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트로츠키의 영구혁명 이론의 발전과 확장
1부
이번 달은 V.I. 레닌과 레온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당이 지도했던 러시아 혁명 90년을 기념하는 달이다. 10월 혁명은 20세기를 규정하는 사건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살육에 특히 자극을 받은 노동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하면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그렇게 하면서, 러시아의 다민족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 착취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봉건적 폭정과 제국주의 노예상태를 몰아내는데 있어서 농민과 소수민족들, 그리고 모든 피억압자들을 지도했다.
신생 노동자 국가는 농경혁명을 수행했으며, 인민을 가두던 짜르의 감옥에 있던 모든 민족들의 자기 결정권을 승인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러시아를 제국주의 사이의 세계대전으로부터 철수하게 했으며, 다른 나라들에 있는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이 볼셰비키의 예를 따르기 위해 노력하도록 고무했다. 1919년 초대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제3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국제적으로 지도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0월 혁명은 트로츠키에 의해 전개되었던 영구혁명의 이론과 전망에 대한 간담 서늘한 확증이었다. 그의 1906년 저작 결과들과 전망들에서, 트로츠키는 러시아의 경제적 낙후성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이미 사회주의를 향해 무르익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일부였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연장된 기간 없이 바로 권력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개진했다. 참으로, 만약 러시아가 봉건적 과거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면, 노동자들이 권력에 올라야만 했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의 강령이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모든 종류의 타협에 반대하는 강령적으로 단련되고 검증을 거친 전위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레닌의 불굴의 투쟁과 함께 했던 것이 1917년 볼셰비키의 성공의 핵심이었다.
결과들과 전망들이 등장하기 직전,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짜르 제국을 기초들로까지 뒤흔들었었으며, 혁명적 발전의 미래 경로에 관한 격렬한 논쟁을 전면에 부상시켰다. 러시아는 제국주의 열강이었으나 또한 절대왕조와 그것을 단단하게 둘러싸고 있는 지주귀족들,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운영되는 거대한 러시아 정교회에 짓눌려 있던 제국주의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이기도 했다.
17세기 영국과 18세기 프랑스의 젊고 역동적인 부르주아지 계급들은 비슷했던 자본주의 발전의 봉건적 족쇄들을 일소하고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를 발생시켰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들에서 도시와 지방 민중의 선두에 섰었다. 그러나 뒤늦게 등장한, 외국 산업가들과 은행가들에 종속적이었고 귀족들과 수많은 실들로 연결되어 있던 러시아 부르주아지 계급은 약했고 비겁했으며, 노동자와 농민 대중이 짜르 전제에 맞서 일어서게 되는 경우 자기 자신이 일소될 것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모순을 설명하면서, 트로츠키는 그의 1939년 8월의 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세 가지 생각들"("세 가지 생각들"로서도 역시 알려진)에서 후에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러시아에서 민주주의 혁명의 완전한 승리는 농민에 스스로를 기초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형식 말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불가피하게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임무들을 일정에 올리게 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동시에 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강력한 추진력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서구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만이 부르주아지 계급의 복귀로부터 러시아를 막아줄 것이며, 사회주의 건설을 그것의 결론으로까지 가져갈 가능성을 러시아에게 보장해 줄 것이다."
볼셰비키들이 예측했듯이, 10월 혁명은 유럽에서, 특히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격변들과 아시아와 기타 지역에서의 반(反) 식민지 민족해방 투쟁들을 고무했다. 그러나 혁명적 격동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어느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에 오르지 못했다. 제국주의 전쟁과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 후 몇 달 만에 발생했던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의해 기진맥진해진 러시아는 고립된 채 남아 있었다. 엄청난 물질적 빈궁이라는 조건들이 관료주의를 향한 강력한 객관적인 압력들을 만들어냈다. 1923년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예외적인 기회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재안정화를 허용했고 소비에트 노동자들 사이에서 깊은 사기저하를 야기했다. 이것이 정치적 반혁명과 조세프 스탈린 주변에서 특권화된 관료계층의 성장을 촉진했다.
1924년 후반에, 스탈린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교조를 공표했다. 이것은 사회주의 - 물질적 풍요의 무계급 사회 - 는 적어도 몇 개의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들을 필요로 하는 가장 현대화된 기술과 국제적인 노동 분할의 기초에서만 오로지 건설될 수 있다는 맑스주의적 이해를 조롱했다. 스탈린과 그의 똘마니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를 억압했고, 세계 제국주의가 소련을 홀로 내버려두도록 납득시키겠다는 희망에서 외국에서의 혁명적 가능성들을 교살시키면서 수년 동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조직자로부터 그것의 정반대의 것으로 변형시켰다.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와 코민테른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퇴행이 반대 없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라는 볼셰비키의 기치를 치켜들면서,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민족주의적 교조에 맞서 투쟁했다.
수십 년의 스탈린주의의 배신, 거짓말들 그리고 관료적 오행정이 결국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던 자본주의 복귀 세력들에게 대문을 열어주었고, 이것은 1991-92년에 소비에트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의 반혁명적 전복에서 절정에 달했다. 10월 혁명에 의해 건설된 노동자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즉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위대한 성공과 제국주의의 가장 처참한 패배를 학습하는 것은 계급의식적 노동자들과 좌익 지식인들에 여전히 핵심적이다.
짜르 러시아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남아프리카까지
트로츠키는 짜르 러시아와 관련하여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다. 그러나 러시아를 1917년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장악을 위해 무르익도록 만들었던 조건들이 제국주의 자본주의가 자신의 촉수를 지구의 훨씬 더 구석진 지역들로까지 확장하면서 훨씬 후진적인 식민지와 반(半)식민지 국가들에서 폭넓은 틀거리들에서 되풀이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이것은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 신생 도시 프롤레타리아트가 등장했던 중국에서 결정적으로 목격되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혁명과는 달리, 1925-27년의 중국 혁명은 처절하게 패배했다. 우리가 이 글의 보다 뒷 부분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처럼, 결정적인 이유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위해 투쟁하고 농민 대중을 지도하는 대신에 부르주아지 계급에게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레닌 이후의 제3 인터내셔널(1928)과 영구혁명(1929)에서 당시의 패배의 교훈을 도출하면서, 트로츠키는 제국주의 시대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뒤늦은 모든 국가들에게로 영구혁명의 이론을 일반화시켰다.
이 혁명적 전망의 정당성이 이후 수십 년 동안 반복해서 증명되었다. 영웅적이고 지난한 민족해방 투쟁들을 거치는 것을 포함하여, 수십 개의 과거 식민지들이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성취했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맑스주의 유물론의 법칙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결여되어 있다면 제국주의 지배와 엄청난 빈곤의 멍에로부터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제국주의의 명령을 받는 신자유주의적 긴축에 대한 혐오가 베네주엘라의 휴고 차베스에서 멕시코의 로페즈(Andres Manuel Lopez Obrador)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민중주의자들의 새로운 층에 대한 지지로 이끌려왔다. 그들의 "반-제국주의"와 심지어 "사회주의"라는 수사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들은 세계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종속을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자본주의 질서의 방어를 위해 행동한다.
혹은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남아프리카를 보자. 제국주의 착취의 옹호자들이 공식적으로 공산주의 사망을 공표했던 시기에, 유별나게 남아프리카의 수만 명의 노동계급 투사들은 10월 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의 상징인 망치와 낫의 붉은색 깃발 주위에 계속해서 결집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공산당(SACP)은 10월 혁명의 교훈들, 즉 중심적으로 모든 부르주아지 계급 세력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권력과 혁명적 국제주의를 위한 투쟁을 수행할 전위당의 필요성을 유린한다.
1994년에, 넬슨 만델라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가 이끌었던 정부 선거는 수십 년 동안의 백인 우월주의 지배의 종식을 의미했다. Sharpeville와 Soweto의 순교자들과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투쟁에서 그들의 목숨을 바쳤던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의 이름으로 ANC는 흑인과 다른 비(非)백인 대중들이 더 이상 인종차별, 지위격하, 살인적인 억압, 그리고 무겁게 짓누르는 가난에 처해지지 않을 해방의 새로운 시대를 공표했다. 그러나 현실은 ANC가 지도하는 정부가 구 정권과 똑 같은 사회적 기초에 기반하여 신-아파르트헤이트 자본주의를 관장하는 것이다: 극소수의 엄청나게 부유한 백인 자본가 착취자들(비록 지금은 표면에 내세우는 몇 되지 않는 흑인들을 포함하지만)에 의한 압도적 다수 흑인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잔인한 착취.
오래 동안 ANC와 동맹했고 그것의 한 구성부분이었던 SACP는 사회주의로 성장하게 될 "민족민주주의 혁명"의 도래를 환영했다.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던 - 흑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거대한 사회적 힘을 증명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지배의 조종을 알렸던 치열한 노동 투쟁들 속에서 건설된 - 남아프리카 노동조합회의(COSATU)의 지도부는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 ANC와의 삼자동맹에 있던 SACP에 합류했다. 그리고 13년 동안 부르주아지 삼자동맹 정부는 노동자들의 파업들을 파괴하며, 반항적인 유색인 지정지구의 젊은이들에게 경찰들을 푼다. 흑인 아프리카 대중들은 사회의 그리고 민족의 해방에 더욱 접근해 있지 않으며, 사회주의에는 더더욱 그렇지 않다.
1905년 혁명 전야의 러시아
(1908년에서 1909년에 쓴) 그의 책 1905에서, 트로츠키는 20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러시아의 엄청난 모순들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유럽에서 가장 집중화된 산업은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농업에 기초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기구가 자기 나라의 역사적 진보를 지체시키기 위하여 근대 기술진보의 모든 성과들을 활용하고 있다." 유럽(주로 프랑스)으로부터의 투자가 세인트 페테르스부르크, 모스크바 그리고 우랄 지역 도시들에 거대한 규모의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와 가장 앞선 산업적 집중들을 창출했다. 이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러시아 인구의 10% 미만을 이루고 있었던 반면, 경제적으로 전략적인 기업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1000명 이상을 고용하는 공장들에 고용된 러시아 노동자들의 백분율은 영국, 독일 혹은 미국에서보다 높았다. 그러나 모든 유럽 열강들의 반혁명적 경관이었던 러시아의 짜르 전제는 과거의 시대에서 살면서 숨쉬고 있던 특권 지주계급들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한 "불균등 결합발전"의 조건들이 제국주의 시대에 가장 후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조차 프롤레타리아트를 유일하게 혁명적인 세력으로 만든다.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의 성장 중인 자본주의 경험을 단순하게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에 관한 세 가지 생각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러시아의 발전은 무엇보다도 후진성에 의해 특징지어졌다. 그러나 역사적 후진성은 선진 국가들의 발전의 단지 한 세기 혹은 두 세기 뒤늦은 단순한 재생산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술과 구조의 최신의 자본주의적 성과들이 봉건적, 전(前)봉건적 야만주의의 관계들 속으로, 그것을 변형시키고 그것에 복종하면서, 그리고 계급들 간의 기괴한 상호관계를 창출하면서, 스스로를 뿌리내리는 완전히 새로운 '결합된' 사회적 구조를 발생시킨다."
1905년 혁명의 즉각적인 전조는 1904년 후반 만주에 있는 아더 항에 있던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초기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패배였다. 이것이 보다 많은 시민적 자유를 소심하게 주장하도록 부르주아지 자유주의자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바로 아래에 더 큰 세력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것들이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오전에 터지게 되었다. 성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대단위 푸틸로프 금속 공장에서의 대량 해고에 대항한 1월 3일 파업이 확대되자, 러시아 정교회의 급진적 성직자인 가퐁 신부가 지도하던 합법 노동 조직이 짜르에게 하루 8시간 노동, 교회와 국가의 분리, 그리고 제헌의회를 포함하는 개혁들을 겸허하게 탄원하기 위한 행진을 조직하는 것으로 점증하던 계급 대결을 흐트러뜨리려고 시도했다.
일요일 정장을 입은 10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군주가 있던 겨울 궁전을 향해 출발했다. 피의 일요일로 알려지게 된 날에 짜르는 군대에 발포를 명령했다. 1000명 이상이 학살당했고, 거의 4000명이 부상당했다. 러시아가 폭발했다. 1905년 10월까지, 엄청난 일련의 파업들이 철도 총파업과 11월 트로츠키를 의장으로 선출했던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위원회(소비에트)의 형성에서 절정에 달했다.
격변을 진정시키기 위한 시도로서, 짜르는 헌법과 제한적인 입법부를 허용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적인 힘에 겁에 질린 부르주아지 계급은 열정적으로 선언을 환영했고, 공공연한 반혁명 캠프에 합류했다. 동시에 짜르는 검은 백인조라는 반동들을 풀어서 전국적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약 4000명의 유대인들이 살해당했고, 1만 명 정도가 불구가 되었다. 무장 방어대를 조직했던 다양한 사회주의 조직들이 혁명을 일탈시키기 위한 이 시도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했다. 산업 노동자들, 특히 러시아 철도 노동자들이 유대인들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의미심장하게도 성 페테레스부르크에서는 유대인 학살이 없었는데, 이것은 노동계급이 유대인을 방어하는데 있어서 미리 자신들의 단호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는 총파업이 도시 전역에서 바리케이드들에서의 격전을 동반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봉기로 성장했다. 레닌은 12월 7일에서 19일까지의 모스크바 봉기를 혁명의 절정으로 생각했다. 봉기의 단호함이 짜르 군대들의 충성심을 침식했다. 봉기를 진압하고 노동자들의 투쟁 단위들을 분쇄하는데 일주일 이상이 걸렸다. 1000명 이상이 죽었고, 체포와 처형의 광풍이 뒤따랐다.
성 페테르스부르크 소비에트의 경험은 역사적인 중요성을 가졌다. 공장들로부터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된 공동 파업위원회로부터 시작된 소비에트는 곧 대안적인 권력의 구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가 분쇄된 후, 트로츠키와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재판을 혁명적 사상을 선전하는 연단으로 활용했다.
페테르스부르크 소비에트는 50일 동안 존재했고, 모스크바의 바리케이드는 훨씬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다. 그러나 1905년 혁명의 충격은 세계 역사상 대단한 것이었다. (2006년 6월 9일 노동자 전위 872호의 기사 "1905년의 러시아 혁명"을 보시오.) 혁명은 유럽 지배계급들의 심장부에 공포를 안겨주었으며, 국제 사회민주주의(당시 맑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불렀다)의 혁명적 세력에게 활기를 주었다. 혁명은 아시아 전역에서 반식민지 운동을 불러일으켰고, 같은 해에 혁명적 생디칼리스트 세계 산업 노동자(IWW)가 창설된 미국을 포함하여 국제적으로 노동자 운동을 고무했다. 러시아에서는 결정적으로 혁명은 1917년에 바리케이드의 반대편에 서는 것으로 끝나게 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분파들 사이의 강령적 차이들을 드러내주었다.
플레하노프와 러시아 맑스주의의 기원들
조직화된 러시아 맑스주의는 중심적으로 플레하노프가 망명 중에, 지배적이었던 민중주의 경향으로부터 분리하여 소규모 노동해방 그룹을 조직하였던 1883년에 시작되었다. 나로드니크들(민중주의자들)은 짜르주의 전제에 대항하는 혁명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종종 영웅적이었다. 짜르 관리들에 대한 용감하기는 했지만 쓸모없었던 테러 활동들이 "인민에게로 가"기 위한 그리고 무지몽매한 농민 대중들에게 다가가려는 영웅적이지만 쓸모없는 노력들의 뒤를 이었다.
나로드니크들은 근대화된 부르주아지 유럽을 흉내 내려고 했던 군 장교들에 의해 추동 되었던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상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따랐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민중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발전의 서유럽 모델을 뒤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전통 자치체의 농민 토지인 미르에 기초한 러시아 고유의 사회주의를 구상했다. 그러나 농민은 집단적 분노의 자생적이고 휘발성있는 폭발들에 관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농민의 전망과 염원들은 소 소유자의 그것이었지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관되고 집합적인 계급적 이해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플레하노프가 민중주의에 대항한 그의 독창적인 맑스주의자의 논박이었던 우리의 차이들(1884년)에서 증명하였듯이, 농민의 미르는 이미 자본주의 시장 관계들의 충격 하에 붕괴되기 시작했었다.
자기 시대의 급진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맑스주의를 인기있게 하기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플레하노프는 역사상 가장 혁명적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을 개관하였던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선언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들의 역사이다"라고 선포했다. 계급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자본주의는 역동적으로 확장하는 세계적으로 조직화된 생산수단과 상행위를 창출했다. 그러나 그런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와 부르주아지 민족국가에 의해 부과된 장벽들이 이번에는 생산력의 발전에 대한 족쇄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생산에서의 위치와 그들이 팔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의 노동력 밖에는 없다는 사실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집산화된 경제에 기초한 사회화된 생산력을 해방시키고 확장하는데 있어서의 물질적 이해와 이 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사회적 힘 모두를 가지는 유일한 계급으로 만든다. 플레하노프는 자본주의 발전이 곧 중대한 산업 노동계급의 등장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상승"과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그들이, 그리고 그들만이 유일하게 농민과 사회주의 지식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그들이, 그리고 그들만이 유일하게 '인민'과 인구의 '교육받은' 부위 사이의 역사적 심연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 그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의 도움으로 사회주의 선전이 결국 러시아 시골의 모든 구석구석으로 침투할 것이다. 게다가 만약 그들이 단결하여 단일한 노동자 정당으로 제 때에 조직화된다면, 그들은 총체적인 붕괴에 반대하여 지방의 공동체들을 보호할 경제적 개혁들을 위한 사회주의적 선동의 주요한 보루가 될 수 있다…. 노동자 정당의 가능한 한 빠른 형성이 오늘날 러시아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모순들을 해결할 유일한 수단이다. 그 길의 앞에 모든 성공과 승리가 놓여 있다; 모든 다른 길들은 단지 패배와 무기력함으로 귀결될 뿐이다."
- 우리의 차이들(1884년), 철학 저작 선집 1권에서 재 출판
플레하노프는 민중주의자들의 최고 분자들 중 일부를 맑스주의로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1878년 성 페테르스부르크 경찰 국장을 사살하려고 했던 영웅적 시도로 유럽 전역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던 과거 나로드니크 베라 자술리치가 노동해방 그룹의 창립 성원들 중의 하나였다. 다른 나로드니크들은 결국에는 부르주아지 자유주의의 주요 정당인 입헌민주당(카데트)과 소부르주아지 사회혁명당(SRs)으로 결합하였다.
플레하노프와 연결되어있던 러시아의 맑스주의 선전 서클들이 1890년대 중반에 대중 선동으로 전환했고, 청년 레닌과 율리우스 마르토프가 처음으로 지도적 위치에 섰다. 동시에 개량주의 세력이 성장했다. 플레하노프에 의해 경제주의로 지칭되었던 이 경향은 짜르의 절대주의를 개혁하기 위한 부르주아지 자유주의적 노력들을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자신의 선동을 기초적인 노동조합적 요구들에 한정했다. 1897-98년 즈음 시작하여 경제주의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중에서 지배적인 경향이 되었다. 정통 맑스주의를 적대시하면서, 경제주의자들은 독일의 베른슈타인 주변에 있는 개량주의 경향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03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
1900년에 (레닌과 마르토프에 의해 대표되던)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의 2세대가 원래의 노동해방강령에 구현되어 있는 것과 같은 혁명적 전통들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를 되돌리기 위하여 창립의 아버지들(플레하노프, 악셀로드, 자술리치)과 합쳤다. 혁명적 맑스주의 경향은 신문 이스크라(불꽃) 주위로 조직되었고, 레닌이 그것의 조직자가 되었다. 이스크라는 최초로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위한 조직중앙을 제공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레닌은 경제주의로부터 지방 사회민주주의 위원회들을 획득하거나, 필요하다면 그들과 분리하기 위한 러시아에서의 활동을 지도했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1902년)는 "사회민주주의 정치들을 노동조합 정치들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려는" 경제주의자들의 시도에 맞서는 가차 없는 논박이었다! 이것에 맞서서, 레닌은 노동자 당은 부르주아지 자유주의의 노동 지원단체가 아니라 "인민의 호민관"으로서 활동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당은 인민의 모든 층들 사이에서 부정에 맞서 선동해야만 하며, 지배계급이 되어 사회주의적 기초에서 사회를 재건설 할 필요성을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식하도록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1903년 7-8월 RSDLP 2차 대회 즈음에 경제주의 경향은 작은 소수였다.
비록 이스크라주의자들이 굳건한 다수로 대회에 진입했지만, 외관상 통일의 저변에는 단일한 당 내부의 비(非)이스크라주의자들의 더 많은 역할에 호의적이었던 "유연한" 마르토프와 "엄격한" 레닌 사이의 많은 차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차이들은 누가 당원인가를 정의하는 RSDLP의 규약들의 첫 번째 문단을 두고 폭발했다. 마르토프의 초안은 당원을 "당의 조직들 가운데 하나의 지도하에서 규칙적인 개인적 조력을 제공하고 있는" 자로서 정의했다. 레닌에 따르면, 당원은 "당 조직들 중 하나에 개인적인 참여"로 정의 되었다. 레닌의 보다 협소한 정의는 기회주의자들을 제외하고 당의 느슨한 서클적 성격 때문에 RSDLP에 이전에 인입되었던 어설픈 아마추어들을 제거하기 위한 열망에 의해 동기 되었다. 경제주의자들과 유대 분트의 지원을 받은 마르토프의 공식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경제주의자들과 분트가 대회에서 퇴장하게 되자, 레닌의 "엄격함"이 근소하게 다수를 차지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어 "다수"에서 유래한 반면, 멘셰비키는 "소수"에서 유래한다.)
결정적인 분열이 새로운 이스크라 편집국 선거에서 발생했다. 레닌의 제안이 통과되자, 마르토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편집국이나 중앙위원회에서 복무하는 것을 거부했다. 플레하노프는 볼셰비키 분파를 지지했으나 곧 레닌과 결별하고 멘셰비키들과 함께했고, 그래서 멘셰비키들은 이스크라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장악했다.
레닌은 1903년 분리와 1905년 혁명 사이의 기간을 분리에 대하여 레닌에 반대하여 두 분파들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하던 볼셰비키 분파 내부뿐만 아니라 트로츠키와 같은 외부에 있는 자들에 대항한 치열한 투쟁을 수행하면서 보내게 된다. 1903년에는 레닌과 마르토프 사이의 정치적 차이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분명하지 않았으나, 곧 그것들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분파 투쟁의 논리가 패배했던 경제주의자들과의 화해로 이끌면서 멘셰비키들을 더욱 우익 쪽으로 몰아갔다. 과거 경제주의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알렉산더 마르티노프가 멘셰비키의 주요 이론가가 되었다.
우리가 1978년 스파르타시스트 팜를렛 레닌과 전위당에서 밝혔듯이, 1903년의 분리는 공공연한 개량주의에서 혁명가들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의 기치를 주창하는 모든 정치적 경향들이 공존하는 "계급 전체의 당"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개념으로부터 레닌의 최종적인 결별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3년은 그러한 분리의 시작, 전문적인 혁명가들의 중핵에 의해 지도되는 전위정당 건설의 첫 번째 발걸음을 의미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1905년 혁명은 트로츠키가 그의 저작 "러시아 혁명에 관한 세 가지 생각들"에서 지적하였듯이 "모든 러시아의 정치적 삶의 근본적인 배치들이 이루어졌으며 러시아 맑스주의 내의 모든 경향들과 명암들이 투영되었던 실험실”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정확하게 러시아의 역사적 더딤 때문에 러시아는 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와 당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지 혁명 이전에조차 강력한 발전을 획득했던 유럽의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사이의 상호 관계의 문제가 정확하게 러시아에서 가장 심오한 이론적 분석에 따르게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러시아 혁명에 관한 세 가지 생각들
멘셰비키들, 볼셰비키들, 그리고 레온 트로츠키는 다가오는 러시아 혁명에 관하여 세 가지 다른 생각들을 제출했다. 러시아의 후진성을 지적하면서 멘셰비키들은 노동계급은 민주주의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보조자가 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1905년 초에 마르티노프는 그의 팜플렛 두 가지 독재들에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이런 방침을 성문화했다. 멘셰비키의 주요 전술가인 악셀로드는 1906년 RSDLP "통합 대회"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들은 오로지 부르주아지 혁명을 위해서만 성숙해왔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권리의 일반적인 박탈 앞에서, 정치권력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다른 계급들 사이의 직접적인 전투에 관하여는 이야기 될 수조차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 발전의 조건들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객관적인 역사적 조건들이 공동의 적에 맞선 투쟁에서 부르주아지 계급과 어쩔 수 없이 협력하는 것을 우리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으로 만들었다."
플레하노프를 포함하여 모든 멘셰비키 지도자들이 이 기본노선을 지지했다. "그들은 무기들을 들지 말았어야 했다"(레닌의 1906년 8월 29일자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들"에서 인용됨)가 1905년 모스크바 봉기에 대한 플레하노프의 최종적인 판단이었다. "우리는 비프롤레타리아트 당들의 지지를 소중히 해야만 한다.... 그리고 분별없는 행동들로 그들을 우리로부터 내쫓지 말아야만 한다"고 플레하노프는 말했고, 레닌은 "자유주의자들과 지주들은 수백만 번의 '분별없는' 행동들에 대하여 당신을 용서할 것이지만 토지를 몰수하기 위한 소환장에 대해서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날카롭게 응답했다. 트로츠키는 위의 논전을 인용하면서 "러시아 혁명에 관한 세 가지 생각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플레하노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독립적인 세력으로서 전면에 나설 때마다 부르주아지 계급은 반혁명 캠프 쪽으로 넘어간다는 19세기 정치의 역사에 관한 근본적인 결론에 관하여 그의 눈을 명백하게 그리고 고집스럽게 감았다. 대중투쟁이 대담할수록 자유주의의 반동적 퇴행도 빨라진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계급투쟁 법칙의 결과들을 무력화하기 위한 수단들을 발명하지 못했다."
레닌은 자신의 입장에서 러시아에서 정치적 자유와 민주공화국을 위한 투쟁이 "부르주아지 계급의 지배"를 침해하지 않는 필요한 단계라는 것을 수용했다(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들, 1905). 그러나 결정적으로 레닌은 러시아 부르주아지 계급이 자기 자신의 혁명을 성취할 수 있음을 단호하게 제외하면서 러시아 부르주아지 계급의 일부 "진보적인" 성격에 관하여 어떠한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짜리즘에 맞선 결정적인 투쟁을 수행할 수 없다; 그들은 결정적인 투쟁으로 들어가기에는 사적소유, 자본 그리고 토지에 너무나도 많이 속박되어 있다. 그들은 짜리즘이 파괴되기를 원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관료, 경찰, 군사 세력들을 가진 짜리즘을 너무나도 필요로 한다.... '짜리즘에 대한 혁명의 결정적인 승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수립을 의미한다.
레닌은 그러한 독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가장 좋게는, 그것은 농민을 위한 토지재산의 근본적인 재분배를 가져오게 될 것이며, 공화국의 수립을 포함하여 철저하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수립할 것이며, 지방에서뿐만 아니라 공장 생활에서도 아시아적 속박의 모든 억압적 요소들을 근절할 것이고, 노동자들의 철저한 상황개선과 그들의 삶의 표준 향상을 위한 기초를 놓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결코 가벼이 볼 것은 아닌데, 혁명적 격변을 유럽으로 옮겨갈 것이다."
그의 1906년 저작 "러시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에서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문제이다"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트로츠키가 "세 가지 생각들"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짜리즘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수천만의 피억압 인민들을 영웅적이고 자기희생적이며 속박되지 않은 결코 멈추지 않을 혁명적 공격으로 일으켜 세울 필요가 있다. 대중들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들의 기치 하에서만, 따라서 지주들에서 시작하는 착취계급들에 대한 화해 불가능한 적대감 속에서만 오직 봉기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레닌에게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공식은 가변적으로 남아 있었다. 공동의 혁명적 독재를 위한 그의 개관들은 계급 평화의 시대가 아니라 국제적인 무대로 확장되는 계급 전쟁의 하나의 삽화적 사건을 위한 전투 계획들을 위한 용어들이었다. 로마노프 무장경찰 세력들의 파괴는 유럽 노동자들을 국가권력을 장악하도록 북돋울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같은 일을 하도록 지원할 것이었다.
레닌의 공식은 멘셰비키의 부르주아지 계급의 꽁무니 쫓기와는 화해 불가능하게 반대였다. 그러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가지는 두 계급들의 독재를 추진하는 것은 애초부터 모순이었다. 민주주의 독재를 위해 레닌이 마음에 그렸던 임무들은 오로지 농민에 의지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게 되며, 한편으로 민주주의 독재의 공식은 1917년 부르주아지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사용된다.
1905년 혁명 직전에 사회민주당 알렉산더 파르부스와의 협력에서 최초로 공식화되었던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의 이론은 멘셰비키들과 레닌 양쪽의 것들과 구별되기는 하였으나 레닌의 것에 훨씬 더 가까왔다. 레닌 처럼, 트로츠키는 러시아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어떠한 혁명적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결과들과 전망들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진정한 혁명적 부르주아지 계급이 없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민족 부르주아지 혁명은 불가능하다. 민족 부르주아지 혁명의 시기는 지났다 - 적어도 유럽에서는.... 우리는 단지 식민지 정복들의 체제일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명백한 통치체제를 의미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구정권의 반대에 부르주아지 민족국가를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 국가에 대한 반대에 프롤레타리아트를 배치한다."
레닌과는 달리 트로츠키는 농민은 혁명에서 지도자는 고사하고 독립적인 파트너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유럽에서의 농민 봉기들은 정권들을 타도했지만 이것이 농민 정당들의 정부들로 결코 귀결되지 않았음을 설명했다. 결과들과 전망들에서, 후에 봉건주의를 타도했던 것은 언제나 첫 번째 혁명적 계급들이 성장했던 도시들에서였다고 그는 썼다.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왕조의 손아귀로부터 권력을 빼앗지 않는다면 다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는 선언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을 해방시킨 계급으로서 농민들 앞에 설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후에, 트로츠키는 "세 가지 생각들"에서 그의 논점을 확장시켰다:
"결국, 농민은 자신의 사회적 관계들에서도 역시 이질적이다: 쿨락 계층[부유한 농민]은 자연스럽게 도시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연맹 쪽으로 흔들리는 경향이 있는 반면 촌락의 하층 계층은 도시 노동자들의 편으로 이끌린다.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농민은 그 자체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
이후에 일어난 스탈린주의자들의 왜곡들과는 반대로,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차이는 혁명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적 과제들을 건너뛸 수 있는가 혹은 노동자들과 농민들 사이의 동맹이 필요한 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동맹의 특수한 정치적 형식에 관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힘없는 인질들로서가 아니라 지도 세력으로서 정부에 참여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들이라는 바로 그 사실이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경계선을 파괴한다; 즉, 그것은 집산주의를 일정에 올린다"(결과들과 전망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나라에서 노동자들이 선진국에서보다 빨리 권력에 오른다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의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지 자유주의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완전한 통치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기회를 잡기 전에 권력이 노동자들의 수중으로 이동할 수 있는 조건들을 창출할 것이다 - 그리고 혁명의 승리의 경우에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동시에,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직접적인 국가 지원이 없이는 러시아 노동계급은 권력에 남아 있을 수 없고 자신의 일시적인 지배권을 지속되는 사회주의적 독재로 바꿀 수 없다. 이것에 관하여는 한 순간의 어떠한 의심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서구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이 우리로 하여금 노동계급의 일시적 지배권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 독재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칼 맑스의 "영속되는 혁명"
그의 영구혁명의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레온 트로츠키는 맑스가 "영속되는 혁명"이라는 공식화를 제출했던 1848-49년 유럽에서의 민주주의 혁명들의 패배에 뒤 이어 그가 도달한 결론들에 기반했다.
그들의 1850년 3월 공산주의 연맹에 보내는 "중앙 당국의 성명"에서 맑스와 그의 공동 사상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다가오는 혁명적 투쟁의 부활에서 소부르주아지 민주주의자들이 1848년 독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이 했었던 것과 똑같은 배신자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1848-49년 혁명들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획득하는 것과 봉건적 잔재들을 파괴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던 민주주의 봉기들이었다. 독일에서, 이것은 나라를 수많은 작은 군주체들과 프러시아 왕국으로 쪼개고 그래서 전국적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던 장벽들을 파괴할 필요성을 포함했다.
그러나 혁명적 봉기가 유럽을 사로잡으면서 분명해진 것은 부르주아지 계급들이 지주 귀족들에 의해 대표되던, 자신들의 지배에 대하여 남아 있던 장애들에 대하여 분노했던 것 보다 무장되고 투쟁으로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망을 더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 세력들이 귀족들과 화해하면서 혁명적 대중들은 배신당했다.
맑스의 주요한 요지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소부르주아지 민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자기 자신의 목적들을 위하여 독립적으로 투쟁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지 계급이 기껏해야 위의 요구들의 성취를 가지고 가능한 빨리 혁명을 결론으로 이르게 하고 싶어하는 반면, 모든 소유계급들이 일반적으로 그들의 지배의 지위로부터 강제로 축출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며, 한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지배적인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연합이 이들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들 사이의 경쟁이 멈추고 적어도 결정적인 생산력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될 정도로 나아갈 때까지 혁명을 영구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이해관계이고 우리의 임무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당시 유럽에서 산업적으로 가장 앞서있던 영국에서의 혁명이 없이는 프랑스나 독일의 고립된 혁명적 정권은 곧 영국의 재정 자본과 러시아의 짜르주의 군대의 동맹에 의해 분쇄될 것이라는 것 또한 알았다.
부르주아지 계급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1848-49년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장악하기에는 아직 너무도 허약했다. 트로츠키가 후에 그의 저작 1905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 발전이 과거의 봉건적 관계들의 파괴를 필요로 할 만큼 충분히 진행되었으나 새로운 생산관계들의 산물인 노동계급을 결정적인 정치적 세력의 지위로 끌어올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계급 사이의 적대가 부르주아지 계급이 두려움 없이 국가적 지도부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에는 너무도 컸으나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역할을 맡을 수 있기에는 부족했다."
맑스는 1850년 3월의 성명에서 "혁명의 진전 속에서 소부르주아지 민주주의가 잠시 동안 독일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획득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소부르주아지 민주주의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1852년에 맑스는 그의 고전적 저작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농민들은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서 그들의 자연적인 동맹과 지도자를 발견하는데,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부르주아지 질서를 타도하는 것이다." 엥겔스에게 보내는 1856년 4월 16일자 편지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했다: "독일에서 모든 것은 [16세기] 농민전쟁의 어떠한 두 번째 판본에 의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 경우 일은 거침없이 가야 한다." 1918년에 레닌은 이 편지가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주목할 만한 예견이며, 불가피하게 부르주아지 계급이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러시아 혁명의 "첫 번째 국면"을 위한 멘셰비키의 사이비 맑스주의 도식에 대한 훌륭한 폭로라고 지적했다.
독일 부르주아지 계급은 정말이지 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산업 자본주의의 계속되는 빠른 발전으로, 독일 부르주아지 계급의 주요 부위는 프러시아의 지주귀족(융커들)과 동맹을 형성했는데, 이것이 수상 비스마르크의 지휘 하에서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영국과 프랑스의 보다 발전된 부르주아지 국가들의 힘에 직면하여, 반동 비스마르크는 오로지 산업/금융 부르주아지 계급만이 독일을 비슷하게 발전된 국가로 바꿀 수 있으며, 그리고 그래서 또한 시대에 뒤쳐진 지주계급들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프러시아 군주제가 비-민주적 부르주아지 혁명을 통하여 현대화와 독일의 국가적 통일을 관장하였다.
엥겔스가 1880년대 후반에 아래와 같이 섰듯이:
"국가 업무들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비스마르크의 지위에 있는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과거를 가지는 사람은 융커들이 과거의 그들처럼 존속 가능한 계급이 아니라는 것과 모든 소유계급들 중에서 오로지 부르주아지 계급만이 미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래서 (노동계급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서 노동계급의 역사적 임무에 대한 이해를 기대할 수 없다) 비스마르크의 새로운 제국이 그가 근대 부르주아지 국가로의 점진적 이행을 위한 토대를 놓는 것에 더 많이 성공할수록 모든 것에서 더 안정될 것이라고 약속했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 역사에서 힘의 역할 (1887-88년)
비슷한 발전이 비슷한 시기에 시대에 뒤쳐진 무사계층의 한 부위가 1867-68년 봉건주의 통치체제를 타도하고 일본 군대를 세워내 일본이 서구 열강들의 침탈에 맞설 수 있도록 했던 일본에서 벌어졌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산업 부르주아지 계급과 근대 제국주의 열강이 일본에서 창출되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오늘날 세계를 계속해서 지배하고 있는 소수 그룹의 제국주의 열강들로의 진입은 새롭게 등장한 다른 부르주아지 계급들에게 막혀 있었다. (이것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은 2004년 봄 스파르타시시트[영어판] 58호의 "메이지 복고: 부르주아지 비-민주주의적 혁명"을 보시오.)
레온 트로츠키의 영구혁명 이론의 발전과 확장
2부
멘셰비키들과 스탈린주의자들은 오랫동안 러시아 짜르를 타도했던 2월 혁명을 러시아 혁명의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의 시작으로서 묘사해왔다. 사실은, 2월 혁명은 1905년 레닌에 의해 개괄되었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의 급진 민주주의적 임무들 중 어떤 것도 해결하지 않았다.
1917년 1월 9일 "1905년 혁명에 관한 강의"에서 레닌은 이미 그의 1905년 공식에 관한 어떠한 언급에 대해서도 기각했었다. 그의 강의는 제국주의 사이의 전쟁인 1차 세계대전 전야에 있던 러시아에서 계급투쟁의 발전을 반영했다. 1907년에서 1910년 사이의 반동기가 지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시 한 번 자신의 머리를 치켜들었다. 1914년 전반기까지 파업 행동의 수준이 1905년 이후 보지 못했던 최고점들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80% 정도의 정치적으로 실천적인 노동자들이 볼셰비키들의 뒤에 있었다.
그의 강의에서, 레닌은 1905년에 관하여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의 용어로 말했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의 피할 수 없는 방향이 짜르 정부와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 사이의 무장된 그리고 결정적인 전투를 향하고 있다." 트로츠키와 같이, 이제 레닌은 다가오는 혁명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일 수밖에 없으며, 훨씬 더 심오한 의미에서: 그 내용에서도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혁명.... 오로지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들만이 착취당하는 광대한 압도적 지도부를 제공할 수 있으며 제공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차 세계대전은 레닌의 생각에 깊은 충격을 주었다. 제2 인터내셔널은 대부분의 지부들이 자기 민족국가의 부르주아지 계급들을 전쟁에서 지지하면서 사회적 배외주의로 무너져 들어갔었다. 이것이 레닌으로 하여금 그가 1912년에 완전하게 실행했던 러시아 멘셰비키들과의 분리의 경로를 일반화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기회주의가 그저 흔적으로 남아 있거나 몇 곳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 보다는 레닌이 그의 기념비적인 연구인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1916년)에서 설명했듯이, 식민지들에 대한 제국주의의 착취로부터 발생하는 초(超)이윤들이 노동운동에서 기회주의, 친-자본주의 층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제공했다. 레닌은 모든 개량주의와 중도주의 경향들로부터 국제적으로 완전하게 분리하기 위하여 투쟁했고, 제3 인터내셔널 창건을 제기했다. 사회적 배외주의자들과 사회적 평화주의자들에 맞서서, 그는 전쟁 중에 있는 모든 부르주아지 계급들에 반대하는 혁명적 패배주의의 정책을 주장했고 다음의 슬로건을 제기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바꾸어내자!
애국주의의 첫 번째 폭발이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범람하면서, 전쟁이 러시아에서의 계급투쟁의 격증을 앞질러 갔다. 그러나 반동적 분위기는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전쟁에 대한 공포들이 모든 성직자들과 애국자들보다 훨씬 크게 작용했다. 550만 명의 러시아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다. 끔찍하게 낮은 임금에 노예처럼 일했다.
2월 혁명은 페트로그라드(러시아가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한 후 페테르스부르크로 개명되었다)에서의 더 많은 전쟁 배급을 요구하는 대부분이 여성이었던 직물노동자들의 세계 여성의 날에 있었던 파업에 의해 촉발되었다. "질서"를 위한 세력들과의 거리에서의 충돌이 수많은 부상자들을 발생시켰다. 그러나 결국에는 짜르는 자신에 충성하는 군대들을 찾을 수 없었고 강제로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위원회)들이 즉각적으로 공장들과 후방부대와 전방의 군부대들에서 선출되었다. 지방에서는 경찰과 국가 관리들이 체포되거나 쫓겨났다. 수도에서는 노동자들이 전제주의를 타도했으나, 이로부터 등장한 정부는 부르주아지 정부였다.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의역사(1932년)에서 2월 혁명은 농민에 기초한 군대의 자각을 의미했다고 언급했다. 소비에트들에 선출된 초창기의 군대 대표들은 농민에 기초한 사회주의 혁명가들(SRs)을 주로 지지했던 글을 읽고 쓸 수 있던 소부르주아지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이 SRs와 도시 소부르주아지 층들과 또한 노동자들의 한 영역을 대표했던 개량주의 멘셰비키들에게 노동자와 병사 소비에트들에서 엄청난 그러나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최초의 우세를 부여했다.
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시가전이 여전히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임시정부가 입헌군주제를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소비에트들 안에서는, 부르주아지 공화제에 충성하는 SR과 멘셰비키의 대표들이 봉기에 나선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억제하면서 부르주아지 계급에게 정치권력을 잡을 것을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부르주아지 계급에 적대적이었고, 소비에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배신적인 지도부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들을 나라에서 사실상의 권력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2월 혁명의 모순은 다음과 같다: 많은 수가 볼셰비키들에 의해 영감을 받았던 노동자들이 혁명을 수행하였으나, 혁명으로부터 등장한 정부는 부르주아지 정부였다.
2월 혁명은 이중권력의 상황을 낳았다. 레닌이 "이중 권력"(1917년 4월)에서 설명하였듯이, "부르주아지계급의 정부인 임시정부와 나란히, 아직은 약하고 초기 단계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성장하고 있는 정부인 또다른정부 - 노동자 병사 대표들의 소비에트들 - 가 등장했다." 이런 상황은 지속될 수 없었다 - 어느 한 계급이 지배해야만 할 것이었다.
레닌이 볼셰비키들을 재무장시키다
한편, 아직까지 레닌이 스위스에서 망명 중에 있던 볼셰비키 당은 경험 많은 볼셰비키들인 스탈린과 카메네프 하에서 화해주의자의 방침에 따라 움직여지고 있었다. 1917년 3월 시베리아 유형에서 복귀한 후 볼셰비키의 중앙 기관인 프라우다를 장악하고 있던 스탈린과 카메네프는 레닌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비타협적인 반대를 유린하기 위하여 레닌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오래된 공식을 사용했다. 스탈린과 카메네프가 편집자였던 첫 번째 신문인 프라우다 3월 15일자는 "임시정부가 반동과 반혁명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한" 부르주아지 임시정부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볼셰비키의 혁명적 패배주의에 날카롭게 거역하면서, 프라우다는 "모든 병사들은 현재의 전투 위치에 머물러 있어야만 함"을, 그리고 "짜르의 검열에 의해 보호받던 불철저한 신문이 그 이름으로 치장했던 모든 '패배주의'는 첫 번째 혁명부대가 페트로그라드의 거리에 등장하던 순간에 죽었다"고 러시아 병사들에게 선언했다. 프라우다는 또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당의 통합을 주장했다.
1917년 3월 볼셰비키 당대회에 대한 그의 보고에서, 스탈린은 부르주아지 계급을 적대시했다는 이유로 1905년 12월 모스크바 봉기를 비난하는 멘셰비키 플레하노프 처럼 말했다.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으로 우리로부터 불가피하게 후퇴하게 될 부르주아지 층들을 밀쳐내는 과정을 재촉하는 일을 강제하는 것은 현재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다. 중간 부르주아지 층들의 분리에 브레이크를 걸어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1917년 3월 전 러시아 당 노동자 대회의 의정서 초안") 그는 또한 "임시정부가 혁명의 단계들을 강화하는 한, 거기까지 우리는 임시정부를 지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반혁명적인 한,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는 허용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대회에서 제기된 멘셰비키의 통합 제안에 대하여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는 통합해야만 한다. 통합의 기초에 관한 우리의 제안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멘셰비키와 SR 지도자들은 기뻐하였으나 볼셰비키 중핵들로부터 수많은 항의가 있었다. 중앙위원회 멤버인 노동자 볼셰비키 알렉산더 실야프니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역 당 조직들에서의 분노가 엄청나며, 노동자들이 시베리아로부터 돌아온 3명의 과거 편집자들에 의해 프라우다가 장악된 것을 발견하고는 그들을 당에서 축출할 것을 요구했다."(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의 역사에서 인용)
레닌은 견딜 수 없이 불안한 마음으로 프라우다를 읽고 있었다. 심지어 4월 3일 망명으로부터 돌아오기 전에, 그는 그의 "먼 곳으로부터의 편지들"에서 임시정부는 부르주아지 정부이고 임시정부에 대한 최소한의 지지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지지를 의미한다고 경고했다. 그가 마침내 도착하여 핀란드 역에 있는 장갑차 위에서 유명한 연설을 하였을 때, 그것의 볼셰비키에 대한 효과는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과 같았다. 그를 환영하기 위하여 파견된 사회애국주의자들의 공식 대표들의 면전에서, 그는 전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 계급들을 지지했던 "사회주의자들"을 계급 배신의 범죄자들로 비난했던 독일의 혁명적 맑스주의 지도자 칼 리프크네히트를 칭송하여 말했다. 레닌에게는 임시정부에 대한 어떠한 지지도 분리의 문제였다.
그의 "4월 테제들"에서, 레닌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의 불충분한 계급의식과 조직 때문에 이 단계에서 권력이 부르주아지 계급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설명했다("현재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들", 1917년 4월) "나라는 혁명의 첫 번째 단계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가장 가난한 부위들이 권력을 장악해야만 하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고 레닌은 썼다. 프라우다가 레닌의 "테제들"을 4월 7일 출판했을 때, 중앙위원회 성원의 누구도 서명을 달지 않았다.
바로 다음날 프라우다에 출판된 응답의 글에서, 카메네프는 스탈린주의자들이 나중에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에 반대하여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말들을 레닌의 "4월 테제들"을 비난하기 위하여 사용했다: "레닌 동지의 총체적인 계획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것이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되었다는 가정에서 시작하여 이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즉각적인 이행을 제기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카메네프의 선언을 인용하면서, 레닌은 "전술들에 관한 편지들"(1917년 4월)에서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2월] 혁명 이후 권력은 부르주아지 계급이라는 이름의 다른 계급, 새로운 계급의 수중에 있다....
"여기까지에서 부르주아지 혁명 혹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은 완수되었다.
"그러나 이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기꺼이 '구 볼셰비키들'로 부르는 사람들로부터의 엄청난 항의들을 듣는다. 그들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에 의해서만 완수된다는 것을 우리가 항상 고수하지 않았는가? 라고 말한다...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볼셰비키의 슬로건들과 사상들은 역사에 의해 확증되어 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사태들은 다르게 해결되어 왔다....
"지금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며,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계급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혁명 이전의 '볼셰비키' 골동품 보관소에 맡겨져야 한다."
스탈린은 "4월 테제들"에 대한 그의 비판을 그것들의 "비실현성"에 제한하면서 한편으로는 화해주의자들의 편을 조용하게 들면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섰다. 카메네프와 이후 지노비에프가 합세하여 10월의 전야에 봉기를 위한 볼셰비키의 계획들을 비난하였던 혁명에 대한 공개적인 파업파괴 행위에 이르기까지 레닌에 대한 공격에 앞장섰다.
레닌은 4월에 있었던 볼셰비키 전 러시아 대회에서 자기편으로 다수를 획득한 이후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반(半)-프롤레타리아트들의 지지를 받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장악만이 이 나라에 진정으로 강하고 진정으로 혁명적인 정부를 제공할 수 있다"("강력한 혁명적인 정권", 1917년 5월) 레닌은 실제로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의 강령을 받아들였다.
트로츠키와 레닌의 재결합
같은 시기에, 트로츠키는 단련되고 강령적으로 굳건한 전위당을 건설하기 위한 레닌의 1903년 이래의 치열한 투쟁의 올바름을 깨닫게 되었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 2차 대회에서의 볼셰비키들과 멘셰비키들 사이의 분리 이전 시기에 트로츠키는 "레닌의 곤봉"이라는 별명을 얻었었다. 그러나 1903년에 트로츠키는 직업적 혁명가들의 강력한 당에 관한 레닌의 주장에 주저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멘셰비키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긍정적 태도에도 반대했다.
트로츠키는 자신은 양 분파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1905년 혁명에서 그는 볼셰비키들과 긴밀하게 작업하였으나, 그 이후의 시기에 모든 분파들을 통합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들이 기회주의자들로부터 혁명가들을 날카롭게 구별하기 위한 레닌의 투쟁과는 다른 방향을 향했고, 불가피하게 트로츠키를 볼셰비키들에 반대하는 일시적인 부패한 블럭들로 이끌었다. 이것은 볼셰비키의 멘셰비키 분파와의 최종적 분리 이후 볼셰비키들이 스스로를 다른 정당으로 조직하였던 1912년에 절정에 이르렀다. 1912년 8월에 트로츠키는 분리를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던 - "8월 블럭"으로 악명이 높게 되었던 - "친당" 멘셰비키들과 함께 비엔나에서 대회를 조직하는데 앞장섰다.
일단 2월 혁명이 짜리즘을 제거하고 소위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지 계급에게 권력을 가져다주자 멘셰비키 지도부의 대다수가 "자기 자신의" 지배계급에 대한 "방어주의" 노선을 수용하면서 제2 인터내셔널 다수파에 합류했다. 전쟁의 충격과 그의 화해주의적 노력들에 반대하는 레닌의 가차 없는 논박들로 인해, 트로츠키는 기회주의와의 완전한 분리라는 레닌의 주장 쪽으로 점점 더 많이 이끌리게 되었다.
그래서 1917년에 트로츠키와 레닌은 당과 혁명의 계급적 성격에 관한 결정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동의에 이르게 되었다. 5월 4일 유배지로부터 돌아온 후, 트로츠키는 즉각적으로 볼셰비키에 합류하지 않았으나 그가 볼셰비키들과의 통합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던, 좌선회하고 있던 메쯔라욘치(인터보로) 조직에서 볼셰비키들과 함께 활동했다. 통합은 7월 말 경에 시작되었던 볼셰비키들의 6번째 대회에서 완료되었다. 레닌이 후에 인정하였듯이, 일단 트로츠키가 멘셰비키들과의 통합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순간부터 그 이상의 볼셰비키는 없었다"(트로츠키의 왜곡을 일삼는 스탈린 도당[1937]에서 인용)
1917년의 사태들에서 시종일관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권력 장악을 주창했다. 저주받던 제국주의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맹세에 대한 분노의 폭발 속에 1차 임시정부가 무너진 후, 새로운 정부가 5월 초에 구성되었다. SR과 멘셰비키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장관직들을 수용했다. 레닌은 러시아 부르주아지 계급이 "1848년 이래로 수십 년 동안 다른 나라의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바보로 만들고, 분열시키고, 약화시키기 위하여 실행했던 수단에 의존했다고 설명했다. 이 수단은 ‘연합’ 정부, 즉 부르주아지 계급의 성원들과 사회주의의 배신자들로 형성되는 공동내각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회혁명가당과 멘셰비키 당들의 바보들은 자기 지도자들의 장관직이라는 명예의 서광에 대하여 기뻐했으며 멍청하게도 굉장히 영광스러워했다. '소비에트들의 지도자들' 개인들 속에서 인민에 반대하는 조력자를 발견했으며, 당분간 휴전하게 되었던 제국주의 탐욕의 전쟁의 재개라는 '전선에서의 공세적인 작전들'을 지원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확실하게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자본가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의 두 손을 비볐다."
- "혁명의 교훈들" (1917년 8월)
그의 중요한 저작 국가와 혁명(1917년 9월)에서 레닌은 산더미 같은 사회민주주의적 왜곡으로부터 국가 문제에 관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부활시켰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처참하게 분쇄되기 전까지 거의 3개월 동안 권력을 장악했던 1871년 파리 코뮌의 경험으로부터 맑스가 도출했던 핵심적인 교훈을 지적하면서 레닌은 "노동계급은 기존의 국가기구를 단순히 접수하고, 그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는 프랑스에서의 내전(1871년)에서의 맑스의 선언을 인용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맑스의 사상은 노동계급은 “기존 국가기구”를 해체하고 분쇄해야만 한다는 것이며 그것을 접수하고 있는 것에 스스로를 단순히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국가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는 고사하고 농민과의 동맹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맑스의 이해를 부활시켰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자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사회주의 경제를 조직하는 작업에서 농민, 소부르주아지와 반(半)프롤레타리아트의 엄청난 인민대중을 지도하기 위하여 중앙 집중화된 힘의 기관이며 폭력기관인 국가권력을 필요로 한다."
이미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자신의 이전의 공식을 버리면서, 레닌은 국가는 두 개의 다른 계급들을 대표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주장했다.
"단일 계급의 독재가 일반적으로 모든 계급사회에, 부르주아지 계급을 타도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뿐만 아니라 '무계급 사회'로부터, 공산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분리하는 전체 역사적 시기 동안에도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만이 오직 맑스의 국가 이론의 본질에 정통한 것이다. 부르주아지 국가는 형태에서 매우 다양하지만 그들의 본질은 동일하다: 그들의 형태가 무엇이건 간에 이들 모든 국가들은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지 계급의 독재이다.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분명히 엄청난 풍요와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만들어 내지만, 그 본질은 어쩔 수 없이 똑같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볼셰비키들이 프롤레타리아트를 1917년 10월에 권력으로 이끌었을 때,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맑스주의적 이해에 피와 살을 불어넣었다.
코민테른과 식민지 혁명
10월 혁명은 국제적으로 전기충격과도 같은 영향을 미쳤다. 혁명은 전쟁 중인 다른 유럽 열강들, 특히 독일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가장 즉각적으로 감지되었다. 그러나 혁명이 만들어낸 조수의 물결은 식민지 세계 전반을 포함하여 유럽을 넘어 멀리까지 이르렀다.
뿌리깊은 사회적 억압과 전제적인 정권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나라들에 있는 제국주의에 대한 추종을 극복하고 싶어했던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의 기치로 현저하게 이끌렸고, 이들은 그들 자신의 나약하고 부패한 부르주아지 계급들이 1789-93년 프랑스 대혁명과 비슷한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I)은 식민지 세계에서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공산당들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선포하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제국주의 중심부들에서의 노동자 혁명들이 전반적으로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예측했다.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코민테른의 초기 활동은 대체적으로 공산당들과 제2 인터내셔널의 배외주의적 시궁창 사이에 엄격한 강령적 라인을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제2 인터내셔널 내부에는 식민지 문제에 관한 다양한 태도들이 있었다. 자기 "자신의" 지배자들의 식민지 희생자들과 연대했던 많은 이들이 좌익이었다. 그러나 이들 카우츠키주의의 "전 계급의 당들"은 제국주의의 "문명화" 임무를 옹호하던 우익 분자들 또한 포함하고 있었다(그리고 이들은 종종 해외와 국내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한 공공연한 인종주의자였다). 일단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을 지지하는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식민지 제국들을 방어하고 확대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노력들을 위한 신병모집 담당원들로서 활동했다.
레닌은 그런 사회적 배외주의와 날카롭게 선을 그었다. 그는 "분리에 대한 민족들의 권리"와 같은 자기 결정권에 대한 거부는 지배적인 민족의 특권에 대한 방어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자기결정에 관한 민족의 권리", 1914년). 피억압 민족들과 식민지 대중들에 반대하는 자기 자신의 지배자들과 동맹을 맺은 노동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을 결코 성취할 수 없을 것이었다.
1920년 2차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채택된 "21가지 조건들"은 제국주의 나라들에 있는 공산당들은 "말 뿐 아니라 행동으로 식민지들에서의 모든 해방운동"을 지지하며 "식민지 인민들에 대한 어떠한 억압에 대해서도 반대하여 자기 자신의 국가의 군대들 사이에서 체계적인 선전"을 수행할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2차 대회의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들"은 식민지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지 계급에 종속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식민지들과 후진국들에서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와의 일시적인 동맹에 들어가야만 하지만 그들과 통합해서는 안되며, 모든 조건에서 심지어 공산당이 자신의 가장 맹아적인 형태에 있는 경우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독립성을 고수해야 한다."
2차 대회는 아직까지 세계 전쟁에 의해 만들어진 변화들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1914년 이전에는 경제가 농업과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윤을 위한 원료 추출 중심으로 건설되었던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들에서 산업의 발전이 실질적으로 없었다. 그러나 국제무역의 붕괴와 전쟁 중인 열강들에서의 전쟁관련 생산에 대한 강조와 함께 중국과 인도 같은 나라들은 괄목할 만한 산업의 발전과 전투적이고 젊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빠른 발전을 경험했다. 지역의 자본주의 산업에 강력한 추진력을 제공하던 서유럽 열강들로부터의 소비재와 자본의 공급이 전쟁으로 인해 끊어졌다.
인도와는 달리 중국은 완전한 식민지가 아니었다. 손문의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운동에 의해 지도되었던 1911년의 중국 혁명은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던 노쇠한 청(만주)왕조를 타도했다. 하지만 나라는 곧 군벌들에 의해 분열되었고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앞에 굴복한 채 "조차지들"로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반면, 1919년까지 몇 안 되는 중심 도시들에 있는 대기업들에 집중된 약 150만명의 산업 노동자들이 있었다(스파르타시스트 [영어판] 53호, 1997년 여름, "중국 트로츠키주의의 기원"을 보라). 이러한 변화들이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거대한 잠재적인 사회적 힘을 부여했다; 하지만 극단적인 사회적 후진성의 나라에서 극소수인 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으로 각성되어 국가권력을 두고 투쟁할 것인가 여부에 관한 물음에 대하여 이들 변화들은 저절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1925-27년 이 문제가 정면으로 부각되었을 때쯤, 코민테른은 질적인 퇴행을 시작했었다.
"반(反)-제국주의 공동전선"
1922년 11월과 12월 사이에 열렸던 제4차 대회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자신의 "동방문제에 관한 테제들"에서 "반(反)-제국주의 공동전선"의 슬로건을 소개했다. 이것은 식민지와 반(半)식민지 세계에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지 세력들과의 공동행동들에 대한 올바른 고려를 넘어섰으며, 민주주의적 요구들이라는 최소강령의 기초에서 그런 세력들과의 정치적동맹을 의제로 삼았다.
식민지 부르주아지 계급에 관하여 비판적인 채로 있었던 한편으로, 테제들은 그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관계라는 핵심적인 문제에 관하여 불분명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세력관계에서 소비에트 강령의 수행을 자신의 당장의 즉각적 임무로 만들지 못하는 한, 독립적인 민주공화국, 모든 봉건적 권리들과 특권들의 폐지 그리고 여성의 권리들에 대한 소개 등등과 같은 부분적 요구들을 지지하고 선도한다." 암묵적으로 테제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투쟁이라는 첫 번째 단계를 가지는 식민지 혁명을 위한 멘셰비키의 "2단계" 강령을 제기했다.
비록 테제들이 후진국들에서 공산당 지부들의 활동에 관하여 모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대회 대표인 탄 말라카는 이전에 자기 당이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이슬람 동맹(Sarekat Islam)에 가입한 것을 공개적으로 방어했다. PKI의 행위는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독립에 관한 2차 대회의 주장에 분명하게 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차 대회가 "유럽과 미국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운동을 칸과 지주들 그리고 뮬라 등등의 지위들 강화하기 위한 시도들과 결합시키려고 애쓰던 범 이슬람주의와 그와 비슷한 경향들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반면, 4차 대회 테제들은 "민족해방 운동들이 성장하고 성숙해질수록, 범 이슬람주의라는 종교-정치적 슬로건들은 정치적 요구들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라고 중립적으로 주장했다.
4차 대회 이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의장 지노비에프는 1차 극동 노동자 대회에서 "공산당들의 강령의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으로의 분리는 ... 즉각적인 미래에 이들 국가들의 다음 단계 발전이 민주주의적 전복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적인 -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 계급 조직이라는 정도까지, 특히 극동 국가들에게 타당한 것으로 고려되어야만 한다"("극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들에 관한 테제들", 1922년 1월)고 선언했었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성원이며 미래의 좌익 반대파인 조페[A.A. Joffe]가 손문의 국민당(민족주의 정당 - GMD)과 협상하기 위한 수석 소비에트 외교사절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당시 중국에 있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윈회(ECCI)의 밀사들이 밀어붙이고 있던 정책들에 반대하여 2차 대회에서 채택되었던 원칙적 입장을 고수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러시아 공산당 정치국에 보내는 1922년 7월 22일자 편지에서 조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세계 전반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우리의 정책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목적을 수행해야만 한다.... 중국 내부 정치에서, 민족해방과 중국의 재통일을 위한 노선의 정립, 그리고 통일되고 진정으로 독립적인 독립된 민주주의(소비에트?) 중국 공화국의 수립 ..... 사절단에 대한 손문의 공개적인 친밀감을 염려하지 않으면서 [손문에게 보다] 훨씬 더 한 중국 공산당(CCP)에 대한 지지. 중국 공산당의 허약함과는 무관하게, 공산당의 완전한 독립은 필수적인 것으로 고려되어야 하며, 공산당을 손문의 당과 통합시키려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중앙집행위원회[ECCI]의 특정 요원들의 노력들은 완전하게 잘못된 것이다.
- 볼셰비키 지도부, 서한집(Correspondence) 1912-1927, (모스크바, ROSSPEN, 1996) 에서 번역
조페가 언급하고 있는 ECCI 요원은 PKI가 Sarekat Islam에 가입하도록 공작했던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G 매링(Henricus Sneevliet)이었다. 1922년 8월에, 매링은 GMD로의 부분적 가입으로 젊은 CCP를 강제했다. 매링은 ECCI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조페는 매링의 행보에 대한 대안이 부족했으며, 중국에서 제국주의자들에 반대하는 행동으로 손문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중국에 공산주의를 소개하기 위한 시도들을 극구 거부했던 GMD와의 1923년 1월 "비(非)적대 조약"에 사인했다. 그 해 8월, 손에 대한 정치 고문관으로 미하일 보로딘을 임명하는 스탈린에 의한 정치국 제안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손문과의 활동에서 중국 민족해방 운동의 이해관계에 따르도록, 그리고중국에공산주의를건설하는목표들에의해조금도혼란스럽게되지않도록 보로딘 동지를 지도하는 것"(강조는 첨가). 스탈린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다. 그 해 3차 전국 대회에서 CCP는 부분적 참여에서 완전한 참여로의 전환을 투표로 결정했고, "GMD가 민족혁명의 중심세력이 되어야 하며 운동의 지도력을 맡아야 한다"고 결의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4차 대회의 시기까지, 레닌은 병으로 인해 점점 더 주변부에 있게 되었고, 스탈린,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프의 반트로츠키 "트로이카"(triumvirate)가 연합했고, 소비에트 공산당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CCP 중앙위원회의 다섯 성원 모두가 처음에는 GMD 참여에 반대했다. 그들의 반대들이 코민테른 내부에서 완전하게 토론되고 논쟁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 차이들은 당시 소비에트 국가와 코민테른 최고위직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관료 도당에 대한 반대파들에게 비밀로 붙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1923년 정치국에서 투표에 상정되었을 때와 그 이후에도 트로츠키는 GMD 참여에 관하여 트로이카의 노선에 반대했다. 트로츠키는 정치국 내부에서 트로이카에 대한 그의 공공연한 반대를 계속하는 한편으로, 이와 동시에 GMD와 같은 민족주의 정당 속으로 그들의 강령들을 섞는 것에 반대하여 공공연하게 동방의 공산당에 경고함으로써 스스로를 차별화했다. 그는 지노비에프와 스탈린에 의해서 미국, 폴란드 및 다른 나라들에 대하여 추진되었던 "노동자와 농민" 혹은 "농민과 노동자"이라는 두 계급 당 개념에 반대했고 - 재앙적인 결과들에 관하여 - 국민당은 부르주아지 당이라고 주장했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배반의 "이론"
1922년 가을에 마비 증세에서 회복되자, 레닌은 소비에트 국가와 당에서 점증하고 있던 관료계층의 압력들이 정치국에서 점점 더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고 몸서리를 쳤다. 그는 집산화된 경제의 핵심적인 보루인 외국무역에 관한 국가독점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스탈린과 다른 자들이 추진하던 제안에 반격을 가하기 위하여 트로츠키와 협력했다. 레닌은 이후 1923년 4월의 12차 당대회에서 총서기에서 스탈린을 제거하기 위하여 트로츠키와 동맹을 맺을 것을 결의했는데 이것은 적잖게 스탈린과 그의 동료들이 코카사스에서 비러시아 민족들에 대하여 추진했던 대러시아 배외주의를 연상케 하는 폭력적인 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1923년 3월 레닌은 다시 질병으로 인한 마비증세로 아팠고, 그 이후 트로츠키는 강력한 투쟁으로부터 물러났다. 트로이카가 책임을 맡은 상태에서 12차 대회는 오랜 경제주의자였으며 멘셰비키였던 알렉산더 마르티노프가 자신들의 대오로 들어오게 된 것에 대한 환영을 위한 특별의제를 만들었다.
마르티노프는 중국과 관련하여 트로이카의 트로츠키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중심이 된다. 예를 들면, GMD 부르주아지 민족주의당으로의 CCP의 청산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4개의 계급들의 연합" (노동자, 농민, 소부르주아지 계급과 민족 부르주아지 계급)으로서의 GMD의 성격을 만들어 냈던 자가 마르티노프였다. 트로츠키가 나중에 "누가 오늘날 코민테른을 지도하고 있는가?"(1928년 9월)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던 것처럼:
"마르티노프는 단지 당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 갔을 뿐만 아니라, 그는 코민테른의 '영감(inspiration)'의 주요한 근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오로지 그의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투쟁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갔고, 그에게 순종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재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가 지난 20년간 했었던 것처럼, 간단하게 '영구혁명'과의 투쟁을 계속했다."
12차 당대회 이후 몇 달 만에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큰 중대성을 가지고 있었던 1923년 혁명이 독일에서 패배했다. 독일에서의 패배는 지노비에프 하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무능력과 독일에서 충분하게 단련된 공산당의 부재 때문이었다: KPD[독일 공산당]는 사민당에 순응했으며, 10월에는 심지어 사민당이 주도했던 부르주아지 지방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스파르타시스트 56호 2001년 봄 "볼셰비즘을 재무장하며: 1923년 독일과 코민테른에 대한 한 트로츠키주의자의 비평"을 보라) 이미 후퇴를 시작하고 있던 전쟁 후의 혁명적 파도가 1921년에 멈추었고 전 세계적인 부르주아지적 질서가 안정화되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들이 열성적으로 독일 노동자 혁명의 경로를 따라가고 있었다. 독일 혁명의 패배는 노동자 국가의 고립이 길어지고 막 생겨난 소비에트 관료집단의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의 정치권력 찬탈을 위한 길을 닦는데 도움을 주면서 소비에트 노동자들을 엄청나게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도시 중심지들과 적군으로부터의 광범위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와 협력하고 있던 반대파의 느슨한 조직들에서 단지 3명의 대표들만이 허용되도록 1924년 1월 13차 당대회를 위한 선거들은 조작되었다. "트로츠키주의"는 레닌주의와는 정반대의 이단으로서 비난을 받았다. 레닌은 대회의 결과를 알게 된 다음 날인 1월 21일 죽었다. 1924년 1월 이후, USSR를 지배했던 자들과 USSR이 지배되던 방식, 그리고 USSR이 지배되는 목적들이 모두 변했다. 1924년 가을에, 스탈린은 계급들이 사라지고 국가가 사멸한 질적으로 더 높은 생산력 수준에 기초한 사회인 사회주의가 단일 국가에서 건설될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 피폐화된 러시아에서도 가능하다고 하는 자신의 "이론"으로 10월 혁명의 프롤레타리아트적이고 혁명적이며 국제주의적인 강령에 대한 보수적인 관료집단의 반감을 일반화했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후퇴의 강령이었으며, 소비에트 사회가 수년 동안의 전쟁, 혁명, 그리고 궁핍으로 인한 고통을 겪어낸 이유인 안정에 대한 거짓 약속이었다. 이것은 세계 자본주의의 재 안정화에 직면하여 소비에트 당뿐만 아니라 서구의 신생 공산당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던 보수주의적 분위기를 구체화했다. 그것은 레닌과 볼셰비키 당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는 세계체제로서만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언제나 분명히 했던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과 실천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수없이 많은 혁명적 기회들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기치 아래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배신당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기구로부터 외교 책략의 도구로의 변형이 하룻밤 만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에, 먼저 지노비에프가, 그리고 뒤에 스탈린이 부르주아지 세력들과의 다양한 동맹들을 실험했는데, 결국 이것은 1925-27년 2차 중국 혁명의 살인적인 파괴로 귀결된다. 1933년이 되면서, 트로츠키가 "파시즘의 천둥번개"라고 불렀던 즉, 강력했던 독일 노동자 운동이 총 한방도 쏘아보지 못한 채 당했던 히틀러의 나찌의 승리조차 스탈린의 코민테른을 자각시킬 수 없었다. 스탈린의 정책에 의하여 발발한 이 재앙이 제3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분노는 물론 중대한 의견 불일치조차 발생시키지 않자, 트로츠키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혁명을 위한 세력으로서 완전하게 죽었음을 스스로 보여주었다고 결론 내렸다. 1935년이 되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계급협조(인민전선)의 강령을 분명하게 성문화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부르주아지 계급의 지배를 떠받치기 위하여 공격적인 반혁명적 역할을 했다. 스탈린주의화된 코민테른은 트로츠키가 묘사했던 것처럼, 참으로 "패배들의 거대한 조직자"였다.
레온 트로츠키의 영구혁명 이론의 발전과 확장
3부
레온 트로츠키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에 의해 확증되었던 자신의 영구혁명의 이론과 전망을 자본주의 발전이 뒤늦은 다른 나라들에게까지 일반화했던 것은 1925-27년 2차 중국 혁명의 처참한 패배의 뒤끝에서였다. 1923-25년의 기간에 중국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직은 권력을 다툴 수 있는 세력으로 등장하지 않았었다. 이 시기에, 트로츠키는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국민당(GMD)에 대한 소비에트의 군사적 지원과 이런 저런 제국주의 열강들의 대행자들이었던 군벌들에 맞서는 GMD와 중국 공산당(CCP) 사이의 군사적 동맹을 올바르게도 지지했다. 이 시기 식민지 혁명들에 관한 그의 예측은 중국에서 생겨나고 있던 급진 부르주아지 정권의 가능성을 한동안 배제하지 않았던 1920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2차 대회의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들"의 모호한 측면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트로츠키는 동방의 맹아상태의 공산주의 운동들에 민족주의를 수용하는 것에 반대하여 경고할 때에 조차, "만약 중국 국민당이 민족-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중국의 통일을 실현한다면, 중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이 큰 폭으로 전진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동방에서의 전망과 임무들", 1924년 4월, 2007년 가을 스파르타시스트[영어판] 60호에 “동방에서의 공산주의와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재 출판 됨). 그러나 소비에트 공산당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우두머리로 있던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에프 트로이카와는 반대로, 트로츠키는 CCP의 국민당으로의 입당에 반대했다. 그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독립성을 고수해야 하며 정치적 기치들을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들과 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차 중국 혁명은 영국 군대가 파업대오에 대한 억압에 항의하던 시위대에 총질을 해서 12명을 죽였던 1925년 5월 30일 상하이 사태로 시작되었다. 이에 답하여 상하이에서 총파업이 선언되었고 총파업은 급속히 확산되었다. 영국 상품들이 거부당했고 홍콩에 있던 중국의 항만노동자들이 항구를 봉쇄했다. GMD가 광동에 있던 지역 군벌을 불러냈으나 성장하고 있는 총파업은 중국 부르주아지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했다. 1925년 약 10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들에 참여했는데, 파업들 중 다수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2년 후에, 중국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300만이 되었다.
중국 민족주의의 창시자 손문이 1925년에 죽었다. 그의 후계자인 장군 장개석은 광동에서 1926년 3월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쇄하고 GMD 내부의 CCP 지위들에 대한 반격을 가하기 위하여 쿠데타를 시작했다. 5월에 장은 CCP에 GMD에 있는 CCP 당원들의 리스트를 넘길 것을 명령했다. CCP의 주요 지도자들은 GMD 탈당을 당에 재차 호소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표인 미하일 보로딘은 공산주의자들은 GMD를 위한 "하급 노무자"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며, 이 민족주의 정당이 "동조하고 있는" 부위로 코민테른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고 선언했다. 러시아 정치국에서 오직 트로츠키만이 이것에 반대해서 투표했다. 중국 때문에 스탈린의 코민테른에 의해 제출된 "2단계 혁명"은 부르주아지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1917년 멘셰비키의 굴욕적인 입장의 재탕이었다. - CCP가 부르주아지 국민당 속으로 왕창 청산된 것은 이것보다 더한 것이었다.
결정적인 정치적 사건들이 다음 해 상하이에서 벌어졌다. 3월에 장의 군대가 접근하자, 총파업을 벌이고 있던 50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봉기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경찰서들을 습격했고 군벌들을 도시 바깥으로 쫓아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상하이를 수중에 넣었지만, 스탈린은 CCP에게 장이 3월 26일 도시로 진입하면 그에게 승리에 찬 환영을 해주라고 명령했다. 이틀 후에 장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러한 사태들이 벌어지자 트로츠키는 3월 31일 CCP가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권력을 위한 혁명적 투쟁을 시작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같은 날 스탈린과 그 일당은 CCP에게 무기들을 감출 것을 명령했다. 스탈린은 항복을 명령했었고, 장은 아무도 포로로 잡지 않을 것이었다.
4월 12일 장은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학살하는 거대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코민테른은 무한(Wuhan)에 기초를 두고 있는 국민당 좌익 분파에게로 방향을 틀어서, CCP가 그곳의 연합정부에 참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좌익" GMD는 재빠르게 총구를 CCP에게 돌리고는 장과 재통합했다.
스탈린의 화해주의적 정책들에 대한 트로츠키의 통렬한 비판들에 직면하여, 1927년 12월에 15차 러시아 공산당대회가 개막되자, 스탈린은 냉소적으로 광동에서의 봉기를 내세웠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고조의 최고점에서 소비에트를 조직하라는 트로츠키의 주장에 반대하여 투쟁했던 스탈린이 이제는 느닷없이 광동 "소비에트"를 출현시키기 위해 시도했다. 공산주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영웅적인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결코 기회를 잡지 못했다. 상하이에서의 거대한 패배 이후, 노동 대중들의 대부분이 수동적으로 되었다. 광동 코뮌은 1927년의 처참한 통계에 약 5700명의 희생자를 추가했다.
2차 중국 혁명에서의 패배는 CCP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시골로 퇴각하면서, 구성과 정치적 전망 양쪽 모두에서 농민 정당으로 스스로를 변형시키면서, 당은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1949년 중국 혁명이 자본주의 지배를 타도했을 때,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당한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를 수립했던 스탈린화되고 농민에 기초한 당의 지도부가 혁명을 수행했다.
영구혁명과 연합 반대파
1925-27년 중국 혁명의 처참한 패배의 정치적 평가가 필수적이었고, 트로츠키가 그것을 수행했다. 1926년 이래로 그의 주의는 중국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가 정치국에 극동에서의 군사-외교적 위험들에 관한 보고를 제출하던 그 달에 그는 다시 한 번 CCP가 국민당을 즉각 떠날 것을 제안했다. 맑스주의 역사가 아이작 도이처가 무장하지않았던예언자(1959년)에서 쓰고 있듯이, 트로츠키는 "존재하고 있는 부르주아지 정부들, 심지어 구시대 군벌들과 협상들을 하는 것은 외교관의 업무였다; 그러나 그들을 타도하는 것은 혁명가들의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트로츠키에 의한 전쟁의 선포였고 중국에서 코민테른의 정책에 대한 그의 직접적 개입의 시작이었다.
1926년 9월에 트로츠키는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소부르주아지 계급은 스스로는 혁명적 정책의 주요한 노선을 결정할 수 없다. 계급 노선들에 따른 정치투쟁의 분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계급 사이의 첨예한 차이가 소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영향력을 위한 그들 사이의 투쟁을 당연히 수반하며, 이것이 한편에서 상인들과 다른 한편에서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의 소부르주아지 계급의 동요를 당연히 수반한다."
그 해까지, 트로츠키는 영구혁명의 이론이 레닌주의에 반하는 원죄라는 관료들이 덮어씌운 혐의를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는 영구혁명 대 "2단계" 혁명이라는 멘셰비키/스탈린주의 교조의 문제가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 그 자체의 문제를 제기했다. 트로츠키가 영구혁명(1930)의 주에서 쓰게 되는 것처럼: "나는 영구혁명의 이론에 대한 아류들의 비판이 전체 인터내셔널에서 이론적 반동에게 자양분을 공급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중국 혁명의 직접적 파괴를 위한 수단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던 시점에서 비로소 나 스스로가 이 문제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에 대한 논쟁이 몰아치던 대부분의 시기 동안, 트로츠키의 좌익 반대파는 1925년 후반 스탈린과 불화의 관계에 있었던 레닌그라드에 기초를 둔 지노비에프의 반대파와 정치적 동맹을 맺고 있었고, 지노비에프는 카메네프와 함께 스탈린에 대립하고 있었다. "비판적 손익계산서: 트로츠키와 러시아 좌익 반대파"(스파르타시스트 [영어판] 56호, 2001년 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카메네프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반대와 스탈린/부하린 동맹의 친 농민 경제정책들에 대한 반대를 공유했다."
이 공동 반대파 내부에는 중국에 대한 중대한 차이들이 있었다. 지노비에프는 1926년 10월에 제거될 때까지 코민테른의 의장이었고 그래서 국민당 입당 결정을 포함하여 중국에 관한 코민테른의 초기 정책들에 대한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지노비에프 파들은 공산당이 GMD를 떠나야 한다는 트로츠키가 제기한 요구에, 심지어 GMD가 반혁명적 정책들을 공공연하게 실행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반대했다. 그리고 공동 반대파의 공개된 노선은 지노비에프 파의 그것이었다.
1927년 초에, 지노비에프와의 타협의 일환으로 트로츠키는 러시아 정세에서 자신이 20년 전에 거부했었던 슬로건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 주장을 지지했다. 마찬가지로, 1927년 9월 공동 반대파의 강령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달랐던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레닌이 옳았다고 인터내셔널에 선언했다.... 특히, 영구혁명과 농민 문제들에 관하여." 그리고 1927년 가을에 공동 반대파가 공공연하게 CCP에게 국민당을 떠날 것을 주장했을 때 즈음에는, GMD의 모든 세력들이 공산주의자들을 갑자기 공격하게 되면서 이 문제는 의미가 없어졌다.
트로츠키는 1927년 9월이 되어서야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새로운 단계에 있는 중국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서만 승리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획득하지 못할 것이다"("중국 혁명에 대한 새로운 기회들"). 1928년 좌익 반대파 데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1927년 4월에서 5월까지 나는 사회 세력들이 그들의 정치적 판단을 제출하지 않는 한, 비록 러시아에서 보다도 중국에서의 상황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에 헤아릴 수 없이 덜 적합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경우에 대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의 슬로건을 지지했다(보다 정확하게는, 나는 이 슬로건과 함께 했다). 이 판단이 거대한 역사적 실천(무한[武漢]의 경험)에 의해 제출된 후에는, 민주주의 독재의 슬로건은 하나의 반동적인 힘이 되었으며 불가피하게 기회주의나 혹은 모험주의로 귀결될 것이다."(우리의 번역)
트로츠키는 2차 중국 혁명의 패배의 중요한 정치적 교훈을 "중국의 정치 정세와 볼셰비키-레닌주의 반대파의 임무들"(1929년 6월)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결코 그리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다른 계급의 당으로 들어가거나 조직적으로 다른 계급의 당과 통합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당이 공산주의자의 정치에서 첫 번째요 결정적인 조건이다."
1927년 12월 15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에 굴복했다. 약 1500명의 반대파들이 곧 축출되었고, 영구혁명을 비난하는 조건에서만 재입당이 허용되었다. 이 대회는 공동 반대파의 종말을 의미했고, 좌익 반대파 자신에게 충격파를 주었는데, 반대파 성원들의 일부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민족주의적 교조에 스스로를 화해시켰다. 프레오브라젠스키는 "우리 반대파 속의 고참 볼셰비키들은 영구혁명의 취지와 관련하여 트로츠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분리시켜야만 했다."고 선언했다(아이작 도이처의 무장하지 않았던 예언자에서 인용됨).
트로츠키가 재무장하다
소련에서의 관료적 찬탈과 중국에서의 처참한 결과들에 반대하는 투쟁이라는 전대미문의 도전에 맞서 일어서면서, 트로츠키는 레닌주의 당 지도자로서 성장해야만 했다. 자신의 자살에 관하여 아돌프 조페가 트로츠키에게 남긴 편지가 국제 좌익 반대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서 트로츠키의 결의를 강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조페가 치료를 받기 위하여 외국 여행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1927년 11월 16일자 편지에서 조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나는 당신이 레닌의 꺾이지 않는 의지, 그의 불굴의 의지, 미래 다수파를 예견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에 기꺼이 심지어 혼자라도 남아 있겠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항상 믿어왔다.... 1905년의 시작부터 당신은 언제나 정치적으로 옳았다. 그리고 나는 레닌이 심지어 1905년에 그가 아닌 당신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것을 내 자신의 귀로 들었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종종 과대평가된 합의나 타협을 위해서 당신의 올바름을 포기했다. 이것은 실수이다."
조페는 자신의 죽음의 글에서 1905년에 러시아를 위해서 트로츠키가 제출했던 영구혁명의 이론의 올바름을 레닌이 분명하게 인정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트로츠키가 막 영구혁명의 지구적인 타당성을 파악했을 때 조페는 이것을 썼다. 딱 한번 트로츠키는 과거 좌익 반대파의 일원이었고 스탈린에 굴복했던 칼 라데크에 대한 논박으로서 계획되었던 영구혁명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레닌의 "비타협적인 이데올로기적 경계와 진정으로 혁명적인 당의 중핵을 벼르고 단련시킬 목적을 위하여 필요한 순간 분리라는 정책"을 받아들였다.
1928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6차 대회에 제출되었던 스탈린/부하린의 강령 초안에 대한 비판이었던 트로츠키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강령 초안 – 근본들과 관련한 비판"(레닌이후의제3 인터내셔널에서 영어로 출판됨)이 국제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강령적 창립 문서였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의 관료적 퇴행에 반대하는 투쟁을 식민지와 반(半)식민지 세계를 위한 강령의 핵심으로서의 영구혁명에 대한 방어와 연결시키면서 2차 중국 혁명 패배의 교훈들을 날카롭게 도출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의 슬로건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올가미"로 낙인찍었고, 영구혁명이 "이론에서 맑스와 레닌의 저작들에 의해, 실천에서 10월 혁명의 경험에 의해 완전하게 입증되고 증명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확언했다.
"중국 혁명에 대한 요약과 전망들"(역시 레닌이후의제3 인터내셔널에 포함된)에서, 트로츠키는 짧은 시기 동안 공산주의 노동자들이 광주(Canton)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그들의 강령이 노동자 생산통제, 대산업, 은행들과 운송에 대한 국유화, “그리고 심지어 부르주아지 주거지와 모든 부르주아지 재산에 대한 노동자들의 혜택을 위한 몰수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만약 이것들이 부르주아지 혁명의 방책들이라면, 중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무엇 같아 보일 것인가?"
트로츠키는 영구혁명을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정립으로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가 두 개의 상호 배타적인 관점들에 직면하게 된 것이 정확하게 이곳이다: 영구혁명이라는 국제혁명의 이론과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민족 개량주의 이론. 후진국인 중국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상의 어떤 국가도 사회주의를 자기 자신의 국가적 경계들 내부에서 건설할 수는 없다."
- 영구혁명
트로츠키는 영구혁명의 첫 번째 러시아어 판에 대한 1929년 11월의 머리말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민족적 기초들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들 기초들 안에서는 완수될 수 없다. 민족적 틀거리 안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유지는 비록 장기간 지속되었던 것 중의 하나인 소련의 예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사태의 임시적 국면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고립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서는 필연적으로 내외부적 모순들이 성취된 성공들과 함께 자라난다. 만약 그것이 고립된 채로 남는다면,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는 결국 이들 모순들에 의해 파괴되고야 만다."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던 수백 명의 젊은 중국 공산당 중핵들이 좌익 반대파로 획득되었다. 그러나 1927년 4월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참수 이후가 되어서야 진독수(陈独秀Chen Duxiu)와 같은 중국에 있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트로츠키의 투쟁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 때 중국 공산주의의 창립 지도자인 진독수는 스탈린의 계급협조주의가 만들어냈던 유혈참사에 대한 희생양으로 만들어졌었다. 비록 고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독수는 당 최고위층 중핵들 가운데에서 국민당으로의 청산이 패배의 뒤에 있었다는 그의 관점을 공유했던 많은 방어자들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 당에서의 분파투쟁들에 관하여 들었으나 그것들이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지에 대하여는 모르고 있었다. 중국에서의 스탈린주의적 배신에 대한 트로츠키의 비평을 그들이 마침내 읽었고, 진독수와 많은 다른 이들이 트로츠키주의로 획득되었다. 진독수는 한편으로는 코민테른의 재앙적 노선을 이행하였지만, 자신의 실수들에 관하여 충분히 생각하였었고, 그것이 그를 보다 나은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다.
스탈린 정권은 많은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죽였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서, 소비에트 당과 국가의 통제권을 찬탈했던 관료집단의 꼭대기라는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스탈린은 사실상 생존해있던 "고참 볼셰비키" 중핵들 모두를 살해했거나 아니면 제거했다.
중국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극도로 부담이 되는 조건들 하에서 도시 노동계급 내부에서의 뿌리들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장개석의 반혁명적 테러가 최고조에 있을 때에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에 대한 살인적 점령이 있었다. 우리가 "중국 트로츠키주의의 기원들"(스파르타시스트 [영어판] 53호, 1997년 여름)에서 설명하였듯이: "1930년대에는 상하이와 홍콩에서 몇몇 산발적인 노동자들의 경제투쟁들이 있었는데, 여기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지도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노동조합들, 그리고 여타 합법조직들이 분쇄되었던 노동대중의 전반적인 의기소침이 지대한 정치적 희생을 낳았다.”
SACP " 2단계" 멘셰비키주의
중국에서의 패주의 여파로, 스탈린화된 코민테른은 세계혁명의 긴박함을 선포하고 다른 노동자들의 조직들과의 공동전선을 단념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 등이 지도하던 기존의 노동조합들에 대당하는 "적색 노동조합들"을 건설하는 자신의 종파주의적, 사이비 좌익적 "제3기" 노선에 착수했다. 제3기는 소비에트 관료집단이 직면했던 국내 환경들로 인하여 주로 추진되었다. 부유한 농민들(쿨락들)의 반혁명적 상승이라는 위협이 스탈린으로 하여금 특히 그의 동맹자 니콜라이 부하린이 분명하게 말했던 스탈린의 우익적, 화해주의적 정책들과 결별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스탈린은 비록 독단적이고 모험주의적 방식, 그리고 목이 부러질 정도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속도로 관료집단에 의하여 수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산화와 계획에 입각한 산업화라는 강령을 좌익 반대파로부터 차용했다. 이러한 선회가 라데크와 프레오브라젠스키와 같은 지도적 반대파들의 항복을 촉진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자신의 민족주의적 교조로부터 동요하지 않았으며, 자본주의 발전이 늦은 나라들에서, 그들은 중국 혁명에 대한 배신으로 귀결되었던 단계주의적 청산주의적 노선을 심화시키고 명문화했다. 최근 남아프리카 공산당(SACP)의 2007년 7월 당대회에서 당 지도부가 제출했던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의 결의안으로부터 아래의 문장들을 인용하고 있던 문서는 이것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했다:
"우리의 목표는 아프리카 민족평의회에 있는 노동자들의 지도부와 공산당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아프리카 민족평의회를 백인 부르주아지 계급과 영국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조합들, 농민 조직들 등에 기초한 민족주의 혁명조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어야 한다[우리의 반복: "이 조직[아프리카 민족평의회]에 있는 노동자들의 지도부와 공산당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남아프리카 노동인민들의 민족혁명운동의 발전은 ... 남아프리카 공산당의 주요 임무들 가운데 하나를 구성한다."
- 12차 당대회 이전에 상정된 것으로서의 SACP 11차 당대회 중앙위원회의 정치보고(괄호들과 강조는 원문)
코민테른 6차 대회로 되돌아가면서, 오늘날 SACP 지도부는 부르주아지-민족주의 아프리카 민족평의회(ANC)에 대한 자신의 계속적인 굴종과 아파르트헤이트의 종말을 고하면서 1994년에 권력에 올랐던 민족주의 인민전선인 자본가 ANC가 이끌던 삼자동맹에 대한 SACP의 참여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이라는 무화과 잎사귀를 부여한다. 이것은 레닌의 볼셰비키주의의 "정설"이 아니라 스탈린주의적 배신의 그것이다. 자본가 계급이 백인(이제는 백인이 아닌 약간을 포함하는)인 남아프리카에서는, 근본적인 계급 분열이 인종의 색이라는 렌즈에 의하여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SACP는 자신의 ANC와의 계급협조적 동맹을 훨씬 더 공공연하고 뻔뻔스럽게 발전시키기 위하여 남아프리카 사회의 이러한 역사적 성격을 활용한다.
코민테른 2차 대회가 제국주의 열강들에 맞서는 민족해방 투쟁들을 지지할 것을 요구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백인 우월주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맞서 투쟁하는 ANC에 대한 군사적 지지를 제공하는 것은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에게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은 소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운동이었던 것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명령했다. 오늘날 부르주아지 ANC와 그 파트너 SACP가 남아프리카의 백인 부르주아지 계급과 월스트리트와 런던에 있는 그들의 상위 파트너들을 위하여 흑인이 대부분인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잔혹한 착취를 강제하는 가운데 신-아파르트헤이트 자본주의를 통치한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은 남아프리카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부르주아지 계급 세력들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이 승리를 위한 사전 조건이다.
자신의 정부 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SACP는 삼자동맹이 부르주아지 정부가 아닌 것처럼 해야만 한다. SACP는 "1994년 이후의 민주적 국가는 본래적으로 자본주의가 아니라 실제로는 첨예한 계급간 경쟁이라는 실체"이며 노동자들이 여하튼 그 국가에 대한 "헤게모니" 혹은 통제권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라는 망토를 계속 걸치기 위하여, SACP 지도부는 10월 혁명의 경험을 왜곡해야만 한다. "볼셰비키 혁명의 교훈들"(Umsebenzi[노동자] 온라인, 2002년 11월 6일)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우리의 환경들 속에서 우리는 '총체적' 권력장악 혹은 세계체제와의 '완전한' 결별이라는 환상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한다. 우리는 또한 민족민주주의 혁명의 임무들과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이라는 임무들 사이에 만리장성이 있다는 사상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한다.... 우리는 만약 조금이라도 성공한다면 필연적으로 반제국주의적, 비자본주의적 성격들을 가질 수밖에 없는 총체적이고 변증법적인 과정으로서 인구의 다수인 흑인, 특히 아프리카인의 해방을 위하여 진행 중인 민족민주 혁명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위대한 볼셰비키 혁명과 그것의 결과물들로부터 부분적으로 우리가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 교훈들이 있다."
SACP가 “환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일환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장악과 전 지구적 제국주의의 멍에에 대한 “완전한” 타도이다. 남아프리카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가리고 볼셰비키주의에 대한 자기 자신의 적대감을 덮어 가리기 위하여, SACP 지도부는 “민족민주 혁명”이 유기적으로 사회주의로 성장하는 무엇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1917년 러시아에서의 부르주아지 임시정부는 사회주의 정권으로 성장해간 것이 아니라 볼셰비키가 지도했던 프롤레타리아트 봉기에 의하여 타도되었다. 오로지 부르주아지 국가가 분쇄되고 농민의 지지를 받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던 소비에트 권력에 대체되었을 때에서야 민주주의 혁명의 임무들을 완수하는 것이 가능했다. 트로츠키 자신이 지금처럼 “성장해 나가는”이라는 개념이 부르주아지 조직들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제공하기 위한 겉치레 사회주의자들의 정당화였던 1931년에 그것의 정체를 폭로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권력 그리고 나서는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은 부르주아지 권력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하나의 계급의 권력은 다른 계급의 권력으로부터 ‘성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손에 소총을 쥔 다른 계급의 권력으로부터 낚아 채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 프롤레타리아트 정권의 민주주의적 임무들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적 임무들로 성장해 간다. 민주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진화적이고 유기적인 전화는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하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 “스페인 혁명과 그것을 위협하는 위험들”, 1931년 5월 28일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추구는 ANC와 같은 자본가 정당들로부터의 조직적 독립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정치적 반대도 또한 필요로 한다. 국제공산주의동맹(제4 인터내셔널주의자)의 지부인 스파르타시스트 남아프리카는 삼자동맹과 결별하고 흑인이 중심이 되는 노동자 정부를 위하여 투쟁하는 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요구를 제기한다. 이것은 영국의 노동당 정부들처럼 자본주의를 통치하는 노동당 정부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를 타도하는 혁명적 투쟁을 의미한다.
남아프리카의 현실은 영구혁명의 필요성을 온전하게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광산들과 공장들에서 잔혹하게 착취당한다. 시골에서는, 수백 만의 흑인들이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분리 정책에 따라 설치되었던 반(半)자치 흑인 거주지역에서 절망적인 빈곤에 처해 있는 반면 생산적인 토지는 무가치에 가까운 흑인 노동인민들의 노동에 의존하는 백인 농장주들이 압도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남아프리카를 계속해서 파괴하는 AIDS의 유행은 무료 항레트로바이러스제의 입수를 포함하는 양질의 공중보건을 위한 투쟁과 이 질병의 확산에 기름을 부어 온 빈곤뿐만 아니라 종교적 반여성적 후진성에 맞서는 투쟁을 요구한다.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 전역과 그 이외의 지역이라는 AIDS의 범위와 그것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 특히 선진산업국가들에 있는 가용한 모든 과학적 자원들을 집합시킬 필요성이 부르주아지 민족주의라는 협소한 틀거리와 결별할 것을 요구한다. 유색인종 지정지구들과 판자촌들에 있는 수백 만의 인민들을 위한 충분한 주택, 모든 인민들을 위한 전기와 깨끗한 물, 양질의 무상 교육, 로볼라(신랑이 신부집에 주는 돈)와 여성 생식기 절단의 근절: 이들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책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국제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하에서의 경제와 사회의 사회주의적 변형을 필요로 한다.
레온 트로츠키의 영구혁명 이론의 발전과 확장
4부
1925-27년 중국 혁명의 패배에 뒤이어 영구혁명의 개념을 일반화하고 확장하는 가운데, 레온 트로츠키는 영구혁명(1930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적어도 이것은 가장 후진적인 식민지 국가를 포함하는 모든 나라가 사회주의는 아닐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해서는 무르익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제국주의 시대라는 조건들 하에서, 민족민주주의 혁명은 그 국가의 사회적, 정치적 관계들이 인민대중들의 지도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권력에 앉힐 정도로 성숙했을 때에만 오직 승리적인 결과로까지 수행될 수 있다. 만약 아직은 이러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은 단지 매우 부분적인 결과들, 노동대중들에게 전적으로 반하는 결과들만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1905년에,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주변에 농민대중들을 통합시키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혁명은 중도에 멈추었으며, 그리고는 점점 더 아래로 가라앉았다. 예외적으로 우호적인 정세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도부가 중국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위한 투쟁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중국에서는, 민족적 임무들은 국민당 정권에서 비참하고, 불안정하며, 불충분한 해결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트로츠키 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영구혁명의 임무들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피억압 대중들을 지도할 만큼 충분한 사회적 비중을 가지는 현대화되고 집중되어 있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없는, 아프가니스탄, 동티모르, 르완다와 같은 특히 후진적인 국가들이 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1980년대 친 소비에트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주의당(PDPA)의 근대화되고 있던 지식인들과 군 장교들과 관련하여 우리가 언급하였듯이, 급진주의자들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짜르 러시아 사이의 거대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1세기 전 플레하노프의 투쟁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이 있다. 1880년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역시 상대적으로 하찮은 사회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플레하노프는 논쟁적이고 사상적인 투쟁(이 글의 1부를 보시오)을 통하여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중핵을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했다. 결정적인 것은 사회의 근대화와 해방을 위한 투쟁을 자기 자신의 나라들의 국경 너머의 보다 선진화된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들과 연결시키면서 맑스주의적 국제주의의 기초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소규모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이슬람 성직자들에 의하여 더욱 작아지며, 적은 규모의 도시 인민은 고관들에 신세를 지고 있는 유목민들과 땅 없는 농민들의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1978년 4월에, PDPA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는데, 이것이 CIA가 지원하는 반동 이슬람 폭동을 유발했다. 1979년 12월 소비에트 적군이 개입했던 것은 PDPA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국제공산주의동맹 - 당시의 국제 스파르타시스트 경향 - 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적군을 환영하라! 10월 혁명의 사회적 성과들을 아프간 인민들에게로 확장하라!
우리는 소비에트 군대의 개입이 단지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던 반동분자들을 물리칠 기회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아프간 인민들의 삶을 훨씬 넘어서는 현대화된 삶을 사는 소비에트 중앙아시아로 아프가니스탄을 통합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이해했다. 1988-89년 모스크바의 고르바초프 정권에 의한 소비에트 군대들의 철수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참혹한 무자헤딘 지배의 길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동독과 그 이후 소련 그 자신에서의 자본주의 반혁명에 대한 수문들을 열었던 역사적 배신이었다.
왕조를 부르주아지 연합정부로 대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농민-게릴라 투쟁을 전개해온 모택동주의 세력들이 있는 절망적으로 가난한 네팔에서도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상대적으로 하찮은 정도이다. 그러나 네팔인들은 수십 년 동안 생존과 일자리를 위하여 인도로 국경을 넘어와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인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가 되고 있으며, 수십만 명의 네팔인들이 아시아의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다. 인도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준대륙의 사회주의 연맹을 위한 투쟁을 제기하면서 네팔과 기타 이웃 나라들에 즉각적으로 거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적 전망에 결정적인 것은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서의 노동자 정치혁명을 위한 투쟁과 제국주의와 국내의 반혁명에 맞서는 중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가 전제로 되어야만 하는 투쟁이다.
알제리 독립투쟁
오늘날 남아프리카와 남한과 같은 많은 반식민지 국가들에서는 농민의 역할이 더 이상은 1917년 러시아나 1925-27년 중국에서처럼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이래의 역사적 경험은 이들 국가들과 관련하여 불균등 결합발전으로 특징지어지는 영구혁명의 이론을 확증해왔다.
자본주의 지배의 타도로 귀결되지 못했던 "민주주의" 혹은 반(反)식민지 혁명들이 수행되었던 이들 국가들은 후진성의 늪에 빠진, 제국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부르주아지 국가들로 남아 있다. 전후 시대의 가장 급진적이고 영웅적인 식민지 혁명들 중의 하나였던 프랑스에 맞섰던 1950년대와 60년대의 알제리 독립투쟁이 적절한 예이다. 1954년 11월의 민족해방전선(FLN)에 의한 첫 번째 군사작전에서부터 알제리 대중들이 알제리로부터 식민지 지배자들을 몰아내는 데에는 백만 명 이상의 목숨을 바친 7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알제리 프롤레타리아트는 비록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지는 못했지만 민족해방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UGTA 노동조합 연맹은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FLN과 함께 1956년 7월의 거대한 총파업을 포함하여 일련의 강력한 파업을 조직했다.
1962년 마침내 독립이 쟁취되자 "자기 자신의" 인민들 위에서 군림하던 국내 지배계급과 함께 자본주의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헌신했던 FLN이 권력에 앉았다. 무비판적으로 FLN의 "사회주의적" 수사를 선동하던 다양한 좌익들은 독립 알제리에서 반(反)노동계급 부르주아지 정권의 강화를 돕는데 있어서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 알제리 공산당은 1956년에 FLN 속으로 청산했고, 공산당의 후계 조직은 FLN이 권력에 오르면서 곧바로 불법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은 독립 이후에 계속해서 선전가로, 행정가로, 그리고 UGTA 관료들로서 FLN 기구에서 봉사했다. 수정주의 "트로츠키주의자" 미셸 파블로가 아흐메드 벤 벨라[Ahmed Ben Bella]의 FLN 정부의 최고 경제고문이었으며, 노동계급을 자본가 정부에 얽어매는 데 있어서 유용했다.
FLN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을 금지했고, 조직화된 노동계급을 강력하게 통제했다. FLN은 프랑스의 식민주의에 맞서 용맹스럽게 투쟁했었던 수천 명의 여성들을 해산했고, 이슬람법에 따르는 것을 포함하여 여성의 종속을 강제했다. 그들의 투사들이 독립투쟁에서 예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베르베르[Berber] 소수민족은 심한 억압을 강요받았다. FLN의 지배는 잔혹한 군사독재와 여성을 노예화하고, 현대화 노력들을 되돌려 놓았으며, 노동자와 소수민족들에 대한 잔혹한 테러를 자행했던 대규모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의 성장을 위한 길을 닦았다.
쿠바 혁명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후진국들에서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파괴하고 제국주의 지배의 멍에를 타도했던 일련의 혁명들이 또한 있었다. 1949년 붕괴하고 있던 국민당으로부터 모택동의 농민에 기반한 인민해방군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이것이 낳은 국가는 스탈린주의 공산당(CCP)의 용어로 "4개의 계급들의 연합"에 기초한 "신민주주의"가 아니라, 비록 그 시초부터 관료적으로 기형화되기는 하였지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다. 유고슬라비아, 북한, 그리고 북베트남(1975년에 남베트남으로까지 확대되었다)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주도했던 사회전복들 또한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로 귀결되었다. 그 밖의 동유럽과 동독 등의 지역에서 소비에트 적군의 지원 하에 수립되었던 전후 "인민 민주주의들"에서 비슷한 사회적 전복들이 역시 발생했다.
1938년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창립되었던 제4 인터내셔널의 당시 지도자였던 미셸 파블로는 의식적인 혁명적 지도부의 중심적인 중요성을 부정하고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의 다양한 스탈린주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로의 청산을 주장하기 위하여 전후의 사회전복들을 활용했다. 이러한 수정주의가 1951-53년 제4 인터내셔널의 파괴로 귀결되었다. 1960년대 초반, 1953년에 파블로와 결별했던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지도부는 쿠바 혁명의 카스트로를 추종하던 소부르주아지 지도부에 아첨하면서 비슷한 수정주의적 결론들을 옹호했다("파블로주의의 기원"[스파르타시스트 21호, 1972년 가을]을 보시오).
피델 카스트로는 일시적으로 부르주아지 계급으로부터 소원해지고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독립되어 있던, 소부르주아지 지식인들과 농민 게릴라들의 세력인 7월 26일 운동을 지도했다. 일상적 정세에서였더라면, 미국의 지지를 받던 부패한 바티스타 독재를 1959년 1월에 타도한 이후 반란세력들은 부르주아지 계급의 통제를 다시 주장하기 위한 급진 민주주의 수사를 활용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수없이 많은 비슷한 운동들의 발자국들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1960-61년 구 자본주의 국가기구가 분쇄되면서, 카스트로 정권은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를 창출하는 가운데 미국 소유와 국내 자본가들의 소유물들을 국유화했다. 카스트로 정권에 하나의 모델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미 제국주의 야수의 손아귀로부터 겨우 90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채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경제적 지원들과 군사적 방패를 제공했던 소련의 존재가 이러한 발전에 결정적이었다.
카스트로의 소부르주아지 정권이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를 궁극적으로 철폐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의 권리 차원에서 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계급의 부재, 적대적인 제국주의로부터의 포위와 국내 부르주아지 계급의 도망, 그리고 소련에 의해 제공되었던 생명줄이라는 예외적인 환경들의 결과였을 뿐이다("쿠바와 맑스주의 이론", 맑스주의자소식지 8호를 보시오). 비슷한 환경들이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2차 대전 이후 스탈린주의자들이 지도했던 소부르주아지 세력들에 의하여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이 수립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SWP의 혁명적 경향(RT)에 기원을 두는 우리 경향은 SWP 다수파의 파블로주의에 맞서 트로츠키주의 강령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 속에서 탄생했다. SWP는 카스트로를 무의식적 트로츠키주의자로 그려내면서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단순한 민주주의적 요구들에서 시작되어 자본주의 생산관계들의 파괴로 끝나는 혁명의 길을 따라서, 끝까지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헌신하게 되는 지도부 하에서의 땅이 없는 농민들과 반(半)프롤레타리아트 세력들에 의해 수행되었던 게릴라전은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 권력을 잠식하고 그것의 타도를 앞당기는 것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이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경험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하는 주요한 교훈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식민지 국가들에서 혁명적 맑스주의 정당들을 건설하는 전략에 의식적으로 구체화되어야만 한다."
-SWP 정치위원회, "세계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조속한 재통합을 위하여", SWP 토론 소식지 24권, 9호(1963년 4월)
정확하게 반대의 입장에서, RT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의 이론을 고수했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험은 소부르주아지 지도부 하에서의 농민에 기반한 게릴라전은 그 자체로 반(反)노동계급 관료정부로 귀결될 수 있을 뿐임을 증명했다. 그러한 정권들의 수립은 제국주의의 쇠퇴, 스탈린주의적 배신들이 야기한 사기저하와 방향의 상실, 그리고 노동계급의 혁명적 맑스주의 지도부의 부재라는 조건들 하에서 발생할 수 있다. 식민지 혁명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지도부 하에서만 오직 분명하게 진보적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수정주의를 그들의 전략으로 구체화하는 것은, '식민지 국가들에서 혁명적 맑스주의 정당들을 건설'한다는 어떠한 경건한 소망이 아무리 동시에 표현되더라도, 맑스주의-레닌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맑스주의자들은 레닌이 반대하여 투쟁했던 전술들에 대한 사회혁명가당의 강령과 역사적으로 유사한, 사회주의로 향하는 농민-게릴라의 길에 대한 어떠한 모험주의적 수용에도 결연하게 반대해야만 한다.
-"세계 운동에 대한 결의안 초안", 1963년 6월 14일; 맑스주의 소식지 9호와, 최근 2004년 봄 스파르타시스트(영어판) 58호에서 재 출판됨.
하지만, 쿠바 혁명은 자본의 독재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사이에 "제3의 길"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쿠바 혁명은 영구혁명의 이론을 확증했다. 그러나 쿠바 혁명은 1917년 11월에 러시아에서 벌어졌었던 볼셰비키가 지도했던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과는 아주 달랐다. 다른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서처럼, 쿠바에서는 사회주의적 발전으로 더욱 전진하는 길이 기생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관료집단의 정치적 지배에 의해 막혔다. "일국에서 사회주의"라는 반혁명적 스탈린주의 교조를 고수하던 카스트로 정권은 세계혁명을 위한 투쟁에 적대적이었다. 그러기는커녕, 카스트로 정권은 학살로 귀결되었던 1970년대 초 칠레에서의 아옌데 인민전선 정부로부터 현재 베네주엘라의 휴고 차베스 민족-민중주의 정권에 이르기까지 "진보적" 부르주아지적 조직형식들을 주창해왔다.
소비에트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의 경우에서와 같이, 쿠바와 기타 남아 있는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서 필요한 것은 혁명적 국제주의에 기초한 노동계급 지배의 민주적 기관을 수립하는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을 통한 관료집단의 타도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러한 관점을 제국주의의 공격과 국내 자본주의 반혁명에 맞서는 노동자 국가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에 의거한다.
우리의 작은 힘이 다하는 한도에서, ICL은 자본주의 복구주의 세력들을 패배시키고, 노동자 국가들을 잠식해왔으며 결국에는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던 반혁명에 굴종했던 붕괴되고 있던 스탈린주의 정권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노동계급을 조직하기 위하여 동독과 소련에서 투쟁했다. 오늘날 우리는 중국, 쿠바, 베트남, 북한에 대하여 동일한 강령을 주창하며, 제3 세계로부터 미국, 일본, 그리고 서유럽의 제국주의의 중심 국가들에 이르기까지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사회주의 혁명들을 위하여 투쟁한다.
영구혁명 대 민중주의적 민족주의
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중부 유럽의 노동자 국가들의 반혁명적 파괴는 이들 사회의 인민들에게 재앙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세계의 노동자와 피억압 인민들에게 세계사적인 패배였으며, 세력균형이 극적으로 제국주의에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과거 노동자 국가들의 노동인민들은 엄청난 빈곤, 인종적 유혈사태, 그리고 기타 공포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제국주의 중심지들에서는, 자본가 지배자들이 노동자들이 힘들게 성취한 성과들에 도끼를 들었고, 이주자들과 소수민족들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이 수반되었다. 군사적으로 다른 어떠한 국가보다도 훨씬 우월해진 미국 제국주의는 특히나 중동과 기타 지역의 인민들을 마구 짓밟아 왔으며, 한편으로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긴축 방책들은 제3 세계를 한층 더 처참한 상황으로 내몰아왔다.
소련의 파괴로 인한 의식에서의 심대한 후퇴가 심지어 전투적 노동자들과 급진적 청년들까지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라는 맑스주의 강령을 기껏 공상으로서 기각하게 했다. 대신, 많은 좌익들이 베네주엘라의 휴고 차베스로 대표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부르주아지 민중주의적 민족주의의 재고양을 "21세기 사회주의"(차베스의 용어에 따른다면)로 향하는 길로서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환상들을 부추기고 있는 자들 가운데 하나가 카스트로 정권의 지지자이며, 자칭 트로츠키주의자이기도 한 쿠바 작가 셀리아 하트[Celia Hart]인데,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El Militante와의 최근의 인터뷰(7월 6일 쿠바 뉴스 온라인에서 번역되었다)에서 "베네주엘라의 혁명적 과정이 점점 더 급진좌익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하트는 "사회주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그만 두었던 많은 쿠바인들"이 "베네주엘라가 매우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보면서, 일부 사람들이 이른바 21세기 사회주의라고 오늘날 부르고 싶어 하는 이상한 방식들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고, 사회주의가 지역 자본가들에 대한 몰수 등이 없이 획득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선례에 따르고 싶어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에 대한 차베스의 요구에 관하여 말하면서, 하트는 "이것은 마치 1905년 러시아에서의 영구혁명의 테제가 어떻게 1세기 후에 생명을 얻는지를 보고 있는 것과 같다"고 덧붙인다.
비슷하게, 멕시코의 좌익 귈레르모 알메이라[Guillermo Almeyra]는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민주주의 혁명당(PRD)을 지지하는 신문인 La Jornada (2007년 8월 19일자)의 "21세기의 트로츠키"라는 제목의 글에서 "연대적 원조에 대한 베네주엘라나 쿠바 같은 빈곤한 국가들의 태도는 레닌이 공유했던 트로츠키에 의해 고안된 방침들에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새겨진다"고 주장한다. 과거 파블로주의자였으나 현재는 PRD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알메이라는 자신의 영구혁명에 대한 “방어”에서 레닌의 볼셰비키주의의 계승을 위한 트로츠키의 투쟁을 "민주주의" 대 "획일적인 당"에 관한 이야기로 후퇴시키며, "교조적인" 그리고 "탈무드 같은" 오늘날의 트로츠키 추종자들에 대한 경고로 끝맺는다.
알건 모르건 하트와 알메이라는 카스트로가 무의식적 트로츠키주의자라는 SWP의 노선을 반복하는 것이다. 휴고 차베스에 대하여 이것을 말하는 것은 참으로 깜짝 놀랄만한 것이다. 1998년 대통령 당선 이후, 차베스는 하늘로 치솟고 있던 석유가격으로 베네주엘라 부르주아지 계급이 짜냈던 엄청난 이윤의 일부를 하층 대중들을 위한 강화된 사회복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돌렸다. 한편, 정부는 계속해서 이윤을 긁어모으고 있던 외국 석유회사들에 대한 세금을 인상했다. 차베스 하에서의 사회적 방책들과 그가 자신의 아프리카와 토속 전통의 혼합, 즉 잼보를 자랑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는 배타적 순수혈통 백인 소수지배계층의 경멸을 받는다. 그는 또한 카스트로의 쿠바와의 그의 우정과 오만한 미국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난으로 인하여 워싱턴의 분노를 샀다. 2002년과 같은 미국의 지원을 받던 쿠데타 시도라는 사태에서, 우리는 차베스 정권에 대한 군사적 방어를 요구한다.
그러나 차베스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베네주엘라 노동자 운동에 대한 자본가 국가통제라는 정신질환자용 환자복을 더욱 조이는 쪽으로 움직여 왔으며, 하트조차 인정하듯이 베네주엘라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몰수를 지지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베네주엘라: 민중주의적 민족주의 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노동자전위 860호, 2005년 12월 9일)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59년 1월 1일 카스트로의 반란군이 하바나로 진군했을 때, 미국의 지지를 받던 바티스타 독재를 떠받치고 있던 부르주아지 군대와 나머지 자본가 국가기구는 무질서하게 붕괴했다. 카스트로가 1961년 쿠바 '사회주의'를 선언할 때, 쿠바 부르주아지 계급과 미국 제국주의자들과 그들의 CIA와 마피아 똘마니들은 모두 도망쳤고, 마지막 아이스크림 상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본가 재산이 몰수되었다. 반대로, 백악관의 위협과 도발에도 불구하고 차베스는 권력에 올라 자본가 국가의 꼭대기에서 통치하고 있으며, 베네주엘라 부르주아지 계급은 살아서 발길질을 하고 있고, 제국주의자들은 베네주엘라와의 번창하는 사업을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하트와 알메이라는 신자유주의 정치인들과 진배없는 노동자와 도시와 시골의 빈민의 승리에 대한 계급적 적대자들에 불과한 부르주아지 민중주의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을 거꾸로 뒤집는다. 영구혁명의 강령적 본질은 그들의 선언들이 아무리 "진보적"이거나 "반(反)제국주의적”이더라도 반(反)식민지 부르주아지 계급의 모든 세력들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계급적독립성을 위한 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은 모든 다양한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에 대한 반대 속에 혁명적이고 국제주의적인 노동자 정당들을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오직 실현될 수 있다. ICL은 사회주의 혁명의 세계 정당인 제4 인터내셔널을 재건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자본주의 스페인의 현대화
최근 수십 년 동안의 눈부신 산업발전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남한, 그리고 소위 동남아시아의 "호랑이" 경제들은 제국주의적 종속으로부터 탈출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럽 가장자리의 소수 국가들은 거대한 인명 손실과 전쟁들, 반혁명들, 그리고 기타 주요한 세계의 발전이라는 상황에서, 후진적 농경 사회들로부터 유럽 제국주의 컨소시움의 한 부분으로서의 현대화된 자본주의 국가들로의 발전을 이루었다. 예를 들면, 1차 세계 대전 이전 시대에 핀란드는 러시아 짜르 제국의 한 부분이었던 대규모 피억압 농민을 가진 경제적으로 낙후한 국가였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볼셰비키의 승리에 뒤이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성취하기 위한 시도가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던 매너하임 군사독재에 의해 유혈진압 되었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핀란드는 제국주의 유럽 속으로 편입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스페인은 영구혁명의 과제들이 분명했던 불균등 결합발전의 주요한 예였다. 다수의 농민이 과거 봉건 귀족들로부터 유래한, 도시 부르주아지 계급과 심대하게 중복되었던 지주계급에 의해 잔혹하게 착취당했다. 아동 교육을 독점하고 있던 강력한 카톨릭 교회가 국가의 최대 지주였으며, 또한 산업과 금융에 주요한 투자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국가는 자신의 국경 내부에 바스크와 카탈로니아와 같은 피억압 민족들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 후진성과 함께, 스페인에는 또한 시골에 있는 자신들의 가족들과 긴밀한 연결을 가지고 있던 다수의 젊은 농민들로 이루어진 길들여지지 않고 전투적인 노동계급이 있었다.
1936-39년의 스페인 내전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가능성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는 중도주의 POUM(맑스주의 통일노동자당)에 의하여 또한 배신적으로 지지를 받았던 인민전선인 부르주아지 공화주의 정부의 대들보였던 스탈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배신당했다. 주로 스탈린주의자들의 손에 의해 자행되었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무장해제와 억압을 통하여, 인민전선은 결과적으로 거의 40년 동안 철권으로 스페인을 지배했던 최고 사령관 프란스시코 프랑코의 우익 세력들의 승리를 위한 길을 닦았다.
경제와 정치적 수준 모두에서 1930년대와 1980년대 사이의 스페인에서의 발전은 많은 부분 국제정세의 변화에 의해 결정되고 조건지어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소련에 대항하는 제국주의 냉전의 일환으로서 서유럽 자본주의 정부들과의 정치적, 군사적 동맹(나토)을 만들었다. 프랑코 정권은 미국 제국주의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스페인을 과거의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스페인은 건설되고 있던 유엔에 대한 가입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1953년에, 워싱턴은 스페인 미군기지에 대한 대가로 스페인에 대한 유엔의 경제봉쇄 제재를 풀었다. 스페인은 미국 정부대부의 수혜국이 되었고 더욱 중요하게는 서유럽의 나머지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연계를 증가시키기 시작했다.
1960년대가 시작되면서, 스페인은 급속한 경제성장률을 경험했고, 이것이 결국 이탈리아에 비해 그렇게 낮지 않은 일인당 1년 국내총생산(2만5천3백 달러)을 가진 압도적으로 도시화되고 문화적으로 세계화된 사회로 귀결되었다(이코노미스트, 통계로 본 포켓월드, 2007년). 스페인과포르투갈의경제적변형(1978년)에서, 미국 경제학자 에릭 바크라노프(Eric N. Baklanoff)는 스페인의 "경제기적"으로 불리던 것의 근저에 있는 국제적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스페인 생산물들에 대한 급등하던 시장들을 제공했고, 돈을 소비할 수백 만의 관광객들을 보냈으며, 스페인의 공장들과 부동산에 투자했고, 상당한 수의 스페인의 '잉여' 노동력을 고용해주었던 것은 국제경제, 그리고 특히 상당부분 유럽경제공동체와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사적인 외국인 투자가 1960년에 4000만 달러에서 1973년에는 거의 8억 달러로 솟구쳤다. 스페인의 상대적으로 값싼 노동력에 이끌린 미국, 독일, 그리고 영국의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투자를 제조업, 특히 자동차와 화학 산업에 집중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의 경제호황이 소농 경작을 효과적으로 청산할 수 있도록 했다. 농경 노동력이 1950년 530만에서 1975년 290만으로, 그리고 다시 1980년에는 240만으로 줄었다. 자동화되지 않은 노동과 우마에 의존하던 소규모 가족소유가 대규모의 기계화된 농업으로 점차적으로 대체되었다. 농경에 종사하는 노동력의 비중이 1950년 48%에서 1990년 13%로 낮아졌다(Carlos Prieto del Campo, "스페인의 봄?", 신좌익평론, 2005년 1-2월). 현재, 스페인의 농경 노동력은 주로 북아프리카와 기타 지역으로부터의 이주자들로 구성된다.
1975년 프랑코의 사망 이후, 스페인은 경제적, 정치적 요구들을 제기했던 대규모 노동자 파업의 물결을 경험했다. 이 시점에서 스페인 지배계급과 워싱턴과 나토 유럽 자본들의 상층 파트너들은 사회 정치적 질서를 복구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프랑코 정권 하에서 불법화되었던 스페인의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들과의 협상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977년 후반에, 이들 정당들의 합법화와 "민주화" 약속에 대한 대가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지도자들은 내전 종식 이후 스페인에서 부르주아지 지배에 대한 최대의 위협을 끝내면서 노동자 운동을 해산했다. 서독 사민당에 의해 훈련받은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그때 이후 안정적인 부르주아지 의회질서의 보루가 되었다.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과 연계되는 역사적 임무들과 관련한 영구혁명의 전망은 분명하게 스페인에 더 이상은 적용될 수 없다.
아일랜드가 역사적으로 주요하게 농경적 경제와 사회에서 카톨릭 교회에 의한 지배적 역할을 포함하는 사회경제적 후진성을 가진 유럽의 또 다른 국가이다. 게다가, 아일랜드 카톨릭 민족의 상당한 부분이 영국 제국주의 국가의 일부인 얼스터 프로테스탄트가 지배하는 북아일랜드 소지역국가에서 피억압 소수민족을 구성한다.
지리적으로 상호침투해 있는 이들 인민들 사이의 격렬한 민족적 분쟁에 관하여 말하면서, 우리는 "아일랜드에 관한 테제들"(스파르타시스트 24호, 1977년 가을)에서 "중동과 사이프러스에서와 같은 상호침투된 인민들이라는 여타 상황들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는 트로츠키주의의 영구혁명 이론의 주목할 만한 확증이다."라고 썼다. 테제들은 상호침투된 인민들의 경우에는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는 민족문제에 관한 어떠한 민주적이고 공정한 해결이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한 환경들에서는,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 국가의 수립이라는 형식으로 하나 혹은 다른 인민들에 의한 자기 결정권의 행사는 다른 쪽에 대한 그러한 권리의 부정만을 낳을 수 있을 뿐이다." 북쪽에서의 아일랜드 카톨릭의 민족적 억압에 반대하는 한편으로, 우리는 또한 카톨릭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얼스터 프로테스탄트 인민들에 대한 억압을 의미하게 될 강제적인 아일랜드의 재통일에 반대한다. ICL의 지부인 영국 스파르타시스트 동맹은 북아일랜드로부터의 영국 군대들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며, 영국 제도(諸島)의 공화국 연맹 속에서의 아일랜드 노동자 공화국을 요구한다.
하지만, ICL 내부에서의 계속된 토론으로 이러한 조건에서 영구혁명을 말하는 것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민족문제에 관한 민주적 해결을 부르주아지 혁명의 역사적 과제들과 뒤섞는 이론적 혼란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세기가 넘는 동안에, 아일랜드는 영국 제도의 경제에 편입되어 왔고, 아일랜드 프롤레타리아트의 많은 부위가 런던과 기타 도시들의 공장들과 건설 현장들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수십 년 동안에 아일랜드의 유럽연합 회원자격이 이 나라의 한층 더한 경제발전에 많은 역할을 해왔다.
영구혁명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적 문제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다. 많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는 현재의 부르주아지 질서를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봉건적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반동적 기구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스페인, 영국, 일본의 왕조, 이탈리아에서 바티칸의 특권화된 역할 등이 그것이다. 미국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전략적 문제인 흑인 인민에 대한 구조화된 억압이 노예소유의 유산이다. 이들 모든 경우들에서는,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만이 민족적, 인종적 억압을 일소할 수 있다. 이것은 인민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 전위정당들을 건설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를 위하여!
트로츠키가 영구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펼쳐 보였듯이,
"민족적 경계 내부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부르주아지 사회의 위기들의 기본적인 원인들 중의 하나가 부르주아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력이 더 이상 민족국가의 틀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민족적 차원에서 시작되어, 국제적 차원으로 전개되며, 세계적 차원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사회주의 혁명은 보다 새롭고 보다 넓은 단어의 의미에서 영구혁명이 된다; 사회주의 혁명은 우리 지구 전체에서 새로운 사회의 최종적인 승리 속에서만 오직 완성을 성취한다."
멕시코로부터 남아프리카 등 다른 지역에 이르기까지, 많은 좌익들은 노동자 혁명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분쇄될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미국의 엄청난 군사적, 경제적 강력함을 지적한다. 미국과 다른 자본주의 열강들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들에 엄청난 장애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들은 깊은 불만들과 해결될 수 없는 모순들을 가진 계급으로 분열된, 필연적으로 계급투쟁이나 기타 사회적 투쟁들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사회들이다. 격렬한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그리고 노동계급의 사회적 힘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 속에서 노동계급을 끈질기게 교육하는 혁명정당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위하여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에 반대하는 모든 피억압 인민들을 위하여 투쟁하는 계급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혁명의 예비조건들은 세상 곳곳에서 다를 것이다. 이들 조건들이 충족될 때, 어떤 특정 국가와 세계의 정세는 오늘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며, 노동계급의 의식은 중대하게 변해있게 될 것이다. 레닌주의 전위정당들을 건설하기 위한 우리의 투쟁은 그러한 정당들이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리게 될 때,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의식에서의 질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것이라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반식민지적 세계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들은 제국주의 심장부들에서의 노동자들의 투쟁들과 통합적으로 얽혀있다. 멕시코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다인종의 미국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거대한 충격을 주게 될 것이며, 미국의 다인종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점증하는 라틴 계열이 미국에서의 노동자 투쟁들과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노동자 투쟁 들 사이의 인간 가교가 될 것이다. 남아프리카에서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의 상승은 전 세계적으로 노동인민과 청년들 사이에서, 특히 미국과 브라질에서 노동계급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층을 이루고 있는 흑인에만 국한되지 않고, 절대적으로 강력한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남아프리카에서의 노동자 혁명은 또한 사하라 남쪽 아프리카의 지역 무장경찰을 파괴함으로써 대륙 전체에서 투쟁들을 촉발 할 것이다. 반대로, 제국주의 국가들 중 하나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권력 장악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엄청난 혁명적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1994년 노동자전위 시리즈, "남아프리카 화약고"(흑인의역사와계급투쟁 12호[1995년 2월]에서 배출판 됨)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분간 남아프리카는 제3세계의 반(半)식민지들을 북아메리카, 서유럽,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국가들에 속박하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약해진 고리이다. 그 체인을 가장 약한 고리들에서 끊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 세력들을 조직해야 하고, 모든 피억압 인민들의 사악한 적인 국제 자본에 대항하는 동맹을 추구하는 가운데 제국주의 심장부들에 대한 전투를 조직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따라서 남아프리카 볼셰비키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은 진정으로 트로츠키주의적인 제4 인터내셔널을 재건하기 위하여 우리 국제공산주의동맹이 수행하고 있는 투쟁과 분리할 수 없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은 분명 쉽지는 않다. 그러나 진짜 불가능한 것은 패배들과 사기를 저하시키는 배신이라는 계속되는 사악한 순환에 불과한 것으로 귀결되고 마는, 계급의 적에 대한 노동계급의 굴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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