다. 프리모 드 리베라는 “나는 공산주의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서 왔다”라고 선포하면서 PCE 지도자들을 체포했고 당 사무실들을 폐쇄했고, CNT와 PCE는 모두 지하로 내몰리게 되었다. 일부 PSOE 지도자들이 체포되었지만, 독재는 개량주의자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었고, UGT 수장 라르고 카발레로는 1924년에 독재의 국가위원회에 합류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상승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에 뒤이은 내전으로 인한 산업과 기반시설의 유린과 맞물린, 갓 태어난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의 고립은 부족한 자원들의 조정자로서의 관료층의 성장을 낳았다. 볼셰비키들은 혁명의 성공은 유럽의 보다 발전한 산업국가들로의 혁명의 확장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에서의 혁명적 기회들의 유실, 특히 1923년 독일 혁명의 유산과 그 결과로서 계속되던 소비에트 노동계급 내부에서의 사기저하의 물결이 관료집단의 권력장악을 점점 더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1923-24년을 시작으로 관료집단은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정치권력을 찬탈했다.

이것이 정치적 반혁명의 시작이었다. 비록 소련이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수립된 집산화된 소유양식에 여전히 기초하고 있었지만, 그때 이후로 소련을 지배했던 자들, 소련이 지배되던 방식과 소련이 지배되던 목적이 모두 바뀌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이 정치적 반혁명은 1924년 후반에 스탈린이 선포했던 사실상 사회주의 혁명을 국제적으로 확대할 필요성을 부정했던, 민족주의적이고 반(反)맑스주의적인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도그마에서 성문화되었다. 1926년에 소비에트 관료집단은 영국 노동조합 총회 지도자들이 총파업을 배신하자 영러 노동조합 통일위원회를 통해서 그들을 위한 좌익적 덮개를 제공해주었다. 1925-27년 중국 혁명에서 스탈린과 부하린은 “2단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공산당에게 부르주아지-민족주의 국민당으로 청산할 것을 지시했다. 세계 곳곳의 공산당들이 점점 더 소비에트의 외교를 위한 도구로 변형되었고, 자신들의 해당 부르주아지 계급들이 소련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되었다.

상승하는 관료집단에 맞선 트로츠키의 투쟁은 1923년 러시아 반대파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의 1928년 저작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 초안에 대한 비판”(레닌이후의3인터내셔널의 핵심부분)은 스탈린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도그마와 코민테른의 굴욕적인 갈지자 행보, 특히 중국 혁명에 대한 배신 사이의 연결고리를 분석했다. 1927년 소비에트 공산당으로부터 축출되었고 1929년에 강제적으로 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한 트로츠키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축출 당한 분파로서 코민테른을 혁명적 국제주의의 길로 되돌리기 위하여 투쟁하기 위하여 국제좌익반대파(ILO)로 그의 지지자들을 조직했다. 성장하던 스탈린주의 관료에 맞선 트로츠키의 투쟁으로 획득되었던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닌이 이들 지지자들 중에 하나였다.

스페인 좌익반대파의 기원

후진국 스페인의 전투적인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본주의 질서를 강제하기 위하여 권력에 올랐던 프리모 드 리베라 독재는 1929년 후반의 주식시장 붕괴로 촉발되었던 대공황이라는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위기의 충격으로 1930년 1월에 붕괴되고 있었다. 대중들의 갇혀 있던 열망들이 시위들의 폭발로 귀결되었다. 5월에, 적기와 공화국기를 든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마드리드에서 경찰과 무장전투를 벌였다. 12월에는 공화파 군장교들이 군주제에 반대하여 반란을 꾸몄다. 반란은 진압 당했고, 주도자들은 처형되었지만, 이것은 군주제의 사망의 조종을 의미했다. 1931년 지방자치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도시지역 투표를 휩쓸었고, 임금 알폰소13세는 도망치고, PSOE를 포함하는 연합정부가 이끄는 스페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30년 2월에, 프란시스코 가르시아 래비드(라크로익스-Lacroix)와 망명 중이던 다른 과거 PCE 당원들이 벨기에에서 스페인 공산주의자 반대파를 창립했다. 스페인에서는 장 안드라데와 몇몇 다른 과거 PCE 중핵들 또한 좌익반대파에 합류했다. 그해 후반에 소련에서 추방당한 이후 닌이 이들에 합류했다. 닌은 스페인 노동자운동에서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트로츠키는 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스페인 지부의 가장 커다란 불행은 명성을 가지고 있고 분명한 과거와 스탈린주의에 의한 순교자라는 후광을 가진 자가 지부의 꼭대기에 섰고 지부를 잘못되게 이끌었으며, 마비시켰다는 사실이다”(“POUM과 인민전선”, 1936년 7월 16일).

벨기에에 있던 망명그룹에 보낸 1930년 5월 25일자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이번에는 스페인의 위기가 프롤레타리아트 전위가 스스로를 준비할 시간을 제공하는 가운데 분명한 정규성을 가지고 벌어지고 있다”(“스페인 공산주의자의 임무들”)라고 썼다. 겨우 수백 명의 당원을 가진 공식적인 공산당은 권위를 가지는 지도부를 가지고 있지 못했고, 내부적 혼란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예전의 그들의 부르주아지 내각 참여주의에 대한 반대가 단지 군주제 하에서 자신들에게 기회가 부족했다는 것에 대한 표현이었을 뿐인 PSOE는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점점 더 인기가 없던 자본가 정권의 일부가 되었다. 무정부주의 생디칼리스트인 CNT/FAI는 모든 정치 활동에 대한 보이코트와 “민주적”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간접적인 지지 사이에서 동요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을 위한 투쟁이라는 사상 자체를 거부했다.

트로츠키는 먼 곳으로부터 글을 쓰면서, 닌과 그의 동지들이 예외적인 상황전개를 활용하도록 이끌면서 이들과 함께 활동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1931-33년 사이 트로츠키와 닌 사이에 왕래되었던 서신들의 발췌본이 1933년에 인터내셔널소식지에 출판되었고 스페인혁명에 재출판되었다. 불행하게도, 편지들 자체는 하버드에 있는 트로츠키 문서고에 없으며,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인쇄된 트로츠키의 편지 발췌본들은 강령적 명확성, 문제들에 대한 면밀한 탐구, 동지적 설득의 전형인 반면, 닌의 것들은 개인주의, 인상주의, 그리고 얼버무림으로 가득했다. “명확성, 이론적 적확성, 그리고 결론적으로 정치적 정직성은 혁명적 경향을 무적으로 만든다”(“진실을 말하기”, 1931년 4월 12일)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그러나 닌은 이론적 명확성과 적확성에 등을 돌렸다. 그는 “우리는 공산주의의 첫 번째 개념들을 가르쳐야 할 사람들과 함께는 반대파 선전을 수행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없다”(트로츠키에 보내는 편지, 1930년 11월 12일)라고 썼다. 대신에, 닌은 자신의 개인적인 명성과모린에 대한 영향력을 떠벌였다.

수십년 동안 변하지 않은 변호사용 요약문서를 읽으면서, 많은 수의 오늘날의 닌의 정치적 변호인들은 소위 “종파주의적” 태도, 스페인 정세에 대한 그의 무지라는 근거 없는 주장, 그리고 논박의 “가혹함”을 이유로 트로츠키를 호되게 꾸짖는다. 이것은 닌이 “실책들”을 저질렀음을 민주적 “반파시즘”의 압력 때문에 인정하면서도 그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했던 1930년대 일부 트로츠키의 예전의 동료들과 동맹자들의 후렴구였다(벨기에의 서지, 로즈머, 조지 베리켄과 네덜란드의 헨리쿠스 스니블리에트(Henricus Sneevliet)와 같은 자들). 트로츠키는 서지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썼다.

“당신은 안드레스 닌에 대한 우리의 태도, 당신이 발견했다는 ‘종파주의적’ 태도에 대하여 불만스러워 한다. 당신은 우리 관계의 정치적, 개인적 역사에 관하여 모르고 있으며, 알 수도 없다.

“당신은 닌이 외국으로부터 도착했을 때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가에 대하여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수년 동안 나는 닌과 정기적으로 편지를 교환했다. 내 편지들 중 일부는 닌이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고, 했어야 할 살아 생생한 혁명이라는 주제에 대한 ‘사실상의 다소 긴 논문들’이라는 것이 틀림없다. 내 생각에 닌에게 2-3년 동안 보낸 나의 편지들은 수백 페이지 두께의 책 한 권은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닌을, 그리고 그와의 동료적 관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당연하게 보여준다. 그의 대답들에서, 닌은 거듭해서 이론에서의 동의를 확인했지만, 항상 실천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토론하는 것은 회피했다....

“물론, 누구도 혁명가가 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닌은 스페인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수장이었고, 이 사실 하나에 의해서 그는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실천에서 그것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그 동안 죽 나를 속였다.”

- “닌과의 화해가 가능한가?” 1935년 6월 3일

당, 다시 한번 당, 또 다시 당

1931년 글 “스페인에서의 혁명”에서 트로츠키는 스페인 혁명가들을 권력을 향한 길로 인도할 수도 있었던 강령과 전략에 관하여 개괄했다. 트로츠키는 노동자와 농민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열망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지배를 위한 투쟁과 연결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요구들을 제기했다. 대규모 소유 토지의 빈농의 이익을 위한 몰수, 교회와 국가의 분리(성직자 반동의 요새의 무장해제와 교회의 광대한 부의 대중들에 대한 반환), 노동자 농민 민병대의 창설, 철도, 은행, 광산 자원에 대한 국유화, 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 카탈로니아와 바스크 인민들의 민족적 자기결정권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의 10월에서 입증되었고 1925-27년 중국 혁명의 패배를 통해서 부정적 방식으로 확증되었던 영구혁명의 이론과 강령을 적용하고 있었다. 이들 국가들에서의 뒤늦은 자본주의의 등장이라는 조건에서, 17세기와 18세기 국가들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들과 역사적으로 결합된 임무들은 농민 대중의 선두에 서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장악을 통해서만 오직 성취될 수 있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장악은 민주주의적 임무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임무들을 필수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일정에 올렸다.

트로츠키는 무정부주의 생디칼리스트적 편견들로부터 그들을 분리하기 위하여 CNT의 전투적 대오들로 향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통합된 노동조합 연맹에 대한 요구를 제기했다. 그는 “현재의 정치적, 민족적, 지방적, 그리고 노동조합 분열들을 초월하여” 자본가 계급에 대항하는 통일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의 기관들로서 활동하기 위한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workers juntas]의 형성을 위한 선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래와 같이 계속했다.

“프롤레타리아트 평의회는 모든 정당들과 모든 조직들이 광대한 대중의 눈앞에서 시험에 들고 자세하게 조사를 받게 될 광대한 장이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 일부 생디칼리스트들의 부르주아지와의 연합이라는 실천에 노동자 공동전선의 슬로건을 대치시킬 것이다. 오직 통일된 혁명적 전선만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마을과 도시의 피억압 대중들 사이에서 필요한 확신을 불어넣는 것을 가능하도록 할 것이다. 공동전선의 실현은 공산주의의 기치 아래에서만 오직 생각할 수 있다. 평의회는 지도적인 정당을 필요로 한다. 굳건한 지도부가 없다면 평의회는 공허한 조직 형식으로 남게 될 것이며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의존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 “스페인에서의 혁명” 1931년 1월 24일

무엇보다도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이들 임무들 모두의 성공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들이 필요하다. 당, 다시 한번 당, 또 다시 당!”(같은 책).

그러나 닌이 트로츠키와 가장 갈렸던 것이 당에 관한 문제였다. 닌은 처음에는 볼셰비키-레닌주의 전위를 위한 명확한 강령적 기초를 놓을 이론지 창간에 대한 트로츠키의 강력한 제안에 저항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당시 다양한 어설픈 지식인들, 장난 삼아 활동하는 사람들, 그리고 기타 우연히 스탈린주의에 맞서는 트로츠키의 투쟁에 이끌렸던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혁명가들을 걸러내기 위하여 필요했던 ILO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정치투쟁들을 진중하게 유념하라는 트로츠키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한 논쟁들은 규율 잡힌 정치적으로 균일한 인터내셔널 경향을 건설하고, 그것을 불구화하는 민족적 압력들과의 투쟁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반대파 지도자들은 이 논쟁에 정치적으로 개입하거나 이 논쟁들을 자신들의 지부로 가져오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보다는 “개인적 관계들, 호의와 반감에 의해서 자신들이 이끌리도록 했다”(트로츠키, “좌익반대파의 상태”, 1932년 12월 16일).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좌익반대파가 공식적인 공산당의 기치를 따르는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대한 ILO의 방침을 수행할 것을 닌에게 촉구했다(“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들”). 스탈린과 그 도당들의 관료적 잔악무도함들, 거짓말들 그리고 배신들에도 불구하고, 공산당들은 러시아 혁명에 이끌려 자기 나라들에서 노동자 혁명을 위하여 투쟁하기를 원했던 국제 노동계급 내부의 인자들을 계속해서 끌어들였다. 더욱이, 투쟁이나 결정적인 시험도 없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기치를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넘겨준다면 그것은 범죄일 것이었다.

닌은 다음과 같이 스페인 예외주의를 이유로 ILO의 국제적 관점을 분명하게 거부했다. “스페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식적인 정당의 외부에서, 그러한 정당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당의 외부에서 자신의 당을 조직할 것이다”(트로츠키에 보내는 편지, 1930년 12월 3일). 트로츠키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공식적인 당이 비록 유약하고 하찮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은 그 자신 안에, 그리고 소련에 있는 모든 외부의 역사적 가능성들과 소련과 연관되어 있는 모든 것을 보유하고 있다. 그것이 내게는 동지가 오로지 직접적인 세력들의 관계에만 경험적으로 기초하는 것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이다”고 대답했다(닌에 보내는 편지, 1931년 1월 31일). 닌은 그러한 주장들에 귀를 닫았고, 1932년 3월에 보란듯이 스페인 조직의 이름을 좌익반대파에서 좌익공산주의자(ICE)로 바꿔 버렸다.

좌익반대파의 투쟁을 거부하면서, 대신에 닌은 조아퀸 모린이 이끌던 과거 카탈로니아 연맹에 기대를 걸었다. 1930년 6월에 PCE로부터 축출되었던 카탈로니아 연맹은 트로츠키가 그 정치를 “소부르주아지의 편견들, 무지, 지방적 ‘과학’과 정치적 부정직함의 짬뽕”(“스페인 공산주의와 카탈로니아 연맹”, 1931년 7월 8일)이라고 성격규정했던 우회전하고 있던 중도주의 조직이었다. 1931년 3월에 카탈로니아 연맹은 카탈로니아 공산당(PCE의 한 부분이 아니었던 소부르주아지 조직)과 통합해서 “대중”조직인 노동자농민연합을 창립했다. 트로츠키는 모린의 BOC의 강령을 “스페인 토양에 이식된 순수한 ‘국민당주의’”(즉, 장개석의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국민당)으로, 그리고 “노동자 농민 정당의 새로운 판”으로 성격 규정했다(“카탈로니아 연맹의 정강”, 1931년 6월 12일). 이 두 계급 공식은 국민당과 미국의 “농민-노동당”과 같은 기타 부르주아지 인민주의적 조직들로의 청산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었다.

국제적으로, 모린은 소위 “제3기” 정책들에 반대하던, 과거 스탈린의 동맹이었던 니콜라이 부하린(그 자신은 잽싸게 스탈린에 투항했다)의 관점 주변에서 연합해 있던 우익반대파와 제휴했다. 이들 정책들은 1929년에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임박했다는 소위 새로운 시대로서 스탈린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세계적으로 공산당들은 고립된 “적색”노동조합을 건설하기 위하여 개량주의자들이 이끌던 노동조합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사회 파시스트”라고 이름을 붙였던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어떠한 공동실천도 반대하면서 모험주의적이고 종파적인 방침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국제우익반대파는 점증하는 계급협조의 관점으로부터 이러한 종파주의적 방침에 반대했다. 이들의 최고 대변인은 1923년에 독일혁명의 패배를 이끌었던 하인리히 브랜들러였다. 동시에, 브랜들러 추종자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의 1925-27년 중국에서의 재앙적인 정책들과 “일국에서 사회주의”라는 민족주의적 도그마를 방어했다.

트로츠키는 우익반대파와 기치를 섞는 어떠한 것에도 반대하여 반복해서 투쟁했다. 소련에서는, 트로츠키는 부유한 농민들(쿨락들)과 소규모 사업자들의 층인 내부의 자본주의 반혁명 세력과 타협하고 그들을 고무하는 정책을 가졌던 관료집단의 부하린 세력과의 블럭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했었다 . 국제적으로는, 우익반대파와의 통합은 공산주의 전위를 위한 투쟁의 청산을 의미했다. 이러한 이해의 올바름은 모린을 추종하는 것에서 닌과 안드라데가 취했던 노선에 의해 전적으로 드러났다.

프랑스 전환과 무원칙했던 조합들

1933년 초 히틀러의 나찌의 집권과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력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조직들의 지도자들의 범죄적인 수동성이 세계적으로 노동계급 전반에 충격파를 주었다. 독일에서의 재앙이 제3 인터내셔널 내부에서의 반발의 징조 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하자, 트로츠키는 스탈린화된 코민테른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기구로서의 생명을 다했음을 선포하고, 레닌주의의 기치를 앞으로 밀고 나갈 새로운 공산당들의 창건을 호소했다. 트로츠키가 작성했던 새로운 제4 인터내셔널의 형성을 호소했던 “4자 선언”(1933년 8월)에 ILO의 대표자들, 네덜란드의 스니블리에트 그룹, 네덜란드의 제2의 그룹, 그리고 독일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분리했던 좌익인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SAP)이 서명했다. 1934년에 ILO는 스스로를 국제공산주의동맹(ICL)으로 재구성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곧 제3기 종파주의적 모험주의를 포기했다. 나찌의 승리에 공황상태에 빠진 스탈린은 영국, 프랑스와 미국 등 “민주주의” 제국주의자들과 동맹을 추구했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민전선”이 새로운 풍조가 되었는데, “인민전선”은 이후 1935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7차 대회에서 성문화되었고,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그 외의 지역에서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들과의 인민전선 연합들에서 현실화되었다. 스탈린이 코민테른은 부르주아지 질서에 대한 도전을 더 이상은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국주의자들에게 증명하고자 애썼던 것처럼, 스탈린이 스페인 노동자 혁명을 목졸라 죽인 것도 그의 희망었던 영국과 프랑스와의 동맹에 기여했다.

독일에서의 나찌의 승리는 대공황의 시작 3년 후 다른 곳에서의 계급투쟁의 부활과 동시에 벌어졌다. 노동자들과 청년 층 일부의 급진화가 사회민주당들의 내부에서의 힘차고 전투적인 좌익 세력들의 성장과 미국에서는 산업조직총회(CIO)의 상승에서 나타났다. 1934년 수 년 만에 처음으로 사회주의 당의 투사들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와 스페인 아스투리아스의 광산지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들의 선두에 섰다. 트로츠키는 혁명적 열정을 가진 청년과 노동자들에 개입하여 그들을 획득하기 위하여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로의 일시적 입당들을 수행할 것을 그의 지지자들에게 강력하게 권고했다. 1934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실행되었던 이 전술이 “프랑스 전환”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사회당으로부터 꽤 많은 수의 청년과 노동조합 투사 층을 획득했던 1936-37년 미국을 포함하여 다른 몇 개 나라들에서 곧 추진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아마도 분명히 정세가 이 전술의 성공적인 수행에 가장 열려 있었다. 당시 20만 명 정도의 조직원을 보유하고 있던 사회주의 청년(JS)의 마드리드 신문 Renovacion은 “볼셰비키화를 이루기 위하여 사회주의 청년과 사회당에 대한 입당으로 초대받은 스페인 최고의 혁명가들이며, 최고의 이론가들로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다(1972년 7-8월 노동자전위 10호에서 번역된 Pierre Broue의 “트로츠키와 스페인 혁명”에서 인용). 심지어 뿌리깊은 개량주의자인 라르고 카발레로 조차 사회주의 혁명과 제4 인터내셔널을 요구했다.

닌과 안드라데는 범죄적으로 트로츠키의 부탁과 사회주의 청년의 호소들을 일축했고, 자신들의 조직이 PSOE/JS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비록 성과는 거의 없었지만, 트로츠키주의 SBLE의 미래 지도자인 마누엘 페르난데즈(Grandizo Munis로 알려진)를 포함하는 소수의 ICE 조직원들은 닌/안드레스의 방침을 거부하고 PSOE에 들어갔다. 이후에 무니스(Munis)는 “그러나 작은 조직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들이 규모가 큰 공산주의 좌익의 분견대에게는 상대적으로 쉬울 수도 있었다. CL(공산주의 좌익)의 사회당 입당이 스페인 혁명의 경로를 완전히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무니스, Jalones de Derrota: Promesa de Victoria[Espana 1930-39], [패배의 중대한 시점들: 승리의 약속(스페인 1930-39)] [멕시코 시티: 사설 “Lucha Obrera,” 1948])라고 썼다. 1936년 4월에, JS는 PCE에 처음으로 대중적 기반을 제공하면서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장악당했던 한편, 카탈로니아에서는 PCE가 PSOE와 통합하여 카탈로니아 통합사회당을 만들었다.

닌과 안데라데가 혁명적 맑스주의 세력들의 강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움켜쥘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유일한 자들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장 비싼 값을 치르도록 했던 것은 그들의 잘못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유능한 대중적 활동가지만 얼간이 종파주의자였던 휴고 오엘러 주변의 작은 소수파가 극좌 종파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사회당 입당을 반대했고, 곧 제임스 캐넌이 이끌던 트로츠키주의 다수파로부터 분리했다. 국제적으로, 오엘러는 기회주의적 화해주의의 관점으로부터 자신들의 국가들에서 프랑스 전환을 반대했던 닌 등과의 무원칙한 블럭에 가입했다.

아스투리아스 봉기

1차 공화국 정부에서 자신들의 지도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범죄적인 역할에 대한 분노가 스페인 사회당 대오의 급진화에 있어서의 특별한 요소였다. 1차 공화국 정부의 노동계급과 농민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들이 광범위한 증오와 극도의 혐오감을 유발했다. 1933년 1월의 카사스 비에자스(Casas Viejas)에서 있었던 무정부주의자들에 영감을 받았던 농민 반란에 대한 잔혹한 진압이 임계점이었고, 새로운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CNT는 자신의 조직원들에게 기권할 것을 촉구했고,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공화-사회주의 정부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투표하지 않았다. 성직자와 군주제주의 반동 당들이 선거를 휩쓸었다.

성직자-파시스트 CEDA(스페인 자치적 우익 조직 총연맹)의 조직원들이 1934년 10월 내각에 합류하도록 초청 받자, 스페인 전역에서 총파업이 분출했다. 강력한 PSOE가 지도하던 광산노동자 노동조합에 중심을 두고 있던 아스투리아스의 노동자들은 봉기로 일어섰다. 경찰 막사들이 공격을 당했고, 노동자들에게 (장악한 군수공장에서 획득한) 기관총과 소총들이 분배되었으며, 수도 오비에도와 다른 지역들이 봉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모두가 독일 노동자들의 쓰라린 경험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그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를 결의했다.”고 BOC 조직원이면서 반란의 선두에 서 있던 아스투리아스 노동자 연맹의 중심적 지도자였던 마누엘 그로시(Manuel Grossi)는 자신의 1935년 서술인 “아스투리아스봉기: 사회주의혁명의 15”(런던, 사회주의 정강, 2000년)에서 썼다.

이곳은 노동자 준타(노동계급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폭넓은, 권위를 가지는 위원회)의 건설에 대한 트로츠키의 끈질긴 호소들을 실현하기에는 척박한 토양이었다. 트로츠키가 1931년에 썼듯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기본적인 중핵을 포함하는 준타를 통해서만 오직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그리고 그래서 역시 혁명에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확실히 할 수 있다. 오직 노동계급 사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정도에서만, 준타는 권력을 위한 투쟁의 기관으로 변형될 것이다”(“스페인 혁명과 혁명을 위협하는 위험들”, 1931년 5월 28일). 하지만, 닌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은 BOC에 의해 시작되었던 “노동자 연맹”에 서명을 했다. 이 조직들은 선출되지도 않았으며 봉기에 나섰던 노동자들의 참여를 수반하지도 않았다. ICE와 BOC에 추가적으로 PSOE/UGT, PCE, 그리고 지역 CNT를 포함했던, 아스투리아스 노동자연맹을 설립했던 1934년 3월 28일 협약은 “이 조약의 조인 날짜로부터 시작하여, 서로 다른 동맹의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내거나 악화시키는 모든 선전 캠페인들은 중지될 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쓰고 있었다(아스투리아스봉기에서 인용). 노동자연맹은 경쟁하고 있는 정당들과 강령들이 시험을 받을 수 있는 공개토론의 장을 제공하고,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을 위한 전망의 주변으로 혁명적 전위가 건설될 수 있도록 하는 도가니로서 기능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다양한 조직들의 지도부들 사이에 이루어진 최소의 공통분모적 합의에 기초한 정치적 비적대협약이었다.

아스투리아스 반란은 임박한 혁명과 그 혁명에 대한 배신과 혁명의 패배의 전조였다. 장군 프랑코가 아스투리아스 봉기대를 분쇄하기 위해 호출되었다. 처음으로, 외국인 용병부대들과스페인 식민지 모로코로부터 무어인 군대가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기 위하여 배치되었다. 프랑코는 나중에 스페인 혁명을 분쇄하기 위하여 이 군대들을 활용했다. 5천명의 노동자가 죽고 3만 명이 투옥되었던 고립된 아스투리아스 코뮌에 대한 진압은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노동자 조직들 사이의 단결에 대하여 새로와진 감정을 가지는데 연료가 되었다. 이러한 열망들은 개량주의자와 중도주의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계급 협조적 연합에 대한 지지의 방향으로 이끌리게 되었다.

프랑스 전환과 무원칙했던 조합들

1933년 초 히틀러의 나찌의 집권과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력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조직들의 지도자들의 범죄적인 수동성이 세계적으로 노동계급 전반에 충격파를 주었다. 독일에서의 재앙이 제3 인터내셔널 내부에서의 반발의 징조 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하자, 트로츠키는 스탈린화된 코민테른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기구로서의 생명을 다했음을 선포하고, 레닌주의의 기치를 앞으로 밀고 나갈 새로운 공산당들의 창건을 호소했다. 트로츠키가 작성했던 새로운 제4 인터내셔널의 형성을 호소했던 “4자 선언”(1933년 8월)에 ILO의 대표자들, 네덜란드의 스니블리에트 그룹, 네덜란드의 제2의 그룹, 그리고 독일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분리했던 좌익인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SAP)이 서명했다. 1934년에 ILO는 스스로를 국제공산주의동맹(ICL)으로 재구성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곧 제3기 종파주의적 모험주의를 포기했다. 나찌의 승리에 공황상태에 빠진 스탈린은 영국, 프랑스와 미국 등 “민주주의” 제국주의자들과 동맹을 추구했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민전선”이 새로운 풍조가 되었는데, “인민전선”은 이후 1935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7차 대회에서 성문화되었고,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그 외의 지역에서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들과의 인민전선 연합들에서 현실화되었다. 스탈린이 코민테른은 부르주아지 질서에 대한 도전을 더 이상은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국주의자들에게 증명하고자 애썼던 것처럼, 스탈린이 스페인 노동자 혁명을 목졸라 죽인 것도 그의 희망었던 영국과 프랑스와의 동맹에 기여했다.

독일에서의 나찌의 승리는 대공황의 시작 3년 후 다른 곳에서의 계급투쟁의 부활과 동시에 벌어졌다. 노동자들과 청년 층 일부의 급진화가 사회민주당들의 내부에서의 힘차고 전투적인 좌익 세력들의 성장과 미국에서는 산업조직총회(CIO)의 상승에서 나타났다. 1934년 수 년 만에 처음으로 사회주의 당의 투사들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와 스페인 아스투리아스의 광산지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들의 선두에 섰다. 트로츠키는 혁명적 열정을 가진 청년과 노동자들에 개입하여 그들을 획득하기 위하여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로의 일시적 입당들을 수행할 것을 그의 지지자들에게 강력하게 권고했다. 1934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실행되었던 이 전술이 “프랑스 전환”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사회당으로부터 꽤 많은 수의 청년과 노동조합 투사 층을 획득했던 1936-37년 미국을 포함하여 다른 몇 개 나라들에서 곧 추진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아마도 분명히 정세가 이 전술의 성공적인 수행에 가장 열려 있었다. 당시 20만 명 정도의 조직원을 보유하고 있던 사회주의 청년(JS)의 마드리드 신문 Renovacion은 “볼셰비키화를 이루기 위하여 사회주의 청년과 사회당에 대한 입당으로 초대받은 스페인 최고의 혁명가들이며, 최고의 이론가들로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다(1972년 7-8월 노동자전위 10호에서 번역된 Pierre Broue의 “트로츠키와 스페인 혁명”에서 인용). 심지어 뿌리깊은 개량주의자인 라르고 카발레로 조차 사회주의 혁명과 제4 인터내셔널을 요구했다.

닌과 안드라데는 범죄적으로 트로츠키의 부탁과 사회주의 청년의 호소들을 일축했고, 자신들의 조직이 PSOE/JS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비록 성과는 거의 없었지만, 트로츠키주의 SBLE의 미래 지도자인 마누엘 페르난데즈(Grandizo Munis로 알려진)를 포함하는 소수의 ICE 조직원들은 닌/안드레스의 방침을 거부하고 PSOE에 들어갔다. 이후에 무니스(Munis)는 “그러나 작은 조직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들이 규모가 큰 공산주의 좌익의 분견대에게는 상대적으로 쉬울 수도 있었다. CL(공산주의 좌익)의 사회당 입당이 스페인 혁명의 경로를 완전히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무니스, Jalones de Derrota: Promesa de Victoria[Espana 1930-39], [패배의 중대한 시점들: 승리의 약속(스페인 1930-39)] [멕시코 시티: 사설 “Lucha Obrera,” 1948])라고 썼다. 1936년 4월에, JS는 PCE에 처음으로 대중적 기반을 제공하면서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장악당했던 한편, 카탈로니아에서는 PCE가 PSOE와 통합하여 카탈로니아 통합사회당을 만들었다.

닌과 안데라데가 혁명적 맑스주의 세력들의 강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움켜쥘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유일한 자들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장 비싼 값을 치르도록 했던 것은 그들의 잘못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유능한 대중적 활동가지만 얼간이 종파주의자였던 휴고 오엘러 주변의 작은 소수파가 극좌 종파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사회당 입당을 반대했고, 곧 제임스 캐넌이 이끌던 트로츠키주의 다수파로부터 분리했다. 국제적으로, 오엘러는 기회주의적 화해주의의 관점으로부터 자신들의 국가들에서 프랑스 전환을 반대했던 닌 등과의 무원칙한 블럭에 가입했다.

아스투리아스 봉기

1차 공화국 정부에서 자신들의 지도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범죄적인 역할에 대한 분노가 스페인 사회당 대오의 급진화에 있어서의 특별한 요소였다. 1차 공화국 정부의 노동계급과 농민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들이 광범위한 증오와 극도의 혐오감을 유발했다. 1933년 1월의 카사스 비에자스(Casas Viejas)에서 있었던 무정부주의자들에 영감을 받았던 농민 반란에 대한 잔혹한 진압이 임계점이었고, 새로운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CNT는 자신의 조직원들에게 기권할 것을 촉구했고,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공화-사회주의 정부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투표하지 않았다. 성직자와 군주제주의 반동 당들이 선거를 휩쓸었다.

성직자-파시스트 CEDA(스페인 자치적 우익 조직 총연맹)의 조직원들이 1934년 10월 내각에 합류하도록 초청 받자, 스페인 전역에서 총파업이 분출했다. 강력한 PSOE가 지도하던 광산노동자 노동조합에 중심을 두고 있던 아스투리아스의 노동자들은 봉기로 일어섰다. 경찰 막사들이 공격을 당했고, 노동자들에게 (장악한 군수공장에서 획득한) 기관총과 소총들이 분배되었으며, 수도 오비에도와 다른 지역들이 봉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모두가 독일 노동자들의 쓰라린 경험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그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를 결의했다.”고 BOC 조직원이면서 반란의 선두에 서 있던 아스투리아스 노동자 연맹의 중심적 지도자였던 마누엘 그로시(Manuel Grossi)는 자신의 1935년 서술인 “아스투리아스봉기: 사회주의혁명의 15”(런던, 사회주의 정강, 2000년)에서 썼다.

이곳은 노동자 준타(노동계급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폭넓은, 권위를 가지는 위원회)의 건설에 대한 트로츠키의 끈질긴 호소들을 실현하기에는 척박한 토양이었다. 트로츠키가 1931년에 썼듯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기본적인 중핵을 포함하는 준타를 통해서만 오직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그리고 그래서 역시 혁명에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확실히 할 수 있다. 오직 노동계급 사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정도에서만, 준타는 권력을 위한 투쟁의 기관으로 변형될 것이다”(“스페인 혁명과 혁명을 위협하는 위험들”, 1931년 5월 28일). 하지만, 닌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은 BOC에 의해 시작되었던 “노동자 연맹”에 서명을 했다. 이 조직들은 선출되지도 않았으며 봉기에 나섰던 노동자들의 참여를 수반하지도 않았다. ICE와 BOC에 추가적으로 PSOE/UGT, PCE, 그리고 지역 CNT를 포함했던, 아스투리아스 노동자연맹을 설립했던 1934년 3월 28일 협약은 “이 조약의 조인 날짜로부터 시작하여, 서로 다른 동맹의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내거나 악화시키는 모든 선전 캠페인들은 중지될 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쓰고 있었다(아스투리아스봉기에서 인용). 노동자연맹은 경쟁하고 있는 정당들과 강령들이 시험을 받을 수 있는 공개토론의 장을 제공하고,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을 위한 전망의 주변으로 혁명적 전위가 건설될 수 있도록 하는 도가니로서 기능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다양한 조직들의 지도부들 사이에 이루어진 최소의 공통분모적 합의에 기초한 정치적 비적대협약이었다.

아스투리아스 반란은 임박한 혁명과 그 혁명에 대한 배신과 혁명의 패배의 전조였다. 장군 프랑코가 아스투리아스 봉기대를 분쇄하기 위해 호출되었다. 처음으로, 외국인 용병부대들과스페인 식민지 모로코로부터 무어인 군대가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기 위하여 배치되었다. 프랑코는 나중에 스페인 혁명을 분쇄하기 위하여 이 군대들을 활용했다. 5천명의 노동자가 죽고 3만 명이 투옥되었던 고립된 아스투리아스 코뮌에 대한 진압은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노동자 조직들 사이의 단결에 대하여 새로와진 감정을 가지는데 연료가 되었다. 이러한 열망들은 개량주의자와 중도주의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계급 협조적 연합에 대한 지지의 방향으로 이끌리게 되었다.

POUM의 창립

1934년 9월 전국 총회에서 닌/안드라데의 ICE는 프랑스 전환을 수행하는 것은 “우리를 무정형의 집단으로 침몰하게”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엄숙하게 결의했다(더간의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과 POUM의 기초”로부터 인용). 1년 후인 1935년에, ICE는 모린의 BOC와 통합하여 POUM을 창설하고 런던 사무국에 합류하면서 진정으로 무정형의 집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주로 영국의 독립노동당(ILP)과 독일의 SAP와 같은 다양한 중도주의 조직들의 무원칙한 연맹이었던 런던 사무국은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에서 동요했다. 이 “인터내셔널”을 단결시키는 유일한 힘은 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 제4 인터내셔널의 창립에 대한 반대, 즉 자신들 각자의 국가별 기회주의적 기호들에 기반한 민주주의적 중앙집중주의의 압박과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의 원칙에 대한 반대였다.

POUM은 형식에서는 종파적이었으며, 본질적으로는 기회주의적이었다. POUM은 스스로를 조직적으로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통적인 대중조직들에 대치시켰다. 그러나 PSOE, PCE, 그리고 CNT의 잘못된 지도자들과의 정치적인 분쟁을 바라지 않던 태도가 이러한 행위의 배경에 있었다. 내전 동안에, POUM은 스페인 노동계급 대중의 신임을 주장했던 조직들의 민병대들로부터 분리하여 자기 자신의 민병대를 조직했다. 1936년 1월에 공화파들, PSOE, 그리고 PCE 사이의 계급협조적 블럭이었던 “좌파 선거 협정”에 사인하는 것을 시작으로 POUM은 내내 인민전선을 신봉했다.

트로츠키는 닌/안드라데의 냉소적인 위선과 총체적인 기회주의를 아래와 같이 폭로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이름이 지시하는 것처럼, 스페인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적절한 모든 경우에서 타락하지 않는 혁명가들인 척 했다는 것을 상기하고자 함이다. 특별히, 그들은 프랑스의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이 사회당에 입당한 것을 두고 엄청나게 비난을 했다. 절대로 안 된다! 어떠한 조건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기치를 위하여 개량주의 지도자들에 대항하여 대중적인 정치조직 대오 안에서 비타협적인 투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그 조직에 들어가는 것은 기회주의이다. 그러나 대중을 속이고 부르주아지 계급을 덮어가려주는데 복무하는 의도적으로 정직하지 않은 강령에 기초하여 개량주의 정당의 지도자들과의 정치적 연합을 결정하는 것은 용기이다! 이보다 더 맑스주의를 타락시키고 팔아먹는 행위가 있을 수 있는가?”

- “POUM의 배신” 1936년 1월 23일

여기서 다시, 훗날의 닌 옹호자들이 그의 방어에 나선다. 더간과 성인화한 전기문, “역사 속에서의 POUM, 안드레스 닌, 그리고 스페인 혁명”에서 과거 POUM 청년 지도자 윌레발도 솔라노(Wilebaldo Solano)는 트로츠키와 ICL의 국제서기국(International Secretariat/IS)이 닌의 모린과의 통합에 찬성했다고 주장한다. 더간에 따르면, “POUM의 창립에 대한 IS와 트로츠키 모두의 최초의 반응이 신중한 긍정론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트로츠키와 POUM”).

트로츠키가 그들의 중도주의 정치에 대하여 비타협적으로 적대적이었음을 분명히 하는, BOC와 POUM에 관한 트로츠키의 저작들의 모든 기록에 따르면 이것은 거짓이다. 트로츠키는 POUM에 대하여 거의 낙관적이지 않았다. 통합에 앞서 IS와 닌 지도부 사이에 격렬한 서신 교환의 과정이 있었다. 1935년 7월에 보낸 편지에서, IS는 ICE가 심지어 분파적 권리조차 없는 가운데 “노동자 농민 블럭에 의해 흡수당하고 있”으며, “그러한 환경에서는 새로운 당으로부터 어떠한 좋은 것도 생기지 못한다 .... 무엇이 새로운 당의 기치가 될 것인가? 런던-암스테르담 사무국의 잘 알려진 배너일 것이다”라고 주장했다.(우리가 번역한 트로츠키의 “La revolution espagnole”에서 재출판)

닌은 모린이 “우리의 모든 근본적인 원칙들”을 받아들였다고 맹세하고, IS가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부족했음”을 호통을 치면서, 즉각적으로 IS의 주장들을 거부했고, ICL과의 더 이상의 토론을 중단했다(“전국위원회로부터 국제서기국에 보내는 편지”, 1935년 7월 21일, 같은 책(우리의 번역)에서 재출판).

더간은 닌의 BOC와의 통합이 미국 노동자당(Workers Party of the United State)을 창립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던 캐넌의 미국 공산주의 동맹(Communist League of America)의 머스트(A.J. Muste)의 좌선회하고 있던 중도주의 미국 노동자당(American Workers Party)과의 통합에 필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런던 사무국에 속해있던 POUM과는 달리, 노동자 당은 분명하게 제4 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선언했다. 1935년 7월 IS의 편지가 지적하고 있는 것 처럼: “만약 동지가 창립하고자 하는 새로운 당이 제4 인터내셔널과 관련하여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면(미국과 네덜란드에서처럼), 이것은 새로운 견인력으로서 국가적수준에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한 조건하에서, 통합은 생각해 볼만하다. 그러나 만약 새로운 당이 ‘사회주의-공산주의 통합’의 기구로서 스스로를 표현한다면, ... 그렇다면 그러한 당과의 통합은 우리 경향의 청산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더간은 이것이 마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제인 것처럼 POUM의 제4 인터내셔널에 대한 적대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실제로는, 이것은 혁명적 맑스주의를 모든 종류의 중도주의적 혼란과 구별짓는 경계를 분명하게 하는 문제였다.

닌의 잘못된 확신을 되풀이하면서, 더간은 모린 그룹이 트로츠키주의로 이동해 온 것으로 묘사하고, 트로츠키가 “BOC의 정치에서의 이러한 진화에 대하여 눈치채고 있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고 그를 혹평했다(“트로츠키와 POUM”). 그가 나중에 아래와 같이 분명하게 밝혔듯이, 모린 또한 이 진화를 “눈치채고 있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BOC의 이론과 실천에 의하면, BOC는 러시아혁명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가질 수 있었던 좌익 사회당 쪽에 가까왔다. BOC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맑스와 엥겔스, 레닌, 그리고 부하린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트로츠키에 의해서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스틸린으로부터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 조지스 가르니어(Georges Garnier)의 아스투리아스 봉기의 “프랑스판 서문”에서 인용

정말이지, 더간이 POUM 창립에 대한 트로츠키의 “신중한 낙관론”의 유일한 “증거”로 들추어내는 것은 트로츠키의 글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나온 것이 아니라, IS 대표로 스페인에 파견되었던 진 로스(Jean Rous)의 통합에 대한 1935년 10월의 보고로부터 나온 것이다. 로스는 “새로운 당이 선포되었다. 우리는 주목하고 있다. 국제적인 요소들에 기초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이 당이 권력과 권위를 획득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데,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맑스주의의 길에서는 이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다(Le revolution espagnole [우리의 번역]에서 재출판)”라는 트로츠키의 발언을 인용한다. 이 모든 “증거들”이라는 것이 트로츠키가 만약 새로운 당이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맑스주의의 길을 따르는 경우에, 계속적인 협조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모든 기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더간은 전술적 유연함과 무원칙한 화해주의를 동일시한다.

닌과 안드라데는 ICL과 결별했고, 트로츠키와 IS에 이미 결정된 사실을 통보했다. 문제는 먼 곳으로부터 스페인 트로츠키주의를 구원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였다. 트로츠키는 반복하여 정치를 강조했다. 통합 선언을 읽은 후, 트로츠키는 POUM의 런던 사무국에 대한 충실한 지지의 반혁명적 중요성에 집중하면서 POUM의 모순들과 얼버무림들에 대하여 가차없는 비판을 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했다(“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1935년 10월 18일). 1936년 1월 자신의 글에서, 트로츠키는 닌/모린 그룹의 성격에 관한 ICL 내부에서의 어떠한 혼란에 대해서도 경고했으며, 이들 중도주의적 배교자들과 배신자들에 대한 자신의 화해 불가능한 반대를 강조했다.

“언제나 꿀꿀이 죽 같은 조직이었던 ‘좌익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스페인 조직은 오른쪽과 왼쪽으로의 끊임없는 동요 끝에 모린의 카탈로니아 연맹과 통합하여 중도주의 강령에 기초한 ‘맑스주의자(?) 통합’당을 창설했다. 그 이름에 현혹된 나머지 우리 자신의 정기간행물들 중 일부가 이 당이 마치 제4 인터내셔널 쪽으로 이끌리고 있는 것처럼 써왔다. 경솔한 상상...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의 세력들을 과장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그러한 것이 실체로 하여금 잔인한 각성을 초래하지 못하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 “POUM의 배반”

중도주의적 동요와 인민전선의 배신

공화파들에 의해 시작되었던 1936년 “좌익 선거 협정”은 사적소유와 부르주아지 지배를 지키기 위한 문서였다. 협정은 군장교와 교회의 존엄은 보장했고, 농경지, 산업이나 은행에 대한 어떠한 국유화도 거부했고, 카탈로니아와 바스크 지역에 대한 민족적 억압을 계속했다. 협정은 (스페인의) 모로코에 대한 식민지 점령을 지지했고, 스페인의 외교 정책이 제국주의 도둑들의 소굴인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원칙들”을 따를 것을 권유했다. 협정 조인자들에는 PSOE/UGT, PCE, 과거 CNT 지도자 안겔 페스타나의 생디칼리스트 당, 그리고 POUM의 장 안드라데가 포함되었다. 비록 협정에 가맹하지는 않았지만, CNT는 자신의 조직원들에게 인민전선에 투표하도록 독려했다. 트로츠키는 아래와 같이 썼다.

“대부분의 이들 정당들이 스페인 혁명이 고조되던 기간에 혁명의 선두에 섰고, 혁명을 배신하고 짓밟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새로운 양상은 모린-닌-안드라데 당의 조인이다. 과거 스페인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그야말로 ‘좌익’ 부르주아지 계급의 꽁무니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굴욕적인 타락은 생각하기 힘들다!...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 ‘통합 맑스주의자’라는 이름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스페인 ‘좌익 공산주의자들’(안드레스 닌, 장 안드라데 등)은 우리의 스페인에서의 ‘특수한 조건들’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탓하면서 자신들의 협조주의적 정책들에 대한 우리의 비판을 회피하려고 수차례 시도해왔다. 이것은 모든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되는 전통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주의자의 첫 번째 임무는 그들의 나라의 특수한 조건들을 자기 자신의 나라를 넘어서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맑스주의의 국제적 언어로 번역하는 것에 있다.”

- 같은 책

다시 한번, 더간이 닌을 방어하기 위하여 달려든다. 선거 협정에 공식적으로 사인한 것에 관하여 POUM을 꾸짖는 한편으로, 그는 “주어진 정치적 정세에서 POUM은 우익에 대항하여 협정을 지지하는 것 말고는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거의 없었지만, 당의 입장에 혼선을 주지 않으면서 이것을 하기 위한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외부로부터 독립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고 쓰고 있다(“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과 POUM의 창설”). 여기서 다시, 1930년대와 그 이후에서처럼, 인민전선에 대한 지지가 트로츠키가 말했던 것처럼 노동계급의 피를 대가로 치른 “최악의 범죄”이기 보다는 전술적 책략으로 간단하게 표현되고 있다.

1931-33년 연합정부에서도 역시 수상이었던 좌익 공화파 정치인 마누엘 아자나(Manuel Azana) 하의 인민전선 정부의 1936년 2월 선거는 경작지의 몰수와 1936년 2월과 7월 사이의 수백 건의 파업들을 포함하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거대한 격변의 시기를 열었다. 인민전선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진압하기 위하여 강력하게 활동했지만, 부르주아지 주인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1936년 7월 17일, 프랑코는 스페인 주둔군에게 도시를 장악할 것을 통신으로 명령했다. 정부는 노동계급에 의한 어떠한 저항도 막는 한편으로 프랑코 세력들과 협상을 하기 위하여 난리였다. 다음날, PSOE와 PCE 지도자들은 “정부는 명령하고 인민전선은 복종한다”라고 충성스럽게 선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거짓말로 자신들을 달래려고 하는 정부의 노력들에 “복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7월 19일에 CNT/FAI와 POUM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인민전선 정부로부터 무기를 거부당한 노동자들은 소총들과 다이나마이트를 장악하고 군 주둔지들을 포위하여 무장해제 시켰다. 혁명적 봉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수일 내에, 카탈로니아 전체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있게 되었다. 7월 20일에는 아스투리아스 광산으로부터 공급을 받은 5천명의 다이나마이트 부대가 거리를 지키기 위하여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무장한 노동자위원회들이 국경에 있던 관세사무소원들을 쫓아냈다. 노동조합 증이나 노동계급의 정치정당이 발행한 가입증만 있으면 입국이 허용되었다. 부르주아지 계급의 중요한 부위들, 특히 카탈로니아에 있던 이들은 도망치거나 쫓겨나 프랑코의 군대가 통제하던 지역들에 모여들었다. UGT와 CNT의 공동위원회가 스페인 전역의 운송을 담당했다. 노동자들은 버려진 공장들을 접수하여, 지역 수준에서 생산을 조직했던 집산공장들을 창설했다. 이러한 집산공장들이나 협동조합들은 해상운송, 광산, 전기, 운송, 가스와 수도공급, 그리고 많은 다른 산업들 속에서 조직되었다.

부르주아지 정부는 계속해서 “통치”는 하였으나 권력은 실제로 무장한 노동자들과 그들의 위원회들의 수중에 있었다. 이것은 이중권력의 상황이었다. 트로츠키가 썼듯이, “역사적으로 혁명을 예비하는 준혁명적 시기에는 정부의 공식적인 기구는 여전히 과거의 주인들의 수중에 있지만, 새로운 사회체제를 실현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계급이 비록 아직은 나라의 주인은 아니지만 국가권력의 상당한 부분을 자신의 수중에 집중했던 정세가 조성된다”. 문제는 트로츠키가 불렀던 것처럼 이 “양면의 통치권”이 혁명에 이롭게 해결되는가 아니면 반혁명에 이롭게 해결되는가 였다. 트로츠키는 2월과 10월 혁명들의 사이의 시기 러시아에서 “문제는 그렇게 제기되었다”고 설명했다.

“부르주아지 계급이 실제로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살짝 바꾸면서 과거의 국가기구를 장악하게 될 것인지 (이 경우 소비에트들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아니면 과거의 정부 기구들뿐만 아니라, 과거의 정부 기구가 봉사했던 그 계급의 지배까지 일소하면서 소비에트가 새로운 국가를 수립할 것인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가들[SRs]은 첫 번째 해결책으로 행동하고 있었고 볼셰비키는 두 번째 방향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볼셰비키가 승리했다.”

- 러시아 혁명적 역사(뉴욕, 사이먼과 셔스터 출판사, 1932년)

그러나 스페인에는 볼셰비키 당이 없었다. 스탈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이 “민주주의 혁명”의 이름으로 무기를 든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부터 빼앗은 권력을 되돌려 줄 것을 부르주아지 계급과 함께 호소했다. CNT 지도자 가르시아 올리버(Garcia Oliver)가 상술했던 것처럼,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카탈로니아 에스쿠에라(Catalan Esquerra)의 지도자 루이스 컴패니스(Luis Companys)는 노동자들이 프랑코를 물리친 후에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의 회합에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당신들이 승리했고 모든 것이 당신들 권력 안에 있다. 만약 당신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만약 당신들이 카탈로니아 대통령으로서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아니라고 말해라. 그러면, 나는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투쟁에 나선 한 병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반면 만약 당신들이 오늘 이 도시에서는 결의되었지만 스페인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아직 결정되지 못한 투쟁 속에서 나의 당원들, 나의 이름과 나의 신망과 더불어 내가 이 사무실에 있는 것이 효용이 있다고 믿는다면, 당신들은 카탈로니아가 세상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선진화된 국가들의 전위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리라는 진실한 소망 속에서 부끄러운 과거가 오늘 영면에 들었다고 확신하는 한 사람으로서, 한 정치인으로서 나와 내가 한 말을 믿어도 된다.”

- Jose Periats Valls의 “스페인혁명에서의 CNT”(해스팅스, 잉글랜드, 멜쳐 출판사, 2001)에서 인용

이것이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이 듣고 싶어했던 모든 것이었다. 가르시아 올리버는 “무정부주의자 연합 독재로 혁명을 목졸라 죽이는 것으로 귀결될 혁명적 전체주의를 피하던 CNT와 FAI는 협조과 민주주의를 선택했다. 그들은 카탈로니아 민주주의자의 말을 믿었고 자치정부의 대통령으로서 컴패니스를 유지시켰고 그를 지지했다.”로 그의 설명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볼셰비키 전위의 부재 속에서의 이중권력

러시아에서의 소비에트와는 달리, 스페인에서의 다양한 공장위원회와 민병대 위원회들은 일반적으로 선출되지 않았고, 그들의 구성과 성격이 어떤 그룹이 통제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 다양했다. 이것들을 공장과 요새들로부터 대표들의 선출, 즉각적 소환에 대한 종속을 통하여 진짜 소비에트들로 변형시키고, 전국적으로 자본가 계급에 맞서는 통일된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기관들로 중앙집중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오직 이중권력이 그러한 조직적 규모을 갖출 때에만, 현재의 우세한 정권과 위원회들이 국가의 형식이 되는 새로운 혁명적 질서 사이에서의 선택이 일정에 올려지게 된다” (모로우, 스페인에서의혁명과반혁명).

반파시스트 민병대(CCMA)의 중앙위원회는 카탈로니아 노동자위원회들의 네트워크의 정점에 있었다. 1936년 7월 21일 15인 위원회로 설립된 CCMA는 CNT, UGT와 기타 노동자 조직의 대표들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 에스쿠에라의 대표들까지 포함했다. 에스쿠에라가 포함되어 있는 조건에서, 좌익 무정부주의 두루티의 친구들에 대한 소중한 평가에서 역사가 어커스틴 귈라몬(Agustin Guillamon)은 “어떤점에서도이중권력정세는존재하지않았다. 이것이 스페인 혁명과 내전에 대한 어떠한 이해에 대해서도 결정적이다. CAMC는 계급협조주의적 대행자였다.”(두루티의친구들그룹:1937-1939 [샌프란시스코: AK 출판사, 1996])고 주장했다.

CCMA에 에스쿠에라를 포함시킨 것은 개량주의와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의 계급협조적 정치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CCMA가 곧바로 인민전선정부에 의해 분쇄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증명되듯이, CCMA는 단순히 인민전선 정부의 확장은 아니었다. 모로우는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과거의 국가 기제에 실제로 의존하는 연합정부와는 달리,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었던 중앙위원회는 노동자 조직들과 민병대들에 의존했다. 에스쿠에라와 에스쿠에라에 가장 가까왔던 자들 -스탈린주의자들과 UGT - 은 당분간 단지 따라다닐 뿐이었다. 중앙위원회의 포고들은 카탈로니아에서 유일한 법이었다. 컴패니스는 의문의 여지없이 중앙위원회의 명령들과 재정적 지시들에 복종했다. 아마도 민병대들을 조직하기 위한 중앙으로서 시작했지만, 중앙위원회는 필연적으로 점점 더 많은 정부적 기능들을 맡아야만 했다. 곧 중앙위원회는 노동자 경찰국을 조직했고, 보급국을 조직했는데, 보급국의 말은 공장과 항만에서는 법이었다....

“민병대들의 중앙위원회의 주변에는, 다양한 반파시스트 조직들의 합동위원회들의 형식으로 공장, 마을, 보급, 식량, 경찰 등등의 여러 위원회들이 집결했는데 실제로는 합동위원회들이 각각의 구성부분들보다 더 큰 권위를 행사했다. 물론, 첫 번째 혁명의 파도 이후 위원회들은 그것들의 기본적인 허약함을 드러냈다. 위원회들은 조직들의 상호 합의에 기초했는데, 이 합의로부터 성원들을 모집했다. 그리고 첫 몇 주가 지난 후에 스탈린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에스쿠에라가 자신감을 회복했고, 자기 자신들의 강령을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CNT 지도자들은 혁명에 해로운 양보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는 위원회들은 상호합의의 방식을 포기하고 민병대들과 공장들로부터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의원들에 의한 다수결 결정의 방식을 수용함으로써만 오직 진보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모로우, 인용된 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들을 목졸라 죽이고 있던 계급협조주의적 정치들에 맞서는 투쟁의 구체적인 표현은 에스쿠에라를 CCMA로부터 축출하라는 요구였을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프랑코에 맞선 투쟁 속에서 에스쿠에라에 의해 무기를 거부당했던, 프랑코 세력들을 노동자들이 물리친 이후 무정부주의와 개량주의 지도자들이 이들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자들” 쪽으로 돌아가 그들을 신봉했던 것을 목격했던 전투적인 카탈로니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심금을 강하게 울렸을 것이다. CCMA로부터 에스쿠에라를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잘못된 지도자들의 배신을 폭로하고, 그래서 노동자권력의 기치와 혁명정당의 건설을 위한 투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획득하기 위한 지렛대로서 복무하는 날카로운 계급 전선을 형성해 냈을 것이다.

동시에, 단순히 CCMA로부터 부르주아지 계급의 대표들을 축출해낸다는 것은 문제를 거의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POUM은 자신들이 강했던 레리다(Lerida)에서 지역 노동자 위원회로부터 에스쿠에라의 대표자들을 쫓아냈다. 그러나 POUM은 인민전선에 굴복했고, 노동자, 농민, 민병대의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평의회의 건설에 반대했다. 심지어 자신의 통제하에 있던 공장과 민병대 부대들에서의 그러한 위원회들의 선출조차 거부했다.

닌은 그런 폭넓고 권위적인 계급투쟁의 기구들은 러시아에서 등장했는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투쟁의 전통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바보 같은 주장을 하면서 스페인에서는 소비에트의 필요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는 민주주의적 전통이 없었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조직과 투쟁의 전통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의 노동조합들, 자기 자신의 당들, 자기 자신의 조직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소비에트가 우리들 사이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권력이라는 근본적인 문제”, 1937년 4월 27일 La Batalla, 모로우의 인용된 책으로부터 인용). 이것은 CNT와 다른 경향들과의 정치투쟁을 위한 닌의 의욕부족의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 POUM의 능력이 POUM에게 실질적인 권위를 주었다. 이 권위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해제하고 CCMA와 지방 노동자위원회들을 용해시키는 것에 사용되게 된다.

반혁명이 다시 무장하다

1936년 9월에 닌은 마드리드의 인민전선 정부를 비난했고 “부르주아지 장관들을 타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동시에 닌은 카탈로니아는 이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하에 있다고 선포했다! 같은 달에, POUM이 CNT/FAI와 함께 카탈로니아 자치정부에 합류면서 닌 스스로가 부르주아지 국가의 장관이 되었다. 닌은 법무장관에 임명되었는데, 이 자리는 러시아에서 부르주아지 임시정부에서 케렌스키가 처음으로 장악했던 그 자리였다! 그 자격으로 닌은 카탈로니아의 혁명적 노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던 맹아적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의 기관들에 맞선 공화국 정부의 정면공격을 관장했다. 이 반혁명적 공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민병대의 “군대화”였다. 10월 초 자치정부의 한 포고는 CCMA의 해산과 노동자 민병대들의 부르주아지 국가에 대한 복종을 명령했다. 지역 위원회들 또한 해산되어 부르주아지 지방자치 행정기관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POUM의 La Batalla의 “Indegeta”로 사인된 1936년 8월 7일의 한 기사는 아래와 같이 뻔뻔하게 선언했다.

“반파시스트 민병대들의 중앙위원회는 자치정부 위원회라는 새로운 정부의 수립의 논리적인 귀결로서 해산되었다. 고전적인 혁명적의 국면인 ‘이중권력’은 우리 혁명의 경로에 완전히 해로운 것이었다.... 두 달간의 내전과 혁명이 그러한 이중성이라는 해악들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었다.”

- 1937년 10월, Jose Rebull의 “이중권력에 대하여”에서 인용. 혁명적 역사 4권 No. 1/2에서 재출판됨.

모든 도시 노동자들의 무장해제에 대한 명령이 뒤따랐다. 또 다른 포고가 “산업의 집산화”라는 이름으로 공장의 노동자 그룹들을 점점 더 정부가 임명한 대행자들의 지배하에 있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박멸하려고 했다.

개인적으로 닌은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에스쿠에라 지도자 루이스 컴패니스를 따라서 Lerida로 가서 그곳에서 POUM이 장악했던 위원회의 해산을 감독했다. POUM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엔릭 아드로어[Enric Adroher](Gironella)는 후에 자치정부는 “위원회들의 해산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임무”를 띠고 있었으며, POUM은 “혁명적 세력들이”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납득시키기 위하여 위임되었고”, 일단 이 “값진 봉사”가 수행되자 정부로부터 쫓겨났을 뿐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더간의 “트로츠키와 POUM”에서 인용).

1936년 12월 자치정부로부터의 축출에 뒤이어, POUM은 노동조합, 농민, 전투원들의 대회를 소집해 줄 것을 이 부르주아지 정부에게 간청했다. 트로츠키가 지적했던 것 처럼, 이것은 POUM이 인민전선 정부로 돌아가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한 방책에 불과했다:

“POUM 지도자들은 정부가 사회주의의 길을 택할 것을 애처롭게 설득하려고 한다. POUM 지도자들은 CNT 지도자들이 국가에 관한 맑스주의의 가르침을 결국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정중하게 노력한다. POUM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인민전선의 지도자들에 대한 ‘혁명적’ 조언자들로 바라본다. 이 입장은 김빠지는 것이고, 혁명가들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공공연하고 대담하게 인민전선 정부에 대항하여 대중들을 투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불렀으나 실제로는 그냥 자유주의자들임이 판명된 이들 신사양반들의 배신을 생디칼리스트 노동자들, 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이 보도록 폭로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르주아지 계급의 최악의 대행자로서의 스탈린주의를 가차없이 비판해야할 필요가 있다. 동지들 스스로가 부르주아지 정부의 조언자들이 아니라 혁명적 대중들의 지도자들임을 느낄 필요가 있다....

“4월 4일자 La Batalla에는 ‘승리를 위한 13가지 포인트들’가 나온다. 모든 것들이 POUM의 중앙위원회가 당국들에 제안하고 있는 조언의 성격을 갖고 있다. POUM은 ‘노동자와 농민 신디케이트들 그리고 병사들의 대의원 대회의 소집’을 요구한다. 형식적으로는 노동자, 농민, 그리고 병사 대표자들의 대회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POUM이 부르주아지 개량주의 정부 스스로가 그러한 대회를 소집하고, ‘평화적으로’ 부르주아지 정부를 자기 자신이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정중하게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혁명적 슬로건이 공허한 문구들로 둔갑하고 만다!”

- “스페인에서 승리는 가능한가?” 1937년 4월 23일

무정부주의 CNT/FAI의 역할

민병대의 군대화가 전환점이었다. 노동자들의 잘못된 지도자들의 배신으로 힘을 강화한 공화파 부르주아지 계급은 자신들의 우세를 다시 주장하기 시작했다. 혁명적 노동자들은 수세에 처하게 되었다. 프랑코는 중앙정부가 발렌시아로 이동하도록 강제하면서 마드리드에 대한 포위를 시작했다. CNT/FAI 지도부는 발렌시아에서 정부 장관직 4개를 받는 조건으로 민병대의 국가에 대한 종속을 받아들였다. 트로츠키 서술하고 있듯이, “권력의 장악이라는 목적에 반대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결국에는 혁명이라는 수단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은 (1936년 7월 19일과 1937년 5월의 나날들에) 본능적으로 볼셰비키의 길에 들어서고자 열망했던 반면 그들의 지도자들은 반대로 자신들의 모든 힘을 다해서 대중들을 인민전선 진영, 즉 부르주아지 정권으로 강제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기 자신의 노동조합에, 즉 평화적 시기라는 일상에 충만한 조직들에 제한하기 위하여 애씀으로써, 그리고 노동조합의 틀 밖에서, 대중들 사이에서, 정치적 정당들 사이에서, 그리고 정부 기구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무시함으로서 혁명의 법칙들과 임무들에 대한 치명적인 이해의 부족을 드러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혁명가들이었다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결코 노동조합에 합류하지 않았던 가장 억압받던 계층들을 포함하여 도시와 지방의 모든 노동인민들의 대표자들을 통합시키는 소비에트들의 수립을 호소했을 것이다. 혁명적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이들 소비에트들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장악했을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하찮은 소수로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적의 힘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부르주아지 국가기구는 허공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한번의 강력한 타격으로도 이들 기구를 박살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안에서 ‘정치’로부터 숨고자 애쓰던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들은 전세계와 그들 자신에 대단히 놀랍게도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라는 수레의 5번째 바퀴인 것으로 드러났다.”

- “스페인의 교훈들: 마지막 경고” 1937년 12월 17일

CNT 지도부가 했던 배신적인 역할에 대한 그의 신랄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베르논 리차드스는 이들 배신들을 단지 “권력의 부패”로만 한정할 수 있을 뿐이다(스페인 혁명의 교훈들). CNT의 컴패니스와 부르주아지 국가에 대한 굴종은 무정부주의의 핵심에 있는 급진적 이상주의와의 절연이 아니라 그것의 반영이었다. 무정부주의는 정치권력을 거부하고, 대신에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 의한 도덕적 갱생의 행위라고 단정한다. 모로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참으로, 계급 협조는 무정부주의 철학의 심장에 숨어 있다. 이것은 반동의 시기 자본주의적 억압에 대한 무정부주의의 증오에 의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중권력이라는 혁명적 시기에는 표면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 때에는 자본가가 웃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함께 건설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포함하여 ‘모든 독재들’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자는 자본가에게 단지 자본가적 전망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에 그칠 것이며, 자본가는 노동자들을 분쇄하는 것을 준비하는 것에 더 나은 그것에 자연스럽게 동의한다.”

- 모로우, 인용된 으로부터

CNT는 자신이 대중적 기초를 가지고 있고 부르주아지의 합법성이라는 조건에서 활동할 때에는, 다른 노동조합과 매우 비슷하게 활동했다. 트로츠키가 1938년에 썼듯이, “스페인에서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의 최근 경험을 포함하여 과거의 모든 역사적 경험에서 목격하는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높은 층들의 조직적 표현으로서 노동조합들은 부르주아지-민주주의 정권과의 타협을 향한 강력한 경향을 발전시켰다. 격렬한 계급투쟁의 시기에, 노동조합들의 지도적 기관들은 대중운동이 해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대중운동의 지배자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이행의 시대의 노동조합들”, 트로츠키: 노동조합들에 대하여, [뉴욕, 패스파인더 출판사, 1969년]). 만약 노동조합들이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정당의 지도하에 있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보조물로서 활동하게 된다. CNT 지도자들은 그들의 보다 급진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과거의 그들, 즉 개량주의 노동조합 관료들과 다를 바 없음을 증명했다.

민병대의 해산에 대한 CNT 하부에서의 증가하는 분노와 불만을 반영하여, 두루티의 친구들이라는 무정부주의 그룹들 중의 하나가 결국 노동자 준타[평의회]를 제기했다. 1937년 3월에 조직된 이 그룹은 오랜 기간 급진 무정부주의자였으며, FAI에서 지도적인 투사였으며, 아라곤(Aragon) 전선에서는 CNT 민병대의 대장이었던 부에나벤튜라 두루티(Buenaventura Durruti)의 이름을 따서 그룹의 이름을 지었다. 1936년 11월에, 두루티는 민병대의 군대화에 대한 CNT 지도부의 지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었다. 그는 후에 의심스러운 정황 속에서 살해당했다. 귈라몬(Guillamon)이 두루티의친구들그룹: 1937-1939에서 지적하듯이, 이 그룹은 두루티의 과거 동료였던 파블로 루이즈(Pablo Ruiz) 처럼 민병대의 해산에 반대하던 급진적 무정부주의 전투원들과 정부 참여를 반대하던 무정부주의 지식인들의 통합을 의미했다. CNT의 Solidaridad Obrera의 중심적 필자였던 제이미 발리우스(Jaime Balius)가 후자의 지식인들 중에 하나였다. 친구들은 4천명 혹은 그 이상의 전투원들 보유했고, CNT/FAI에 유의미한 기반을 두고 있었다. (2004년 6월 11일과 7월 9일자 노동자전위 828-829호의 “스페인 내전에서 트로츠키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보시오.)

비록 두루티의 친구들이 결코 무정부주의로부터 맑시즘으로의 도약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승리를 통해 노동자 혁명을 보고자 하던 그들의 열망이 무정부주의 이데올로기의 한계까지 그들을 나아하게 했다. 1938년 팜플렛 “새로운 혁명을 향하여”에서 발리우스(Balius)는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우리의 강령 속으로 약간의 차이를 도입하고 있다. 혁명적 준타의 수립.

“우리가 알고 있듯이, 혁명은 그것을 관장하고 조직화된 관점에서 적대 적 부위들을 억압하기 위한 기관들을 필요로 한다. 현재의 사태들이 보여주어 왔듯이, 그러한 부위들은 분쇄되지 않는다면 잊혀지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 귈라몬의 두루티의 친구들 그룹: 1937-1939에서 인용

“적대적 부위들”에 대한 억압기관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이 “약간의 차이”가 노동자 국가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필요성에 대한 암묵적 인식에까지 이르렀다. 레닌이 썼듯이, “노동자들이 ‘그들의 무기들을 내려 놓’아야 하는가 아니면 자본가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하여 자본가들에 맞서 그것들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러나 하나의 계급에 맞서는 다른 하나의 계급에 의한 체계적인 무기들의 사용이 국가의 ‘과도적 형태’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국가와 혁명, 1917)

스페인 사태의 처음부터, 트로츠키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전투적인 인자들을 포함하고 있던” CNT와 접촉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런 선별은 수년 동안 지속되어 온 것이다. 이 연맹을 강화하는 것, 이 연맹을 진정한 대중들의 조직으로 변형하는 것은 모든 선진 노동자들의,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자들 ....의 의무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교리와 혁명적 방책으로서의 아나코-생디칼리즘의 운명에 대하여 어떠한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나코-생디칼리즘은 그것의 혁명적 강령의 부재와 정당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해제 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정치가 그들의 목을 쥘때까지도 정치를 ‘부정한다’; 그리고는 그들은 적대 계급의 정치를 위한 지반을 준비한다.”

- “스페인에서의 혁명”, 1931년 1월

ICE와 모린의 BOC 모두 처음에는 CNT 내부에 일부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32-33년, 무정부주의 FAI가 모린 세력의 대부분을(뿐만 아니라 페스타나 주변의 개량주의 생디칼리스트들도) 축출하면서, CNT에서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소위 레닌의 볼셰비키들의 권위주의와 잔혹함에 욕을 퍼붓는 무정부주의자 머래이 부크친(Murray Bookchin)은 FAI의 CNT에 대한 관료적 장악을 냉소적으로 변론했다. “이번 성공이 민주주의의 예절에 관한 과도하게 민감한 관심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없어야 한다” (부크친, 샘 돌고프(Sam Dolgoff)가 편집한 아나키스트 집단들 [뉴욕, Free Life 판, 1974]의 “서문”).

트로츠키는 CNT/FAI는 카탈로니아 민족주의자들의 자국을 쫓아서 인입되었고, 한편 모린 그룹은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들에 이끌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닌은 CNT/FAI와 모린의 뒤를 쫓았다. 이 정치적으로 화해주의적 경로는 내전과 인민전선이라는 충격 하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닌의 “좌익”적 목소리였던 안드라데는 공공연하게 POUM의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 지도자들에 대한 파탄난 의존에 대하여 “스페인 혁명의 미래는 CNT와 FAI의 태도와 그들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중들을 이끌어 가는 것에 있어서 그들이 보여주게 될 능력에 달려있을 것이다” (1937년 5월 28일, 아돌프(Adolphe)의 “실수의 역사와 교훈들”, 정보통신, 1937년 7월에서 인용)라고 인정했다. 모로우는 아래와 같이 썼다.

“POUM 지도부는 CNT에 집착했다. 대중들에 대한 지도부를 두고 무정부주의적 개량주의자들과 대담하게 투쟁하는 것 대신, 닌은 스스로를 그들과 동일시함으로써 착각 속의 강력함을 추구했다. POUM은 CNT에 있는 수백만 명에 대한 지도부를 위하여 투쟁하기는커녕, 더 작고 이질적이었던 카탈로니아 UGT에 자신의 투사들을 보냈다. POUM은 이미 프롤레타리아트의 결정적인 부위들이 모여있던 거대한 CNT 부대들 속으로 자신의 세력들을 보내기는커녕, 스스로의 영향력을 제한하면서 POUM 민병대 부대를 조직했다. 바탈라는 집산화된 소유를 다루기 위한 CNT 노동조합의 경향을 자신의 것으로서 기록했다. 바탈라는 그러한 경향을 만들어 낸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 이론들을 결코 공격하지 않았다. 바탈라는 해를 거듭하면서 무정부주의적 개량주의 지도부에 대한 원칙적인 공격을 결코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무정부주의자들이 POUM의 자치정부로부터의 축출을 묵묵히 받아들였을 때도 그러했다. CNT와의 통일된 실천을 지도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러한 잘못된 방침은 CNT-FAI 지도부가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고 POUM을 배신하는 것을 허용했다.

-모로우, 인용된 책으로부터

두루티 그룹: 나침반 없는 좌익 무정부주의자들

POUM은 처음에는 두루티의 친구들을 (외견상 무비판적으로) 칭송했다. 나중에 안드라데는 1986년 “CNT-FAI의 혁명적 의식성을 분명히 말하면서, ‘두루티의 친구들’을 강력한 대표적 조직으로 묘사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실제로는 그들은 조직적인 측면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며, 이데올로기적 용어로는 혼란의 기념비였다.”(귈라몬, 인용된 책으로부터)고 쓰면서 무정부주의-생디칼리즘 내부의 이 좌익적 경향의 중요성을 기각했다. 더간은 “스페인 혁명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글 속에서도 역시 1937년 5월 POUM의 잠재적 동맹들, 급진 무정부주의 조직 두루티의 친구들의 중요성을 과도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왔다.”고 반복한다.(더간, “트로츠키와 POUM”)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들과 정치적으로 투쟁하는 것에 대한 POUM의 거부를 위한 변명거리들이 있다. 두루티 그룹은 심각하게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 그룹은 정치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만약 그 변화에 개입할 레닌주의 정당이 있었다면, 이들 최고의 좌익 무정부주의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적 인습을 벗어 던지고, 볼셰비키주의로 획득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민전선의 경험과 CNT/FAI 지도자들의 배신을 통하여, 두루티 그룹의 투사들은 경험적으로 CNT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컴패니스에 대한 굴종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했던 “반권위주의”를 포함하는 무정부주의 교의의 핵심 측면들을 거부하기 시작했었을 것이다. 해산 전의 아라곤 전선에 있던 겔사 지구의 두루티 부대는 CNT/FAI 지도부에게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의원들에 책임을 지는 중앙 지휘부 하의 민병대들을 다시 조직할 것을 요구했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몇 걸음 나아갔었다. 1937년 1월에 발리우스는 이와 비슷하게 다음과 같이 썼다.

“파시즘에 맞선 이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빨리 승리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자신으로부터 유래하는, 자신에 의해 지배되는, 적어도 스스로에 의해 통제되는 군대.... 지휘부와 규율을 가진 군대: 노동자 지휘부.”

- 미큐엘 아모로스(Miquel Amoros), “배반당한 혁명: 발리우스와 두루티의 친구들의 진짜 역사”, 바르셀로나, Virus 출판사, 2003년 (ICL의 번역)

발리우스는 “두루티의 유언”이라는 CNT의 Solidaridad Obrera[노동자 연대](1936년 12월 6일)에서의 마지막 글들 중 하나에서, “두루티는, 우리 무정부주의자들은 혁명이라는 것이 전체주의적 성향을 필요로 한다”고(귈라몬의 인용된 책으로부터 인용) 직설적으로 말했다고 썼다. 후에 발리우스는 이 그룹이 준타(평의회)를 새로운 계급권력의 기관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음을 부정했다(로날드 프래이서(Ronald Fraser)의 피의스페인: 스페인내전에관한구술역사, [뉴욕, Pantheom Books, 1979년]을 보시오). 그러나 1937년 4월 포스터에서, 이 그룹은 자본가 자치정부를 대체할 노동자평의회(준타)를 요구했다: “도시와 지방, 노동자들과 전투원들로 구성되는 혁명적 평의회(준타)의 즉각적인 수립.... 자치정부가 아니라 혁명적 평의회(준타)!”(귈라몬의 인용된 책으로부터).

그러나 두루티의 친구들은 시종일관 CNT/FAI에 계속해서 충성했고, 정치정당들에 대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혁명적 준타들을 노동조합으로부터 선출된 대표자들로만 구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전망은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다 억압받고 폭발성을 내포한 층의 미조직 노동자 대중들을 대표하는 것을 거부했다. 게다가, 평화적 시기의 일상적인 방어적 투쟁의 기관으로서의 노동조합들은 혁명적 투쟁에서는 보수적인 제동장치로서 기능하는 경향이 있었다. 트로츠키는 “생디칼리즘의 아류들은 노동조합은 그것 자체로 충분하다고 믿는 자들을 포함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이것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지만, 실천적으로는 혁명적 전위의 후진 대중들, 즉 노동조합들로의 해소를 의미한다”(“공산주의와 생디칼리즘”, 1929년 10월, 레온 트로츠키: 노동조합들에대하여)고 썼다.

두루티 그룹의 반(反)정치적 편견은 군사 행동에 대한 평의회(준타)의 통제와 경제에 대한 노동조합의 통제 사이의 잘못된 구분에서도 역시 표현된다. 1938년 이들의 정강, 새로운혁명을향하여는 “준타는 노동조합의 독점적 영역인 경제업무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서술했다. 그러나 정치, 군사, 그리고 경제 문제들을 분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혁명적 군대의 투쟁력은 무기, 식량, 그리고 기타 물자들의 생산에 달려 있었다. 그러한 고려들 없이는 혁명적 평의회(준타)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으며, 또한 군사적으로 필요한 것에 대한 고려가 없이는 노동조합은 경제적 업무들을 수행할 수 없다.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무기들을 공급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CNT 지도자들은 현대적 무기들을 갖춘 중앙집중화된 군대가 프랑코 군대들에 맞선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부르주아지 국가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정당화했다. 새로운혁명을향하여는 “만약 적에 대한 저항에 필요했던 전쟁 물자들이 확보되었더라면 스페인 북부는 구해질 수 있었다. 방법들이 있었다. 스페인 은행은 스페인 땅을 무기들로 뒤덮을 만큼 충분한 금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라고 서술했다. CNT는 은행들을 장악하지도 못했으며, 장악하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것은 은행이 그 자체로 부르주아지 국가의 일부였기 때문이었다. 금융과 산업에 대한 몰수와 집산화는 중앙집중화된 평의회(준타) 권력에 기초한 노동자 국가의 임무였다. 그러나 두루티 그룹은 이것을 중앙집중화된 소비에트 국가의 임무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문제에 대하여 답을 하지 않은 채 있었다.

아마도 이 그룹의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노선에, [두루티의] 친구들이 CNT/FAI로부터 완전하게 분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의 모든 국가에 대한 적대감이 논리적으로 그들을 스페인 식민지 모로코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반대하도록 이끌었다. 그들의 1938년 팜플렛에서, 두루티 그룹은 스페인을 식민지로 묘사하였던 반면, 한번도 모로코의 독립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베르논 리차드스의 CNT/FAI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은 두루티의 친구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들의 실천들에 의하면, CNT는 모로코를 적으로부터 민중운동의 한 동맹으로 변형시킬 수도 있었던 혁명적 강령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들의 지도자들 중의 누구도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이 선동가들을 북아프리카로 파견해야 하고 아랍인들 사이에서 자치를 위한 폭넓은 선전 캠페인을 수행해아 한다고 주장했던 카밀로 베르네리(Camillo Berneri)와 같은 무정부주의 투사들에 한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 스페인 혁명의 교훈들

모로코 문제는 CNT의 탄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는데, 이 문제는 모로코로 갈 예비군 소집에 반대했던 1909년 총파업의 결과에 뒤이은 것이었다. 1911년 창립 직후, CNT는 부분적으로는 모로코에서의 전쟁에 반대하는 또 다른 총파업을 요구했다. 그러나 1936년 말이 되면서, CNT/FAI 지도자들은 모로코 인민들에 대한 식민지적 억압을 강화하는 스페인 부르주아 국가의 장관들로서 복무하고 있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모로코 인민들을 위한 모로코. 이 슬로건이 공개적으로 선포되었던 순간, 이 슬로건은 모로코의 피억압 대중들 사이에서 봉기를 선동할 것이며, 파시스트 용병 부대 안에서의 분열을 야기할 것이다.”(“스페인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강령”, 1937년 7월, 혁명적역사 1권 2호, 1988년 여름) 선포했다. 프랑코의 돌격부대들은 주로 모로코인들과 스페인의 외인용병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또한 일부 무쏠리니와 히틀러에 의해 공급된 군대들로도 구성되었다. 1921-26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모로코 식민지주의자들에 맞선 리프(Rif)전쟁의 지도자였던 리유니온 섬에 유배 중이던 아브드-엘-크림(Abd-el-Krim)은 PSOE 수상 라르고 카발레로에게 자신이 모로코로 돌아가 프랑코에 맞서는 봉기를 지도할 수 있도록 자신의 석방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레온 브룸(Leon Blum)의 프랑스 인민전선정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페인 공화국이 희망을 걸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그러한 움직임에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모로우가 언급했듯이, “카발레로는 요청하지 않을 것이고, 브룸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스페인 식민지 모로코를 분기시키는 것은 아프리카 전역에 걸친 제국주의 지배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스페인에서의혁명과반혁명).

트로츠키주의 중핵을 재건설하기 위한 투쟁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배신과 기권이었던 1935년 닌의 POUM으로의 청산과 함께, 제4 인터내셔널의 기치는 1년이 넘게 스페인으로부터 사라졌다. POUM이 인민전선 협정에 사인한 직후에 트로츠키는 “모린, 닌, 안드라데와 그들의 동료들의 배신을 가차 없이 폭로하고, 제4 인터내셔널 스페인 지부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썼다(“POUM의 배신”). 몇 달이 지난 후, 그는 “잘못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범죄적이기도 했으며 현재도 그러한 채로 있는 안드레스 닌과 안드라데의 정책 전부에 대한 화해 불가능한 규탄을 통해서만, 스페인에서의 맑스주의적 실천은 시작될 수 있다”고 썼다. “진정으로 혁명적 인자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평가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모아 미래를 준비할 너무 길지는 않지만 일정한 기간의 시간을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트로츠키는 “스페인의 제4 인터내셔널 지지자들의” 임무들은.... “너무도 명확하다”고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1. 인민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지도자들의 정책을 대중들 앞에서 가차없이 규탄하고 비난하기

“2. ‘맑스주의자 통합 노동자당’과 특히 과거 ‘좌익 공산주의자들’이었던 안드레스 닌, 안드라데 등의 지도부의 가증스러움을 완전히 틀어쥐고 모든 선진노동자들의 눈 앞에서 그들을 분명하게 그려내기

“3. ‘공개서한’[1935년 봄]의 기초에 입각한 제4 인터내셔널의 기치 주변으로 집결하기

“4. 볼셰비키주의의 정신에 입각한 분파로서 활동하기 위하여 사회당과 통일청년당(United Youth)에 입당하기

“5. 노동조합과 기타 대중조직들에서 소조들과 다른 중핵들을 건설하기

“6. 이들의 주요한 관심을 즉자적, 반(半)즉자적 대중운동으로 이끌고, 이들의 일반적인 특징들, 즉 의회도당들이 아닌 대중의 상태 대하여 학습하기

“7. 투쟁에 명확한 표현을 부여하기 위하여 모든 투쟁에 결합하기

“8. 투쟁하는 대중들이 특히 선출되는 실천위원회들(준타, 소비에트)을 조직하고 끊임없이 확장하도록 항상 주장하기.

“9. 모든 꿀꿀이 죽 강령들(카발레로나 모린)에 권력장악,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회혁명의 강령을 대치시키기.

“이것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 “스페인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임무들”, 1936년 4월 12일

이 편지는 스페인에 있던 한 지지자를 위하여 쓴 것이기는 하지만, 편지가 목적지에 도달했었는지, 혹은 스페인에서 회람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편지는 트로츠키주의자 출판물에 국제적으로 출판되었다.

공공연하게 제4 인터내셔널의 기치를 휘날리면서 독립적인 모습으로 대중을 향할 스페인 트로츠키주의 중핵을 재건설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은 또한 ICL 내부에 있던 화해주의 인자들에 대한 투쟁 또한 요구했다. 베리켄과 스니블리에트를 포함하는 많은 고참 유럽 반대파 중핵들은 중도주의 런던 사무국의 지배력 하에 있었고, 결국 트로츠키에 반대하여 닌과 같은 편에 섰다. 1936년 6월 하순에 ICL은 파리에서 제4 인터내셔널을 위한 운동이 이슈가 되었던 대회를 개최했다. 스니블리에트는 자신이 그해 늦은 가을에 런던 사무국의 대회에 참여할 작정이라고 선언하면서,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대회로부터 퇴장했다. 대개,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던 인터내셔널 서기국은 상대적으로 젊고 경험이 일천한 인자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그들은 인민전선주의의 압력을 받았는데, 당시 레온 브룸 인민전선 정부 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특히 현저했다. 프랑스 지부의 지도자들 중 하나였던 쟝 로우스(Jean Rous)는 1936년에 스페인에서 IS(인터내셔널 서기국) 대표로 복무했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국제적인 중앙은 신생의 공고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결정적인 5개월 동안 트로츠키 개입의 혜택을 입지 못했다. 1936년 8월 하순 모스크바 측이 엄청나게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귀결되었던 일련의 조작된 재판들 중에서 첫 번째 것을 선언했을 때,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 관료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억류되었다. 소련의 스탈린주의적 퇴행에 대한 그의 명쾌한 분석인 ‘배반당한혁명’을 막 완성한 트로츠키는 바로 스탈린 정권의 그 자신과 다른 고참 볼셰비키들에 대한 비방을 폭로하는 임무에 직면했다. 12 월에,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추방되어 다음 달에 멕시코에 도착했다. 이 기간 스페인에 대한 개입의 적극적인 요소로서의 그의 부재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었다.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쓰거나 그들에 관한 문서화된 자료와 스페인에 대한 제4 인터내셔널 내부에서의 논쟁은 다른 기관들 중에서도 하바드와 스탠포드 대학의 후버 연구소에서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검토하고, 합하여 트로츠키주의의 개입에 대한 완전한 그림에 더하는 작업은 과제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일부 IS 의사록과 서한들, 스페인에 관한 보고서들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의 회고록, 그리고 영어로 출판된 ‘Revolutionary History’와 다른 자료들을 검토했다. 우리는 또한 아구스틴 귈라몬이 편집한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 자료 전집인 스페인트로츠키주의에관한역사적문헌 (1936-1948) [Documentacion Historica del Trosquismo Esparnol (1936-1948)](마드리드: Ediciones de la Torre, 1996년)을 자세히 검토했다. 그러나, 무니스(Munis)의 Jalones de Derrota: Promesa de Victoria와 같은 최고의 회고록조차 1935년 ICE의 청산과 1937년 바르셀로나 봉기 사이에 벌어졌던 내부 논쟁과 토론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그래서,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며, 우리는 일정 정도 일반적인 언급을 할 수 있을 뿐이다. 1936-37년 스페인에서의 제4 인터내셔널의 활동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를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작업이 필요하다.

POUM의 협력

1936 여름, 스페인에서 선을 재구축하기 위한 몇 번의 대개는 성공스럽지 못했던 시도들 이후, IS는 니콜라 디 바르톨로메오(Nicola di Bartolomeo(Fosco))가 지도하던 볼셰비키-레닌주의자 그룹(GBL)이라는 작은 조직과 연락이 닿았다. GBL은 주로 자신들의 나라에서 좌익반대파의 조직원이었으며 내전에서 투쟁하기 위하여 스페인으로 왔던 외국인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들 중 다수가 Fosco 처럼 이탈리아인들이었다. 그들의 다수가 즉시 전선으로 가서 POUM 민병대에 합류했다. 압도적인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개입을 강령적으로 무장시키기 위하여 필요했던 이론적, 논쟁적인 기사들 가진 잡지를 발행하는 것을 무시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중심적 임무였다. 레닌이 그의 훌륭한 저작 ‘무엇을것인가?’(1902년)에서 강조했듯이, 정기적인 당 기관지는 혁명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결정적인 뼈대이다. 1937년 4월이 되어서야 GBL을 계승한 조직인 SBLE가 ‘레닌주의자의목소리’라는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938년 SBLE가 진압될 때까지 겨우 3회가 출판되었을 뿐이었다. 정기적인 기관지의 부족이 근본적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개입을 불구화시켰다.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면모로 대중들에게 향하기는커녕, GBL은 POUM의 흔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닌에 의해 POUM 민병대의 외국인 지원자들을 조직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포스코는 “유일한 혁명적 정당”으로서 POUM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서약했다(바탈라, 1936년 8월 4일, 귈라몬의 Documentacion[우리의 번역]). 1936년 8월에 장 로우스가 지도하던 IS 대표들이 스페인에 도착해서 “POUM의 배반”을 포함하고 있던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노동자투쟁(La Lutte Ouvreire)를 배포하자, 포스코는 POUM 지도자들만큼이나 격앙되었다. 나중에 그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인터내셔널 서기국(IS)의 정책 전체를 비난하기에 충분했다.”고 썼다(귈라몬, Documentacion[우리의 번역]).

로우스는 포스코를 “POUM이 우리를 억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우리 대오 내부의 POUM 첩자”라고 묘사했다(Bulletin Interieur International 1호, 1937년 4월[우리의 번역]). 결과적으로 포스코는 GBL로부터 쫓겨났고, 1935년 후반에 프랑스 지부로부터 쫓겨났던 무원칙한 책략가인 래이몬드 몰리니어(Raymond Molinier)와 결탁하여 프랑스어로 된 출판물인 Le Soviet를 몇 회 발행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POUM 지도자들에 대한 가차없는 공격에 대하여 그를 비난했던 사람은 포스코만이 아니었다. 스니블리에트, 서지, 그리고 베리켄도 역시 트로츠키를 비난했다. 1936-37년에, IS의 보다 젊은 인자들이 스니블리에트, 베리켄, 그리고 서지의 명백한 친POUM 관점과의 격렬했지만 종종 끝을 보지 못한 논쟁을 벌였다. IS에서 있던 그들 중에서 보다 굳건했던 인자들이 노르웨이에서 트로츠키의 비서로 활동했던 체첸 반대파 어윈 볼프(Erwin Wolf)(브라운)과 그 이전 터키와 프랑스에서 트로츠키의 비서였던 루돌프 클레멘트(Rudolph Klement)(아돌프)였다.

1936년 12월 20일의 한 편지에서, 로우스는 “스니블리에트가 바르셀로나에 왔을 때, 제4 인터내셔널의 사무국의 한 성원으로서의 지위에 있던 그는 POUM의 정치노선을 칭송하기 위하여 IS의 정치노선을 분명하고도 공공연하게 비난했다.”고 보고했다(같은 , [우리의 번역]). 베리켄 역시 POUM을 방어했다. POUM이 일부 “실책들”을 저질렀음을 베리칸이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실수들을 배신이라는 올바른 용어로 부르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이들 “실수들”에 대한 트로츠키의 “범죄적”이라는 비난에 그의 총구를 겨누었다. 닌과 그의 지지자들을 칭송하는 서문을 단 POUM의 기사가 베리켄의 신문에 실리자, 트로츠키는 편집국에 보내는 편지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6년 동안, 닌은 실수들 이외에는 한 것이 없다. 그는 사상을 가지고 농락했으며, 어려움들을 회피했다. 그는 전투를 작은 조합들로 대신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혁명정당의 건설을 방해했다. 그를 따르던 모든 지도자들이 똑같은 책임이 있다. 6년 동안, 그들은 스페인의 이 열정적이고 영웅적인 프롤레타리아트를 최악의 비참한 패배들로 이끌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왔다.... 얼마나 비참한가! 그리고 동지는 가짜 볼셰비키의 정식들로 스스로를 덮고 있는 멘셰비키 배신자들을 혹평하기는커녕 동지의 동의로 그것을 재생한다.

“POUM의 노동자들이 영웅적으로 싸웠다는 등의 이야기를 나에게 하지 말라.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다른 사람들만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전투와 그들의 희생이 우리로 하여금 진실, 그리고 진실만을 말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권모술수, 변덕, 모호함을 박살내라. 전쟁의 운명, 혁명의 운명이 달려 있을 때에 가장 쓰라린 진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닌의 정책뿐만 아니라 닌의 정책을 보호하거나 기만하거나 방어하는 어떤 자들과도 공통점이 없다.”

-“노동자투쟁(La Lutte Ouvriere) 편집국에 보냄” 1937년 3월 23일

트로츠키에 응답하면서, 베리켄은 “우리는 이 기사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무국과 프랑스 지부의 POUM에 대한 태도 일체를 종파주의이며 해로운 것이라고 간주하며, 강렬한 용어를 사용한다면 범죄적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베리켄, “스페인 혁명과 POUM과 관련한 올바른 정책을 위하여”, 정보통신, 1937년 7월에서 재출판됨)라고 격노했다. 베리켄은 볼셰비키 혁명의 교훈들을 거부하기 위한 닌의 편협한 정당화들을 재탕했다: “당은 의지에 따라 원하는 대로 수입되거나 수출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이 아니다. 스페인 혁명은 러시아 혁명이 ‘러시아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적’일 것이다.” 베리켄은 “사무국의 전체 활동은 POUM 외부에서의 혁명적 정당 건설로 향하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마침내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스페인에서 POUM은 혁명적 조직이라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맺었다.(같은)

불행하게도,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트로츠키가 개입할 수 없었고, POUM을 둘러싼 차이들에 관하여 결론이 날 때까지 투쟁할 수 없었던 것으로 인하여, IS 내부의 인자들은 처음에는 스니블리에트와 베리켄과 같은 POUM 옹호론자들의 압력 들쪽으로 기울었고, 분명하게 닌과 그의 동료들의 “비열함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 곳에서의 스페인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의 미약함으로 인하여 이것은 악화되었다. 이것들은 PSOE/JS 입당 문제를 둘러싸고 닌에 대항하여 트로츠키와 함께 했었던, 몇 안되던 ICE 중핵 중의 하나였던 그란디조 무니스(Grandizo Munis)가 1936년 10월에 돌아오면서 강화되었다. 당시까지도 압도적으로 많은 스페인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일관되어 있지 않았으며, 혁명적 정세에서 노동계급 대중조직에 맞닥뜨렸던 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도 간절하게 필요했던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적 지도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 반대하기 위한 주장이 아니다. 승리를 위한 결정적인 기구인 레닌주의 전위정당 건설을 목적으로, POUM, 무정부주의자들, 그리고 다른 노동자 정당들로부터 분리하여 혁명적 인자들을 재조직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첫 번째 임무였다. 그 대신에,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과 IS는 볼셰비키 정당이 건설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으로서 POUM 가입에 압도적으로 몰두했다.

1936년 8월 24일자 한 편지에서, 스페인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던 독일 이민자, 한스 데이비스 프로인드(Hans David Freund(Moulin/모울린))은 POUM을 “중도주의 정당”으로 서술했지만, “비록 우리가 POUM의 현재 지도부를 다른 것으로 바꿈으로서, 혹은 현재의 지도자들의 볼셰비키주의-레닌주의의 방향으로의 진화에 의해서 POUM의 볼셰비키화를 성취할 것인지에 대하여 예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POUM의 볼셰비키화를 향하여 활동해야만 한다.” (혁명적 역사, 4권, No. 1/2)고 결론을 내렸다. IS의 지지와 재촉을 받으면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분파적 권리를 가지는 POUM으로의 입당을 준비하기 위하여 시도했다.

그들의 첫 번째 탄원에 대한 닌의 대답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개별적으로만 가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과, “당신들은 반드시 당신들이 스스로를 해산하며 제4 인터내셔널의 출판물들이 되고자 하던 것들에 의해 우리 당에 대하여 수행되었던 비방과 명예훼손 캠페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닌이 바르셀로나의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1936년 11월 13일, 정보통신, 1937년 7월). 이 일 이후, SBLE는 1937년 4월 POUM 지도부를 격렬하게 논박하는 편지를 그들에게 보내면서 또 다른 가입을 위한 시도를 했다(정보통신, 1937년 7월). 1937년 7월에 정보통신에는 바르셀로나 5월의 나날들 이후 POUM에 대한 집중에 대하여 경고하는 트로츠키의 기사도 역시 출판되었다.

“POUM은 아직까지 카탈로니아의 조직으로 남아 있다. POUM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사회당 입당 때에는 빈곤한 비타협성으로 자신들의 근본적인 기회주의를 덮어 가리면서 입당을 막았다. 그러나 카탈로니아에서의 사태들이 사회당과 UGT 대오 내부에서 균열과 분리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것이 기대되고 있다. 이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돌아오는 수주일 안에 많이 줄어들게 될 POUM의 중핵들의 내부로 제한하는 것은 치명적일 것이다. 카탈로니아의 무정부주의 대중들, 다른 곳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대중들을 향하여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의 외형적 형식들을 보존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하여 지지의 새로운 지점들을 만들어내는 것의 문제이다.”

- “바르셀로나에서의 봉기(일부 서문들)”, 1937년 5월 12일

내전 첫 수개월만에 수천 명으로부터 3만 여명으로 성장했고, 트로츠키가 말했던 것 처럼, 그들의 좌익적 수사가 “스페인에 혁명정당이 존재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던” POUM의 조직원들에 대한 접근을 위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애써야 했던 것에는 의문이 없다(“좌익 중도주의의 죄목” 1939년 3월 10일). 두말할 것도 없이, 외부로부터 POUM의 대오에 접근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잠깐동안 지속될 기회를 낚아채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격동 속에서 대규모 정당들에 입당했으며,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관점과 원칙들을 채택하는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던 프랑스 전환의 시기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직면하고 있던 정세와는 완전히 달랐다.

POUM은 1936년 1월에 “좌익 선거협정”에 조인하면서 계급의 적에게로 넘어갔었다. 트로츠키가 강조하였듯이, POUM 대오 내부에 있는 혁명적 인자들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이러한 배신에 대한 “화해 불가능한 규탄”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했다. POUM에 이 협정을 거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입당 전술을 고려하는 것을 위해서 조차 유일하게 원칙적인 기초였다. 닌의 카탈로니아 인민전선정부 법무장관으로의 참여는 POUM의 원래의 배신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임이 명백했다. 비록 닌이 1936년 12월에 정부로부터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POUM의 전체 방침은 정부 재진입을 획득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채로 있었다. 심지어 분파적 권리를 가지면서 조차 POUM에 합류하는 것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POUM의 규율에 종속시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1936-37년 스페인에서의 배신이었을 것이다. POUM에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위한 장소는 없었다. 트로츠키는 이후 스니블리에트와 베리켄에 대한 논박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베리켄이 문제를 분파로서 존재할 단순한 권리로 축소하는 것은 단지 그가 중도주의와 맑스주의 사이의 경계선을 완전히 지워버렸음을 보여줄 따름이다. 진정한 맑스주의자라면 하게 될 말이 여기 있다. ‘POUM에는 민주주의가 없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곳에는 우익을 위한, 중도주의자들을 위한, 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민주주의는 있지만,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을 위한 민주주의는 없다.’ 즉, POUM에 있는 민주주의의 범위는 근본적으로 혁명적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그들의 중도주의적 정책의 실제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

- “스페인에서의 경험을 통한 사상들과 개인들에 대한 테스트” 1937년 8월 24일

소규모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이 당면했던 임무는 POUM과 무정부주의 생디칼리스트들뿐만 아니라 사회당이나 공산당 출신의 좌익 인자들을 재편하는 것을 통하여 전위정당의 중핵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지렛대의 받침으로서의 그러한 중핵을 건설함으로써만 오로지 혁명적 노동자 대중을 그들의 잘못된 지도자들로부터 분리하기 위하여 지렛대를 사용할 수 있었다. 공동전선의 전술은 노동계급적 기초와 개량주의, 중도주의,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 경향들의 지도부 사이의 모순들을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반동의 공세에 맞서는 행동의 통일과 다른 노동자 조직들의 배신을 폭로하는데 있어서 비판의 자유라는 조합은 트로츠키주의라는 정치적 주장들을 생생한 현실 속으로 옮기는 것에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SBLE는 또한 인민전선에 반대하는 투쟁을 지도하기 위한 POUM과 CNT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선”에 대한 호소와 함께 강령적으로 POUM의 방향으로 휘었다. 1937년 2월의 한 전단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인민전선에 의해 대표되는 신성한 통일에 반대하여 일어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긴급하게 필요하다....

“극좌에서 강력한 조직들로서, POUM과 CNT는 반드시 혁명적 전선을 선도해야만 한다. 혁명적 전선의 목적뿐만 아니라 재앙적인 인민전선 정책을 거부하는 모든 노동자 조직들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도 분명하게 수립되어야만 한다.”

- SBLE 전단, “CNT, POUM, FAI, JJ.LL.(청년 해방주의자들)의 노동자들 - 모든 프롤레타리아트”, 귈라몬의 Documentacion(ICL의 번역)

SBLE의 슬로건은 POUM의 “혁명적 노동자 전선” 호소에 대한 직접적인 메아리였는데, 이 “혁명적 노동자 전선” 슬로건을 통해서 닌은 카탈로니아 정부에 다시 참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CNT 지도자들과의 정치협정을 감추고자 했다.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된 혁명적 전선은 소비에트의 창설을 통해서만, 그리고 혁명정당의 지도력 하에서만 오직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POUM과는 달리, SBLE는 소비에트를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와 별개의, CNT와 POUM의 지도력 하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전선”에 대한 요구는 단지 무정부주의와 중도주의의 잘못된 지도자들에 대한 환상만을 만들어 줄 수 있었을 뿐이었다.

1937년 1월 멕시코에 도착한 이후, 트로츠키는 스페인에 관한 그의 저작을 다시 시작했는데, 그것들 중 많은 것들이 POUM 옹호론자들에 대한 논박들이었다. IS에 있던 클레멘트와 볼프가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도부의 친POUM 기회주의를 다루기 위한 초기의 어설픈 시도들에서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1937년 5월의 한 IS 모임에서 베리켄과의 격렬한 투쟁이 있었고, 내부 통신에 그에 대한 비판을 출판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 스니블리에트에 대한 초기 동의에 대한 자기 비판적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결의안은 “IS는 [네덜란드]RSAP가 이들 차이들에 대한 국제적인 토론을 수용하도록 납득시키기 위하여 헛되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것을 후회한다”고 인정했다. 나중에 스페인에서 소식을 전하면서 볼프는 “IS의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침묵과 동요”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썼다. “POUM은 교묘하게 제4 인터내셔널의 각기 다른 지부들 사이의 차이를 활용했고, 스페인 BL의 주장의 힘을 약화시켰다.”고 썼다(볼프, “내부 보고서” 1937년 7월 6-7, Documentacion[우리의 번역]). 볼프는 또한 “과거에, 우리는 POUM에 거의 배타적으로 집중했다. 혁명적 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은 ‘두루티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자주 잊혀졌다.”(같은 )고 인정했다. 마침내 “스페인의 현 정세와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임무들에 대한 제4 인터내셔널 국제사무국의 결의안들”(날짜 없음)에, 독립적인 정당을 건설할 필요성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 등장했다.

“제4 인터내셔널의 새로운 혁명적 지도부 건설의 임무는 POUM 지도부의 조언자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제4 인터내셔널 운동의 노선과 강령에 기초하여 노동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 정보통신, 1937년 7월에 재출판됨

IS가 스페인으로 가고자하는 다른 중핵을 찾지 못하자 자진해서 스페인으로 갔던 볼프는 잠시 후에 스페인에 있던 스탈린주의 GPU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프로인드(모울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음 해에 클레멘트 역시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바르셀로나 봉기

POUM의 배신의 마지막 장은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의 거리에서 펼쳐졌다. 4월 14일, 가엾은 부르주아지 정부의 공화국 창립 기념이 도시 노동계급 여성들에 의한 거대한 식량폭동으로 범벅이 되었다. 4월 29일에는, 휴고 오일러가 그의 1937년 목격담인 “바르셀로나의 바리케이드들”(혁명적 역사 1권 2호, 1988년 여름에 재출판 됨)에서 보고하듯이, 자치정부는 “자치 위원회에 직접적으로 기초하고 있지 않은” 모든 조직들은 “현재 카탈로니아가 겪고 있는 불안정과 공포를 신속하게 없앨 수 있도록 거리로부터 즉각적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같은 ). CNT, UGT, PSUC 그리고 POUM은 책임감 있게도 그들의 메이데이 시위를 취소했다. 5월 3일, 스탈린주의자들이 이끌던 강습부대가 CNT 노동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텔레포니카를 공격했고, 바르셀로나와 교외 전체에서 바리케이드들이 세워졌다.

SBLE는 바리케이드를 지키던 CNT와 POUM 조직원들에게 혁명적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투쟁했다. 1937년 5월 4일 그들의 전단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혁명적 공세”를 취할 것과 상점, 공장, 지구들에 “혁명적 방어위원회들”를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정보통신 1937년 7월에 재출판). 하지만 POUM의 한 전단은 노동자들이 이미 반혁명적 도발을 패퇴시켰기 때문에 “퇴각이 필요하다”로 주장했다(같은 ). 거리로부터 정부 군대들의 철수와 노동계급이 무장을 유지할 것을 호소하면서, POUM은 “이들 완전히 수긍할 만한 조건들의 성취가 투쟁을 끝낼 수 있게 해준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 계급과 스탈린주의 부르주아지 똘마니들은 이들 “완전하게 수긍할 만한 조건들”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OUM 지도자들은 “투쟁을 끝내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했다.

혼란과 사기 저하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또 다시 바리케이드들로 되돌아갔다. 오엘러의 보고에 따르면, 5월 5일 수요일에는 경찰의 잔혹성에 분노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시 새로와진 에너지와 분노로 계급의 적을 공격했다.” 기관총, 탱크, 소구경 포로 무장한 두루티 부대의 한 지부와 약 500명의 POUM 병사들이 바리케이드에 있는 자신들의 동지들에 합류하기 위하여 아라곤 전선을 떠났지만, 전투가 끝났다는 거짓말에 되돌아갔다. 바로 그날, 두루티의 친구들 또한 아래와 같이 선포하는 전단을 바리케이드들에 배포했다.

“노동자들! 혁명적 준타[소비에트]. 범죄자를 사살하라. 무장 군대를 무장해제 하라. 경제를 사회화하라. 노동자 계급에 반항해온 정치정당들을 해산시키라. 우리는 거리들을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 다른 모든 것보다도 혁명. 우리는 거리에서 우리와 우호적이었던 POUM 출신의 우리 동지들을 환영한다. 사회주의 혁명 만세! 반혁명을 타도하자!”

- 귈라몬, 두루티의 친구들 그룹: 1937-1939로부터 인용됨

그러나 두루티 그룹은 계속해서 CNT 지도부에 희망을 걸었고, CNT와 POUM이 권력을 위한 투쟁을 거부하자 두루티 그룹 스스로가 혼란에 빠졌다. 5월 5일, SBLE의 대표들이 공동 실천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하여 두루티의 친구들과 만났으나 허사였다.

5월 6일, 오엘러는 아래와 같이 전한다.

“오늘 아침 Solidaridad Obrera(CNT)는 ‘CNT와 UGT 양자 모두는 일터에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고 선언했다. 똑같은 호는 두루티의 친구들의 전단에 대한 모든 책임을 거부했다. 라 바탈라(POUM)가 나타나서는 다음과 같은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적인 까마귀 울음소리를 냈다. ‘반혁명적 기도들이 분쇄된 지금은 투쟁로부터 철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자들, 일터로 복귀하라.’ ... 팔콘 호텔(POUM의 총지휘부 자리) 옆에 있던 바리케이드들에 있던 POUM 노동자들은 이 전단을 보자 분노하여 자신들의 자리들을 떠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배신자들로 비난했다. Soli로 불리던 CNT 신문의 목요일자는 많은 바리케이드들에서 그 이전 호의 신문들처럼 불에 태워졌다.”

- 오일러, 인용된 같은 으로부터

그날, POUM의 지도자들은 온순하게 라 바탈라 사무실들을 경찰에게 넘겨주었으며, 추앙 받던 좌익 무정부주의자 카밀로 베르네리의 살해된 시신이 거리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는 다시 나타난 백색테러의 첫 번째 희생자들 중의 하나였다. 수 주일이 지나지 않아 안드레스 닌도 역시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그에게 호의적인 전투원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체포가 임박했다는 경고를 마음에 새겨두는 것을 거부하던, 그는 끝까지 인민전선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장 안드라데는 “우리들 중 누구도 상황이 우리의 체포를 감수해야 할 정도로 충분히 심각하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고 언급했다(프래이서, 피의스페인).

오엘러는 SBLE의 POUM 가입 시도들에 대하여 볼셰비키 지도자인 트로츠키를 잘못 비난하면서 그의 “청산주의”를 비난하는 것으로 그의 평가의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오엘러는 자기 자신의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이것은 POUM에 대한 지극히 실제적인 정치적 책임이다. 1934-35년 프랑스 전환에 반대하는 오엘러의 닌과의 썩은 블럭은 닌이 POUM 속으로 스페인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을 청산할 때 닌에게 좌익 정치적 위장막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5월의 나날들의 시기에, 오엘러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호제 리벌(Jose Rebull)의 72 소조라는 POUM 내부에 있던 반대파 그룹과 제휴했다. 오엘러의 혁명적 노동자 동맹이 출판했던 1937년 4월 16일 오엘러의 가명으로 보이는 “에드워드 올리버(Edward H. Oliver)의 목격담”은 “그 목적(sic)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인 조직들”로서 POUM, CNT, 그리고 FAI가 “대중들을 획득하기 위한 시도 속에서 혁명적 공동전선을 조직”할 것을 호소했던 바르셀로나 POUM 지역위원회의 결의안을 무비판적으로 칭송했다.(올리버, “바르셀로나 스페인 공화국의 6번째 기념식”, 1937년 4월 16일 자로 되어있음). 올리버에 따르면, 이 결의안은 “자치정부의 위기에 대한 최초의 명확한 노동자들의 해법”을 제공했다(같은).

리벌은 POUM의 모든 배신들의 처음부터 끝까지에 걸쳐 POUM에 남아 있었다. 5월의 나날들 직후에 리벌은 POUM의 통치상의 슬로건에 대한 솔직한 비평을 저술했는데, 바리케이드들을 해체하고 봉기를 파괴시킨 것에 있어서의 POUM의 역할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리벌, “‘UGT-CNT 정부’의 슬로건에 대하여”, 1937년 5월을 보시오. 혁명적역사 4권 1/2호에서 재출판)

피어 브루에: “객관성”으로 표현된 패배주의

에밀 테밈(Emile Temime)과 공동으로 저술한 스페인 내전의 역사에서, 피어 브루에(Pierre Broue)는 바르셀로나의 5월의 나날에서의 POUM의 역할에 대하여 교묘하게 속이고 있는데, 본질적으로는 사태들에 대한 닌/안드라데 버전을 퍼뜨리고 있다.

“5월 6일 목요일이 되면서 질서가 거의 회복되었다. 컴패니스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고 선언했다. 바르셀로나의 노동자 대중들은 평온에 대한 호소를 들었고, POUM은 후퇴했다. POUM은 ‘프롤레타리아트는 반혁명에 대한 부분적 승리를 거두었다.... 노동자들, 일터로 복귀하라’고 선언했다.”

- 브루에와 테밈, 스페인에서의 혁명과 내전(캠브리지, 메사츄세츠: MIT 출판사, 1970)

노동자들에 의한 후퇴에도 불구하고 “물러서기는” 커녕, POUM 스스로가 바탈라(1937년 5월 8일)에서 “정상 상태를 회복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기여를 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을 떠벌렸다(오엘러, “바르셀로나의 바리케이드들”에서 인용). 반대로, 레닌주의 전위였다면 이들 봉기에 나선 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을 그들의 배신자들로부터 분리하고 권력을 위한 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순간을 움켜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닌과 그 도당은 노동자들에게 “물러 설 것”을 명령하는 데 있어서 CNT/FAI의 배신자들과 함께 했던 중도주의 투항주의자 집단이었다.

브루에와 테밈은 POUM의 인민전선 가입을 암묵적으로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스페인 혁명가들은 고립되었음을 느꼈다”라고 쓴다. 소련에서의 스탈린주의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들, 독일에서 파시즘의 승리, 그리고 다른 곳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추정에 따른 수동성을 지적하면서, 그들은 “1936년에 세계적인 힘의 균형은 1917-1919년에 러시아 혁명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페인 혁명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아래와 같이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한다.

“물론 그들이 가졌던 대담한 혁명적 정책으로 이러한 고립을 상쇄할 기회들에 대하여 끊없는 토론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트로츠키가 그랬던 것처럼, 스페인 혁명은 세계적인 힘의 균형을 뒤집을 가능성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이며, 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 정확하게 스페인 혁명의 패배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립감이 스페인 혁명가들의 태도를 결정했던 요소들 중의 하나였으며, 그들 중 다수가 혁명을 지속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같은

브루에와 테밈은 바르셀로나 5월의 나날들에 대한 자신들의 평가를 마무리하면서 이 주제로 되돌아온다.

“물론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의 즉자적인 반응이 새로운 혁명적 추진력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었을 것이며, 반대로 척척 진행되도록 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역사가들은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POUM의 무정부주의자들은 그들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고 단지 말할 수 있을 뿐이다.”

- 같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같이, 스페인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의 승리는 당시 무르익어 가고 있던 2차 세계 대전으로의 경로를 뒤집으면서, 전세계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1936년에 프랑스는 준 혁명적 정세에 휘말려 있었고, 벨기에에서는 거대한 파업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유럽 전역에서 독일 히틀러 나찌의 승리가 노동계급 내에서의 좌익적 실천의 증가를 강제했었다. 1934년 미국 노동자당이 지도했던 톨레도 오토-라이트 파업, 미니에폴리스에서 있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지도했던 팀스터스 파업들, 그리고 공산당 지지자들이 지도했던 샌프란시스코 항만노동자들의 11주 동안의 파업 등 3대 주요 파업들이 계급적 전투들을 위한 기초를 놓았고, 이것이 그 뒤 수년만에 CIO를 만들어 냈다. 혁명적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를 진압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했으며,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에 대한 관료의 정치적 장악력에 대한 어떠한 인지된 도전에 대해서도 피로 물들였던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서구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소비에트 대중들을 소생시키게 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1937년 8월 24일자의 한 글에서, 트로츠키는 바르셀로나의 5월의 나날들 동안에 권력을 위한 투쟁은 순전히 “모험주의”였을 것이라는 베리켄의 주장에 답을 했다. 트로츠키의 말들은 브루에의 전투보다 상위에 있던 시건방진 “객관성”에 대한 응답으로도 또한 복무한다.

“1936년 7월에 실제로 권력을 장악했던 것처럼, 1937년 5월에 만약 카탈로니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했더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스페인 전역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부르주아지-스탈린주의 반동은 카탈로니아 노동자들을 분쇄하기 위하여 2개의 정권들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코가 점령했던 영토에서,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들도 카탈로니아 프롤레타리아트를 향하여 돌아섰을 것이며, 파시스트 군대를 고립시켰을 것이고, 당연히 파시스트 군대의 해산을 낳았을 것이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외국정부가 스페인이라는 가장 첨예한 땅에 자기 정권을 내던지는 모험을 감내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개입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극도로 위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모든 봉기에서는 자연스럽게 불확실하고 위험한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사태의 경로가 패배의 경우에 있어서 조차도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황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혁명정당이 있었다면 혁명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스페인에서의 경험을 통한 사상과 개인에 대한 테스트”

혁명적 지도부를 위한 투쟁

앤디 더간은 볼셰비키 지도자 트로츠키가 “혁명적 정세에서 올바른 정치노선이 가장 작은 규모의 그룹들조차도 노동계급의 지도부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고 주장하면서 “거의 천년왕국을 신봉하는 구세주주의적인” 정치적 관점이라고 그를 혹평한다(더간, “트로츠키와 POUM”). 혁명적 정세가 무르익었던 때에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조직들과 비교하여 작은 규모의 스페인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에게 분명히 어려움들이 있었다. 그러나 혁명적역사의 박식한 학자들과는 달리, 트로츠키는 주위환경과 무관하게 레닌주의 전위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이 필사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다른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은 패배를 미리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노동자 운동과 혁명적 투쟁의 역사에 대한 평가는 자기 자신의 강령적 전망에 달려있다. 1930년대 스페인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승리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자들은 스스로가 노동계급의 권력장악을 위한 투쟁을 포기했다는 입장으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가능성의 정치”에 - 예를 들면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개량주의적 수용 - 대한 그들 자신의 무기력한 탐닉으로 과거를 곡해한다. 이렇게 해서, 혁명적역사라는 패거리는 마찬가지로 1923년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부정하는데, 이 경우에는 브란들러 하에 있던 독일공산당 지도부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그렇게 한다(“볼셰비키주의를 재무장하면서: 1923년 독일과 코민테른에 대한 한 트로츠키주의자의 비판”을 보시오 스파르타시스트 56호, 2001년 봄)[독자들은 이 문서의 한글본을 국제공산주의동맹 웹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다]

자신의 팜플렛 10월의교훈들(1924년)에서 트로츠키는 만약 러시아 혁명이 실패했었더라면 비슷한 주장들이 제기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왜 독일에서 노동자 혁명은 불가능했었는가에 관하여 1923년에 제기되었던 수많은 “객관적인” 주장들을 폭로하고 논박했다. 트로츠키는 1940년 8월, 빅토르 서지와 기타 “POUM의 변호인들”에 맞서 스페인에서의 혁명적 전망을 방어하는 논쟁에서 이 지점을 되풀이했다. “스페인 대중들의 패배에 대한 책임이 대중들의 혁명적 운동을 마비시키거나 단순히 분쇄했던 정당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에게 있다는 것에 역사에 대한 왜곡이 있다”(“계급, 당, 그리고 지도부”). 1936년에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는 1917년 초기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던 것보다 더 높은 단계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만약 레닌이 국가권력 장악을 위하여 볼셰비키 당을 정치적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투쟁들을 러시아에서 수행하지 않았었다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는 있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소비에트들은 반혁명에 의해 분쇄되었을 것이고, 모든 나라들의 몇 않되는 박식한 자들이 오직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가들만이 러시아에서 수적으로 너무도 작고 너무도 성숙하지 못했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꿈꿀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기조로 하는 글들과 책들을 썼을 것이다”라고 썼다(같은).

스페인의 교훈들은 비싼 값을 치렀다. 우리 국제공산주의동맹이 1989-90년 동독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DDR)에서 있었던 맹아적 정치혁명에 개입했을 때, 우리는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정치적 문제와 약점들을 학습하고 이것들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굉장히 다르기는 했지만(하나는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대항하는 전투였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지배의 복구에 맞서는 투쟁이었다), 모두 다 혁명적 정세들이었다. 비록 우리가 국제전화와 팩스 통신, 그리고 서독에 확립된 지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이점들에도 불구하고, SBLE과 제4 인터내셔널 운동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세력은 적었다. 그러나 중심적인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정치적 명확성, 응집성, 그리고 볼셰비키주의의 강령을 위한 가차없은 정치투쟁이었다. 이 측면에서, “비록 작은 그룹이라도 만약 올바른 진단과 시기 적절한 때에 올바른 슬로건들을 제기한다면, 짧은 시간 안에 거대한 세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정확하게 혁명적 정세의 이점이 있다”(“혁명의 성격”, 1931년 6월 18일)는 트로츠키의 스페인에 관한 저작들 속에 있는 그의 이해에 따랐다.

우리는 일간으로 출발하여 주간으로 바뀌었던, 동독에서 수만 부씩 배포되었던 Arbeiterpresskorrespondenz(노동자신문통신)이라는 신문을 만들었다. 우리는 다양한 트로츠키주의인 양하는 자들에 대항하는 논쟁에 충당되었던 특별호를 포함하여 이론적이고 논쟁적인 선전으로 우리의 지지자들을 무장시켰다.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서는 처음으로, 우리는 소비에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 그들의 기원에 대한 1936년 트로츠키의 통렬한 분석인 배반당한혁명을 포함하여 트로츠키 저작들이 공개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우리의 트로츠키주의 강령의 충격은 히틀러의 나찌로부터의 독일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사망했던 소비에트 병사들을 형상화한 기념탑에 대한 파시스트의 모독에 맞서는 동베를린 트레프토브 공원에서 있었던 25만 명 규모의 1990년 1월 3일 공동전선 시위에서 보여졌다. 이것은 동독과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를 방어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동독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으로의 조직화였다. 우리가 이 시위에 대한 호소를 선도했다. 그리고 나서는, 우리의 강령이 동독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동조를 받는지를 두려워 하고는 자신들의 기반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던 스탈린주의 지배당은 우리가 호소했던 시위를 제기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동지들이 트레프토브의 연단에서 연설했는데, 이것은 트로츠키의 소련으로부터의 추방 이래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퇴행화되거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서 대중연설을 했던 최초의 경우였다. 고르바쵸프 하의 소비에트 관료집안으로부터 진행 신호(파란불)을 받은 서독 제국주의자들은 동독을 편입하려는 목적을 가진 최대한의 캠페인으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의 유령에 대응했다. 우리는 이 총공격에 맞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투쟁했다. 그리고 그 투쟁을 통하여 우리는 미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들을 위한 기초를 놓는데 일조 했다.

스페인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권력을 위한 투쟁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몇 않되는 세력들, 일천한 경험으로, 그리고 트로츠키의 말에 의하면, “우리 시대 계급투쟁의 화해 불가능하고 잔혹한 성격에 대한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현학적 반영인”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함에 있어서 가차없는 태도와 동요들에 맞서는 격렬한 논쟁” 속에서 충분히 단련되지 못한 채 혁명적 파도의 물결에 휩쓸렸다(“좌익 중도주의의 죄목”). 우리가 스페인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 속에서 목숨을 바쳤던 (상당수가 스탈린의 자객에 의한 것이었다) 어윈 볼프, 루돌프 클레멘트, 그리고 다른 트로츠키주의자들에 경의를 표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과거의 배신들에 대하여 변명하고 그래서 미래의 새로운 배신들을 준비하는 기회주의자들을 규탄하고 논박한다. 이것은 새로운 10월들을 위한 투쟁을 지도하기 위한 트로츠키주의 제4 인터내셔널을 재건설하기 위한 필수적인 부분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