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과 좌익들
그들은 왜 이슬람 반동을 지지했는가
한 가지 의미에서, 이제는 샤에 반대하여 이슬람 야당을 지지했던 좌익들, 특히 표면상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논박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우리는 권력을 장악한 호메이니가 베일을 재도입할 것이고, 야만적인 징벌들(태형, 사지절단)을 복구할 것이며, 샤가 했던 것만큼이나 민족적 소수계들을 진압하고 좌익들과 노동자운동을 분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이것은 제국주의의 선전이고, 호메이니는 훌륭한 진보적 투쟁을 지도하고 있다고 소리쳤다. 그래서 영국의 한 자칭 트로츠키주의 그룹은 아래와 같이 비난했다:
“스파르타시스트들은 뮬라[이슬람 율법학자]가 이끄는 야당에 대한 일련의 비난을 가하고, 그 결과로서 그들은 그 운동을 하나의 ‘종교적 반동’으로 성격규정한다. 이들 몇 몇 비난들은 가을 내내 미국 언론을 도배질했던 배외주의적 쓰레기에 대한 무비판적 반복에 이른다. 그들은 뮬라들이 이란을 서기 7세기로 되돌리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돌로 쳐 죽이기, 공개 교수형, 그리고 태형 등의 이슬람 법의 야만적인 징벌들을 도입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베일 착용을 강제하고 싶어하고, 샤에 의하여 여성에게 부여된 권리들의 제거를 원한다....”
- 노동자 권력, 1979년 2월
그래서?
이제는 이란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뉴스가 국제스파르타시스트경향(iSt)가 분명하게, 반박의 여지가 없게, 100% 옳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중간계급 자유주의 여성들로부터 게바라주의 게릴라들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호메이니의 혁명에 속아 넘어 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비통한 외침들이 테헤란의 거리들을 가득 메우고 있다. 비극적으로, 뮬라들의 반동적 종교적 목적들을 경고했던 혁명가들의 소리는 “반제국주의” 아야톨라[이슬람 시아파의 종교지도자]에 대한 찬양들을 노래하던 기회주의자들의 아우성 속에 묻혀버렸다. 그 대가를 치를 사람들은 이란 대중들이다.
불행하게도, 이곳과 유럽의 우리의 주요한 반대자들은 너무나도 냉소적이고 뮬라들의 혁명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의 즉각적인 후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나머지, 자신들의 입장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호메이니를 지지했다는 것을 애매하게 만들거나 아마도 부정하거나,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정교한 단계주의적 이론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일부 스스로를 혁명가라고 생각하는 인자들은 호메이니의 보안관들이 베일에 항의하는 여성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광경에 단지 충분히 충격을 받아 샤에 대한 뮬라들의 반대에 대한 자신들의 연대를 다시 고려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좌익들이 이란에서 이슬람반동을 지지하도록 자신들을 이끌었던 반맑스주의적 방법론과 결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내일 이집트, 인디아, 혹은 인도네시아의 호메이니들을 지지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친 호메이니 좌익 그룹들의 방법론적 주장들을 논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그들이 어떠한 것도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메이니가 대중들을 거리로 이끌었다는 것이 모든 주장의 시작과 끝으로 묘사된다. 뉴욕에서 있었던 3월 4일 포럼에서,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지도자 배리 셰퍼드는 스파르타시스트들에 맞서 아래와 같이 외쳤다:
“혁명가들은 왕조에 맞서서 호메이니와 이 혁명과 함께 있었고, 거리의 대중들과 함께 있었다. 오로지 반혁명분자들만이 그 싸움으로부터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인기가 있으면 뒤쫓아라”가 이들 고질적인 꽁무니주의자들의 모토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자들의 본능은 레닌주의가 아니라 레밍들에 더 가깝다. 그러한 “주장들”은 진지한 정치적 대응을 용납하지 않으며, 그럴 가치도 없다.
영국의 작은 중도주의 노동자권력 그룹이 친호메이니 “맑스주의자들”이라는 이론적으로 무(無)가 된 것에 대한 부분적 - 매우 부분적인 - 예외이다. 이란과 관련한 우리에 반대하는 이들의 논박들은, 이 자들의 경우에도 역시 꽁무니주의가 근본적인 동기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 대한 뻔뻔스러운 꽁무니주의를 넘어서는 몇 몇 주장들을 제기한다. 이것은 아마도 영국의 명목상의 트로츠키주의라는 스펙트럼에서 노동자권력 그룹의 변변찮은 지위보다도 더 적은 노동자권력의 정치적 진지함을 보여준다. 소규모 국내에 제한된 중도주의 그룹으로서, 노동자권력은 iSt의 영국지부를 자신의 왼쪽에 있는 강력한 경쟁자로 여긴다. 만약 노동자권력이 스파르타시스트동맹/영국을 가망없는 초좌익 종파주의자들로 깍아내릴 수 없다면, 노동자권력은 파블로주의적 국제맑스주의그룹, 토니 클리프의 노동자주의/개량주의적 사회주의노동자당 등으로부터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인자들을 끌어당길 기대를 할 수 없다. 하지만, 노동자권력의 대단히 일관성없는 논박들이 샤에 대항하여 뮬라들을 지지했던 그런 명목상의 트로츠키주의 그룹들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유용한 표적을 제공한다.
부하린 글들에 대한 비판적 비평들에서, 안토니오 그람시는 맑스주의적 논객들은 자신들의 반대자들의 가장 약한 주장들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주장들을 논박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람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시도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개량주의, 그리고 중도주의 반대자들의 이란에 대한 입장들에 그들이 실제로는 가지고 있지 않는 이론적 일관성을 부여할 수 밖에 없다.
이슬람 야당: 반동적 대중운동
피비린내 나는 샤 정권의 몰락 전 지난 수주일 동안,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트와 좌익들을 포함하여, 이란사회에 있는 왕조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은 호메이니의 뒤에 집결했었다. 그러나 호메이니의 운동의 핵심은 뮬라들(18만명이 넘는 시아파 무슬림 성직자들)과 나라의 현대화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전통 상인계급인 바자리이다. 이 전통 사회계급은 경제적 진보에 의하여 사라질 운명이며, 그래서 자연스럽게 반동적 사상이나 그것의 정치적 표현들에 치우치기 쉽다.
기회주의자들에게는, 반동적 정권에 맞서는 반동적 대중의 투쟁으로의 조직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는 반동적 대중운동들의 예들을 제공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축출했던 대중운동을 조직했다. 1920년대 미국에서는, KKK가 수만명의 활동가들을 거리로 조직해낼 수 있는 역동적인 성장하던 조직이었다.
독일 파시즘의 경험은 우리의 개량주의적/중도주의적 반대자들이 소부르주아지 계급에 기초한 반동적 대중운동들의 가능성을 부정하기에는 좌익의 기억에 너무도 충격적인 충격을 가해왔다. 그러나 이란처럼 후진적인 반식민지 나라들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노동자권력은 우리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논박을 한다:
“이란은 레닌의 용어로 반식민지이다. 그들의 모든 환상들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이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만약 이 결론으로부터, USFI [수정주의적 제4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이 노동계급은 단지 뮬라들의 꽁무니를 쫓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도출한다면. 만약 그들이 노동계급의 독립성과 지도력을 위한 중심적인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스파르타시스트들은 이것을 완전히 반대의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뮬라들은 단지 반동적이다 - 프랑스의 푸자드주의자들과 같은 제국주의 나라들에 있는 반동적인 소부르주아지 운동들과 똑같다.”[강조는 원문]
- “이란과 관련한 기회주의자들과 종파주의자들”, 노동자권력, 1979년 2월
우리의 개량주의적/중도주의적 반대자들에 따르면, 제국주의의 통제권이 억압받는 후진국들의 소부르주아지로 하여금 반동적인 동원들에 대하여 면역을 갖게 해 주면서 이들을 신성하게 만들어 준다. 소상인들이나 룸펜프롤레타리아트들은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종종 나쁜 무엇인가를 할지 모르지만, 이란이나 인도에서의 그들은 그렇지 않다. 바이마르 독일이 샤의 이란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사회라는 점을 수용한다. 그러나 20세기 초의 짜르 러시아는 그렇지 않았다. 불균등결합발전의 한 극단적인 사례로서, 동시대 세계의 어떤 나라도 이란만큼 볼셰비키 혁명을 낳았던 러시아와 닮아있지는 않다.
볼셰비즘의 중심적인 원리적 요소들 중의 하나가 짜르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유일한 일관되게 민주적인 계급이라는 것이었다. 농민을 포함하여, 소부르주아지 대중들은 잠재적으로 반민주주의적, 반노동계급 운동으로 인입될 수 있다. 이것이 1900-03년 이스크라 그룹 내에서의 중요한 차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그 차이는 이후 볼셰비키-멘셰비키 분리의 전조가 되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실제 정치적 삶에서 소부르주아지 계급의 “가장 중요한 대변자”라는 플레하노프의 당강령 초안에서의 주장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물론, 또한 소생산자들 사이에서의 투쟁이 첨예하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매우 자주 프롤레타리아트에 반하는 방향을 향하는데, 그것은 많은 측면들에서, 소생산자들이라는 바로 그 지위가 그들의 이해관계를 프롤레타리아트의 그것에 첨예하게 대치시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소부르주아지 계급의 ‘가장 중요한 대변자’가 전혀 아니다.... 반유대주의자와 대지주, 민족주의자와 나로드니크, 그리고 사회개혁가와 ‘맑스주의를 비판하는 자’들이 아직 ‘자기 자신의 지위’를 버리지 않은 오늘날의 소생산자의 가장 중요한 대변자들이라는 점 ... 이 매주 자주 발생한다.” [강조는 원문!]
- “플레하노프의 2번째 강령초안에 대한 기록들” (1902년 2월-3월)
러시아의 소부르주아지 대중들이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들뿐만 아니라 반동적 운동들로도 집결될 수 있다는 레닌의 주장은 한낱 이론적 추측이 아니라 검은백인단들에서 생생한 표현을 얻었다. 1923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한 모임에서 발언하면서, 지노비에프는 검은백인단을 독일 나찌즘에 비교했다:
“한때 우리나라에 검은백인단이라고 우리가 불렀던 강력한 완전히 반동적인 운동이 있었다. 그것은 사회적 악선동을 매우 영리하게 사용했던 실제 러시아판 파시즘이었다. ‘검은백인단’ 운동은 왕조주의자들 사이에서 일어났고, 왕조를 지지했다. 그것은 거의 모든 마을, 모든 도시에 지부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힘없는 대중, 경비원, 하인들 등이 그들과 함께 했다. 또한 이 운동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종교적 갈등들을 활용했다. 한 측면에서, 그것이 어떻게 유대인들에 대한 악선동적 활동이라는 자신의 망토아래 집결했던 폭넓은 사회계층의 충성을 확보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인기있는 운동이었다. 그것은 대지주들, 귀족들뿐만 아니라 수천명의 소부르주아지 계급의 마음을 끌 수 있었던 큰 운동이었고, 밀류코프 [자유주의적 왕조주의 카데트] 당보다 훨씬 더 대중정당이었다. [우리의 강조]
- 헬무트 그루버의 레닌 시대의 국제공산주의: 다큐멘터리 역사(1967년)에서 재출판
검은백인단들이 최후까지 전제를 지지했던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수중에 국가권력을 잡기 위하여 싸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검은백인단 운동이 짜르와 결별하고, 민족주의적 포퓰리스트적 악선동을 이용하면서 스스로의 이름으로 권력을 위해 싸웠을 가능성이 역사적으로는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1917년 러시아 이전에 발생했더라면, 의심의 여지없이 멘셰비키들의 적어도 한 부분은 (현시대에 그들과 상응하는 관계의 있는 자들이 호메이니와 해왔던 것처럼) “전제에 맞서는 투쟁”에서 검은백인단들과의 단결을 추구했을 것이다.
후진적인 반식민지 나라에서의 호메이니의 그것과 유사한 반동적 대중운동을 찾기 위하여 사람들은 짜르 러시아의 검은백인단 운동처럼 오래 전 과거를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1965년의 인도네시아를 보라.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 수하르토를 타도하고, (당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지 않던 세계최대의 공산당이었던) 공산당을 절멸시켰던 정치적 반동은 단순히 군사 쿠데타가 아니었다. 50만명의 공산주의자들과 좌익노동자들 그리고 농민들(또한 많은 힌두교도들)에 대한 살해는 뮬라들이 이끌었던 소부르주아지 이슬람 광신도들에 의하여 주로 이루어졌다.
“반제국주의” 부르주아지 혁명?
호메이니를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자로 묘사하기가 매우 쉽지 않기 때문에 (헨리 8세나 표트르 대제가 그를 반동으로 여겼을 것이다) 좌익들이 선호하는 형용사가 “반제국주의적”이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용어는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계급협조주의를 의미하는 암호문이다. 소수의 배신자들과 (샤와 같은) 외세의 대리인들을 제외한, 식민지와 반식민지나라들의 모든 인민들이 제국주의적 통제권에 의하여 혁명화되어 왔다는 관점을 우리는 제출 받는다. 이 관점에서는, 소부르주아지 대중들은 항상 진보적인 한편으로 부르주아지 계급의 한 부분 역시 진보적(다시 말하면, “반제국주의적”)이다. 참으로, 제국주의적 통제권이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모든 사회 계급들에게 기품을 선사한다.
제국주의에 맞서는 모든 계급의 단결이라는 사상은, 예를 들면, “아랍혁명”이라는 허구의 관념에서 그 표현을 발견한다. 여기, 우리에게는 모든 인민들을 포괄하는, 수십년 동안 그리고 나라들로 확대되는 “혁명”, 기존의 아랍정부들과 지배계급들의 타도가 아니라 외부적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방향을 가진 “혁명”이 있다.
레닌주의자들로서, 우리는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중심적으로 미국)이 이란과 같은 후진적 나라들을 통제하고, 억압하고, 착취한다는 점을 완전하게 인식한다. 이 근본적인 역사적 사실은 식민지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가들에게 특별한 강령, 전략, 그리고 전술들을 부과한다. 이들 나라들에서는 민주주의적 권리들을 위한 투쟁, 그리고 봉건적 반동에 맞서는 투쟁이 외세 통제권에 맞서는 투쟁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들이 종종 국내 반동과 제국주의적 통제권에 맞서는 인민들에 의한 운동들을 이끈다.
후진적 나라들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적 전략과 전술들의 특별한 문제들이 1920년 7월-8월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2차대회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여기서, 공산주의 전위가 때때로 “혁명적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적 운동”을 지지하고 그들과의 동맹들을 추구해야 함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지지를 위하여 정해진 조건은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민족과 식민지 문제들에 관한 위원회에 대한 그의 보고에서, 레닌은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착취 국가들의 부르주아지 계급과 식민지의 부르주아지 계급 사이에는 분명한 친선이 있어 왔기 때문에, 매주 자주,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에서, 피억압 국가들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비록 그들 역시 민족운동을 지지하기는 하지만,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계급과 완전히 일치하는데, 즉 그들은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계급과 함께 모든 혁명적 운동들과 혁명적 계급들에 맞섭니다. 이것이 위원회에서 논박의 여지없이 증명되었고, 유일하게 올바른 태도는 이러한 차이를 고려해야 하며, 거의 모든 경우들에서 ‘부르주아지-민주주의적’이라는 용어를 ‘민족-혁명적’이라는 용어로 대체해야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결정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로서 우리는 오직 식민지 국가들에서의 부르주아지의 해방운동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경우에만, 그리고 그들의 대표자들이 우리가 농민과 피착취 대중들을 혁명적 방식으로 교육하고 조직하는 우리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을 때에만, 그들의 해방운동을 지지해야 하며, 지지할 것이라는 것이 이 변경의 중요성입니다. 만약 이들 조건들이 없다면, 이들 나라들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은 개량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맞서 투쟁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강조]
샤에 대항하여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것이 부르주아지 민족해방운동들에 대한 코민테른의 입장을 참고하는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우선, 호메이니를 추종했던 운동은 혁명적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운동이 아니었다. 사실, 1920년에 코민테른은 이란에서 막 권력을 장악했던 그런 종류의 운동을 다루지만, 분명하게 그 운동에 대한 가능한 지지나 협력이라는 정신에서 다루지 않았다. 여기, 호메이니의 운동과 같은 운동들에 관하여 레닌이 말해야만 했을 것이 있다:
“봉건적 혹은 가부장적이고 가부장적 농민관계들이 지배적인 보다 후진적인 국가들과 민족들에 관해서는, .... 명심하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
“세째, 유럽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는 해방운동을 칸, 지주, 뮬라들 등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와 융합하려고 애쓰는 팬이슬람주의와 이와 비슷한 경향들에 맞서 투쟁하는 것의 필요성....” [우리의 강조]
- “민족과 식민지 문제들에 관한 테제들의 예비 초안” (1920년 6월)
게다가, 호메이니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이 피착취인민들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척조차 결코 하지 않았다. 만약 이란의 좌익들이 “이슬람공화국” 하에서 민주주의적 자유들을 향유할 것이라고 믿었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속였던 것이다. 호메이니는 자신이 심지어 샤를 증오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산주의를 증오했음을 항상 분명히 했다. 폭넓게 알려진 르몽드(1978년 5월 6일)와의 한 인터뷰에서, 그 아야톨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심지어 샤를 타도하기 위해서조차 맑스주의자들과 협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나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것을 하지 말라고 특별한 지시들을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며, 그들이 언제나 우리의 등에 칼을 꽂는 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권력을 잡는다면, 그들은 이슬람의 정신과는 반대되는 독재적 정권을 수립할 것입니다.”
식민지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코민테른 문서들을 한번 흘낏 보는 것으로도 이슬람 야당을 지지했던 자칭 “레닌주의자들”을 기회주의자들로, 그리고 이란에서는 자살적인 기회주의자들로 폭로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이 식민지 세계에서의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지지라는 일반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1920년에, 후진국들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적 (공산주의적) 정당들이 새롭게 등장했다. 대중적인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운동들 또한 상대적으로 근래에 발전했다. 그러므로, 레닌의 코민테른이 공산주의 전위와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운동 사이의 관계를 대수적 방식으로 제기했던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
특별히,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국민당이 그들의 동맹이 되고자 했던 공산당을 학살했던 1925-27년의 중국혁명과 모든 그 이후의 경험이 식민지 부르주아지 계급은 혁명가들이 피착취 대중들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행위를 결코 하지 않을 것임을 증명한다. 트로츠키로 하여금 영구혁명의 이론을 짜르 러시아로부터 제국주의 시대의 모든 후진국들로 일반화하도록 했던 것이 중국혁명이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부하린의 중국정책은 오래된 멘셰비키의 2단계 혁명을 단순히 식민지들로 옮겨놓은 것임을 인식했다. “중국혁명과 스탈린 동지의 테제들”이라는 1927년 그의 논박에서, 그는 아래와 같이 썼다:
“1905년에서 1917년까지의 오래된 멘셰비키 전술 ... 이 이제 마르티노프[스탈린/부하린을 위한 대변인] 유파에 의하여 중국으로 옮겨진다.... 주장들은 그것이 20년 전에 그랬던 것들과 글자마다 똑같다. 단지, 본문에서 과거에는 전제가 있던 자리에 제국주의라는 단어가 그 자리를 대신해왔다.... 외세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은 전제에 맞서는 투쟁만큼 계급투쟁이다. 민족통전이라는 사상 때문에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것은 4계급 연합이라는 정책의 직접적 후과인 피비린내나는 4월 사태들 [장개석의 상하이 학살]에 의하여 너무나도 웅변적으로 증명이 된다.”
- 중국혁명의 문제들
그 본질에서, 제국주의는 후진국들에 있는 허약한 유산계급들의 메트로폴리탄 중심지들의 강력한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종속이다. 트로츠키가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듯이:
“제국주의는 중국의 국내적 관계들에서 대단히 강력한 세력이다. 이 힘의 주요한 원천은 양쯔강의 물에 있는 전함들(그것들은 단지 보조수단들일 뿐이다)이 아니라 외세자본과 국내 부르주아지 계급 사이의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결합이다.”
- 같은 책
반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은 없으며, 그러므로 반제국주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민족해방을 포함하여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의 역사적 과제들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에서 공동전선들
레닌주의자들에게는, 공동전선은 공동실천을 위한 특수한 일시적인 합의이다. “행진은 따로, 파업은 함께”가 초기 코민테른이 하나의 슬로건으로서 공동전선을 표현했던 방식이다. 이것은 트로츠키에 의하여 선전을 위한 정치적 연합과 날카롭게 구분되었다. 더욱이, 공동전선 전술들은 폭넓은 범위를 포괄하며, 모든 전술들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세력들(예를 들면, 프랑스 군대와 콜론[알제리에 정착하여 제국주의의 첨병역할을 하는 프랑스인들)프랑스 테러주의자들에 저항하는 알제리의 FLN)에 대한 군사적 지지와 정치적(예를 들면, 선거에서의) 지지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선기에서의 비판적지지 전술이나 심지어는 입당전술 조차도 조직화된 노동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예를 들면, 영국 노동당) 혹은 스탈린주의 정당들(예를 들면, 프랑스 공산당)에 종종 적용될 수 있다. 개량주의적인 잘못된 지도자들을 폭로하기 위하여 활용되는 그러한 전술은 부르주아지 정당들에 반대하는 계급노선을 그려냄으로써, 적어도 노동자들의 정치적 독립을 향한 첫걸음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그들의 수사가 제아무리 급진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일 지라도, 혹은 그들의 대중적 지지가 제아무리 폭넓다고 해도 부르주아지 조직들에게 그러한 정치적 지지를 결코 제공하지 않는다. 개량주의적 노동운동 기반의 정당들과는 대조적으로,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운동들(예를 들면, 중국의 국민당, 알제리의 FLN,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은 단지 잘못된 지도자들이 아니라 계급의 적들이다 - 그들은 스스로 정치적 자살을 기도하는 것 없이 자신들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공격하고 파괴할 수 있다.
진보적이고 자주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들이 이끄는, 제국주의적 통제권에 저항하는 특정한 부분적 투쟁들(예를 들면, 정치적 독립)은 분명히 있다.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정권들은 외국자본에 저항하는, 종종 혁명가들이 지지하고 만약 필요하다면 방어할 방책들(예를 들면, 1937년 카르데나스의 멕시코 유전 국유화, 나세르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수행한다. 예를 들면, 이집트의 혁명적 전위라면 1956년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대한 보복차원에서의 침공에 맞서 나세르에게 군사적 지지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한 공동전선 전술들의 정당성은 관련되어 있는 부르주아지 세력들의 “반제국주의적” 자세가 전혀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투쟁이 진행되고 있는가라는 진보적 내용에 완전하게 달려있다. 실제로, 제국주의적 공격에 맞서 진정한 민족적 권리를 방어함에 있어서, 우리는 심지어 극단적인 반동들과도 기꺼이 같은 편에서 투쟁한다. 예를 들면, 해일리 셀라시는 봉건적 전제군주였다. 그러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무쏠리니의 이탈리아에 의한 정복에 맞서 이디오피아를 방어함에 있어서 그에게 군사적 지지를 제공한다. 또 하나의 예가 중국이다. 1930년대 장개석은 그와 비교해서는 이란의 팔라비 왕조는 성스러운 인도주의자들 처럼 보일수도 있는 반동적 학살자였다. 게다가, 국민당의 중국은 적어도 샤의 이란만큼 미국 제국주의와 친밀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일본이 중국에 대한 정복전쟁을 개시했을 때, 트로츠키는 장개석 지도부에도 불구하고 그의 중국 지지자들에게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민족적 저항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대조적으로, 기회주의자들에게는, 구식민지 나라들에서의 공동전선들은 자신들이 추종하고 있는 부르주아지 세력들의 소위 진보적 (“반제국주의적”) 성격에 기초한다. 그래서 호메이니의 운동이 “반제국주의적”으로 표현되었고, 정반대로 샤는 이란 부르주아지 계급의 대변자로서가 아니라 미국 제국주의의 직접적 대리인, 일종의 CIA 고위 요원으로서 묘사되었다. 우리를 반박하면서, 노동자권력은 “스파르타시스트들의 입장은 이란에서 샤에 맞서는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을 실천적으로 배제하게 될 것이다”(“스파르타시스트들의 올바름과 잘못됨들”, 노동자권력, 1979년 1월)라고 쓴다.
심지어 호메이니가 민주주의적 강령을 옹호하는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일지라도(그는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노동자권력이 의미하는 바의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을 거부할 것이다. 이 슬로건은 1922년 제4차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는데, 거기서 이것은 제국주의적 통제권에 맞서는 투쟁에서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들과의 “일시적 합의들”을 위한 선동과 연계되었다. 당시에 조차, 그것은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굴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다. 그 슬로건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던 코민테른에서, “동방문제에 관한 테제들”을 둘러싼 논쟁에서, 한 중국 대의원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국에서 제국주의를 제거하기 위해서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이 필수적라는 가정에 기초하여, 우리 당은 국민당이라는 민족혁명적 정당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우리가 이 당에 입당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훌륭하고 숭고하고 이상적(진실이다)이지만, 대중들이 따르지 않는 공산주의를 설교하면서 고립된 채로 남게 될 것이다.”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1919-1943, 문서들, 1권, 제인 데그라 편집에서 인용됨
러시아 공산당 정치국 내부에서, 트로츠키는 처음부터 국민당으로의 입당에 반대했었다. 1927년 4월 비극적인 상하이 학살이 이 입당의 피비린내나는 후과였다. 그리고 이슬람 야당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요구하며, 국민당 입당을 이끌었던 것과 똑같은 굴종주의적 충동들을 드러내는 자들은 더욱 나쁠 뿐인데, 그것은 적어도 장개석의 당이 군벌들 보다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이기 때문이다. 국민당은 전족과 변발 등을 폐지하고 싶어했다. 반대로,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베일을 다시 실행하고 싶어한다.
식민지 군사기지에서의 행진처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가들과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반제국주의적 성격의 특정한 공동전선 실천들이 있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단절함에 있어서 봉기가 부르주아지 혹은 소부르주아지 지도자들이 바라는 것 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고 주창하면서, 독립을 지지하는 대중봉기에 합류할 것이다. 그러나 “반제국주의 공동전선” 슬로건을 가지고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수정주의자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정확하게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파시즘에 맞서는 공동전선”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스탈린-디미트로프가 했던 것, 실재하는 착취자들 그리고 장차 착취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의 한 부분과의 정치적 연합을 위한 암호문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이라는 본질적으로 스탈린주의적 개념은 자신들의 주요한 반대자들보다는 덜 친서구적인 외교정책을 옹호하는 (혹은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부르주아지 그룹들을 지지하는 것에 이른다. 실천적으로,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은 인도에서는 자나타에 맞서 인디라 간디를, 모든 세력들에 맞서 이디오피아의 대령 멘기스투를 지지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반제국주의 공동선전”의 반동적, 반민주주의적 내용은 페루에서 잘 보여진다. “반제국주의”라는 규모에서 보면, 페루 장성 벨라스코 알바라도는 아야톨라 호메이니에 비하면 광년의 거리만큼 뚝 떨어져 있다. 벨라스코 준타(1968-75년)은 폭넓은 토지개혁을 수행했고, 미국 소유의 구리와 석유 (텍사코) 대기업들을 포함하여 나라의 주요 산업들 중의 몇몇을 국유화했다. 벨라스코 준타는 쿠바와의 외교관계들을 복원했고, 소비에트 블럭과의 긴밀한 유대들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미국 제국주의의 뒷마당에 위치한 나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이라는 논리는 벨룬데 테리의 우익-중도 의회정부에 맞서는 벨라스코의 1968년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요구했고, 친 워싱턴 부르주아지 야당들(CIA와 연결된 우익 사이비 포퓰리스트 APRA와 보수적 인민기독당)에 반대하여 준타 권력을 지지했다. 자연스럽게, 친모스크바 스탈린주의자들은 단지 이런 식으로 “진보적” 장성들을 지지했다. 귈레르모 로라와 피어 램버트의 수정주의적 “트로츠키주의” 국제적인 연합(제4 인터내셔널 재건을 위한 조직위원회) 또한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을 이유로 벨라스코 준타에 대한 지지를 제공하고자 했다. 비록 “반제국주의적”이기는 하지만, 억압적인 군부 보나파르트주의 정권에 대한 이들의 지지 때문에, 친모스크바 공산당은 오늘날 정당하게도 페루 노동대중들 사이에서 신뢰를 잃었다. 그리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위원회는 그것에 비하면 준타가 한 무리의 지나치게 동정심이 많은 자유주의적 공상적 박애주의자들로 보이도록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이란에서의 혁명적 정책
우리의 개량주의적 중도주의 반대자들은 iSt의 슬로건 “샤를 타도하라! 뮬라들을 타도하라!”가 이 혁명적 격변의 시기에서 정치적 기권주의를 의미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들 주장의 요점이다. 대중들은 샤를 축출하고 있었었는데, 스파르타시스트들은 이란의 혁명가들에게 집에 머물면서 아마도 자본론을 공부하라고 주창했었다고 그들은 미친듯이 고함지르며,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믿는다. 기회주의자들에게는, 물론, 정치적 행동주의가 항상 대중운동의 꽁무니를 쫓는 것과 동의어이다. 혁명가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우리는 그해 후반기에 경제를 마비시켰던 파업의 물결을 통한 작년 여름의 대규모 이슬람 시위들로부터, 오늘 자신의 이슬람공화국을 세우는 것에 있어서 호메이니의 첫번째 행보들에 맞서는 좌익적 그리고 민주적 항의들의 시작에 이르기까지 이란 위기의 모든 국면들에서 적극적이고 개입주의적 정치노선을 제기해왔다.
이슬람 야당의 주요 행동은 “신은 위대하다”와 “호메이니 만세” 슬로건들 하의 일련의 대중시위들로 이루어졌다. 속이 완전하게 환하게 보였던, 이들 시위들의 강령은 샤의 전제군주를 호메이니 하의 신권국가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들 시위들에 참여하는 것은 뮬라들의 지배에 대한 지지, 즉 지금 권력을 잡고 있는 종류의 정권에 대한 지지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미국 SWP와 같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개량주의자들은 베일이 무슬림의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격리를 의미하는 퍼다(purdah)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샤에 대한 저항의 상징”(신디 자퀴쓰의 발언)이라고, 대중들에게는 이슬람공화국이 노동자와 농민의 공화국을 의미했다고(배리 쉐퍼드에 따르면), 혹은 “알라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가 실제로는 인민들이 샤의 군대보다 강함을 의미했다고(브라이언 그로간의 주장) 주장하면서, “검은 것이 희다”는 속임수들에 단순히 의존했다. 개량주의자들이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반면, 노동자권력과 같은 중도주의적 꽁무니주의자들은 사이비-정통 혼동주의에 의존한다:
“우리는 뮬라들의 분명한 목적들은 노동계급의 그것들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음을 결코 숨지지 않지만, 트로추키주의자들이 샤와 장성들에 맞서는 행동들에 참여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 “이란과 관련한 기회주의자들과 종파주의자들” 노동자권력, 1979년 2월
어머나! 이슬람공화국에 반대하는 슬로건들을 가지고 “호메이니 만세” 시위들에 참여하려고 시도하는 어떠한 좌익그룹도 코란식 정의[正義]에 있는 즉각적인 교훈[잔혹한 반응]을 받았을 것이다.
노동자권력은 호메이니 추종 시위들에 참여하는 것이 “실제의 반제국주의 군사적 공동전선"(같은 곳으로부터의 인용)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시위들은 샤의 군대의 승리가 인민들의 세력들의 말살을 의미하는, 그래서 뮬라가 이끄는 세력들 편에 대한 혁명적 방어주의 정책이 필수적으로 제기되는 내전이 아니었다. 그 시위들은 본질적으로 기존 국가기구의 이슬람화를 위한 압력가하기 전술이었다. 호메이니계 지도부는 파키스탄 장군 지아의 "이슬람 병사"의 페르시아 판에 의한 샤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분명히 고대하고 있었다. 이슬람공화국을 위한 시위들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호메이니 추종 시위들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원칙적인 반대는 정치적 수동주의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자원들과 구체적인 군사정세에 기초하여, 이란에 있는 트로츠키 조직이었다면 혁명적-민주주의적 요구들과 완전한 계급투쟁 강령을 위한 선동을 위하여, 대중적인 이슬람 야당의 분출, 그리고 샤의 탄압기구의 이따금씩 있는 망설임으로 만들어진 틈을 이용했을 것이다. 또한 트로츠키주의 전위였다면 좌익 그룹들에게 뮬라의 운동으로부터 독립적인, 그리고 정치적으로 그것에 반대하는, 샤에 대항하는 일련의 공동전선 행동들을 좌익그룹들, 중심적으로 페다이인 대오들에게 제안함으로써, 이들을 호메이니로부터 분리하기 위하여 노력했을 것이다.
샤는 "호메이니 만세" 시위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또한 노동자들의 (특히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전들에서의) 파업들에 의해서 역시 타도되었다고 개량주의자들/중도주의자들이 주장할 것이다.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꽁무니주의 반대자들은 반동적 소부르주아지 항의들과 프롤레타리아트 파업물결을 하나의 무계급 "반(反)샤" 운동 속으로 혼합했지만, 우리는 그들 사이에 근본적인 선을 그었다. 비록 처음에는 파업들이 상당한 정도로 경제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업들은 분명히 왕조를 표적으로 한 타격들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비록 의심의 여지없이 노동자들이 어느정도까지는 호메이니 추종 야당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핵심 석유 노동자들의 파업은 이슬람공화국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란에 있는 혁명정당이었다면, 물론, 노동자들이 이슬람 야당에게는 어떠한 지지도 제공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한편으로, 파업들을 지지했을 것이고, 파업들을 강화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힘을 다했을 것이다. 샤가 도망가기 한달 전에 우리가 썼듯이:
"현재 이란 노동자들에 의하여 수행되고 있는 파업전투들은 뮬라들을 위한 대포밥으로서가 아니라, 호메이니와 권력을 다투는 경쟁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적인 투쟁으로의 조직화의 기초가 될 수도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억압받는 민족체들의 해방, 농지혁명, 그리고 제국주의 통제권의 와해라는 민주주의적 임무들은 오직 이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 하에서만 수행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긴급한 민주주의적 요구들은 노동계급의 소부르주아지 대중들 속으로의 해소가 아니라, 그것들의 성공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수립을 필요로 한다."
- "샤를 타도하라! 호메이니에 복종하지 말라!" 노동자 전위221호, 1978년 12월 15일
일단 샤가 도주하자, 인민들의 분노가 경찰, 그리고 특히 증오의 대상이던 사바크(SAVAK)를 향했는데, 화난 군중들이 그들을 찾아내 죽였다. 이슬람 지도부는 샤의 고문기술자들에 대한 이들 자생적인 보복들에 반대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적어도 장성들의 한 부분과의 관계회복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또한 "거리들에서의 혼란"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란에 있는 혁명정당이었다면 사바크에 대한 공격들에 참여했을뿐만 아니라 공격들을 인민재판들을 통한 공동전선적 기초들로 조직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1월에 우리가 썼듯이:
"그래서 뮬라들은 사바크에 적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으로의 조직화를 자신들의 사법권을 세워내는 것과 군 핵심간부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치되는 것으로 정확하게 바라본다. 사바크 고문기술자들을 응징하기 위한 인민재판은 최고위 종교지도계층과 군 핵심간부들 모두에 맞서는 쪽을 향하는 혁명적 이중권력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샤가 도망간다" 노동자 전위223호, 1월 19일
바크티아르의 짧았던 재임기간, 특히 호메이니가 망명으로부터 돌아온 이후, 장성들이 대중적 반대를 유혈진압하려고 시도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이것은 그의 최고위 군간부들에 대한 샤의 마지막 메세지였다. 우리가 뮬라의 승리 직후에 썼듯이:
"만약 내전으로 분출되는 그런 대립이 있었다면, 반동이 주도하는 운동에 대한 우리의 비타협적인 정치적 반대가 대중들을 계급노선들을 따라서 양극화하고 노동자들과 소부르주아지 대중들의 낮은 층을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극 주변으로 집결시키기 위하여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자들은 손상받지 않고 온전한 상태의 장교계층들에 대항하여 뮬라들에 의하여 집결한 인민들의 세력들을 군사적으로 지지했을 것이다.
- "뮬라들이 승리한다" 노동자 전위225호, 2월 16일
그러한 혁명적 방어주의 정책은 호메이니가 샤보다 더 진보적이거나 반제국주의적이기 때문에 정당화되고 필수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문제는 계급세력들의 배치와 한쪽 혹은 다른 한쪽의 승리의 결과들이었다. 만약 장성들이 그러한 내전에서 승리했다면, 그들은 이슬람 광신도들뿐만 아니라 이란 프롤레타리아트의 선진인자들과 조직화된 좌익들을 분쇄했을 것이다.
스페인 내전의 기간에, 트로츠키는 맑스주의자들은 선거들에서 네그린의 민중전선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프랑코에 맞서서 군사적 지지를 제공하는 것은 “'차악' 민중전선 정치라는 늪 속으로의 퇴행..."이라고 주장했던 초좌익분자들에게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무기들과 탄약들을 실은 두척의 배들... - 하나는 프랑코를 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네그린을 향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중립이 아니다. 우리는 네그린 정부를 향하는 탄약들을 실은 배가 통과하도록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환상들도 없다: 이들 탄약들 중에서, 열에 겨우 아홉은 파시스트들에 맞서 사용될 것이고, 적어도 하나는 우리의 동지들에 맞서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프랑코에게 보내진 탄약들은 열에 열이 우리 동지들에게 날아들 것이다.... 물론, 만약 스페인에서 무장봉기가 시작된다면, 우리는 탄약들을 실은 배가 봉기에 나선 노동자들의 수중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서 애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차악을 선택한다.
"네그린과 프랑코 사이의 내전은 힌덴부르크와 히틀러의 선거 경쟁과 같은 것이 아니다. 만약 힌덴부르크가 히틀러에 맞서는 공개적인 군사적 싸움에 돌입했다면, 그렇다면 힌덴부르크는 '차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힌덴부르크는 '차악'이 아니었다 – 그는 히틀러에 맞서는 실제 전쟁을 개시하지 않았다...."
- "스페인 정세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답(간결한 요약)", 1937년 9월
여기서 트로츠키는 내전과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선거들, 등)이라는 압박전술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를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뮬라가 이끌었던 반(反)샤 시위들이 내전과 같은 것인 처럼 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노동자권력은 호메이니와 그의 이슬람공화국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적 지지를 간단히 감추고 있다.
호메이니 다음은 우리?
호메이니의 역할을 러시아에서의 2월혁명과 10월혁명 사이의 알렉산더 케렌스키의 그것에 비유하는 것이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그룹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 되었다. 미국 SWP의 배리 셰퍼드는 이미 언급했던 뉴욕시의 포럼에서, "'샤를 타도하라, 뮬라들을 타도하라'고 말하는 것은 1914년 러시아에서 '짜르를 타도하라, 케렌스키를 타도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미국 SWP의 영국의 파트너인, 만델을 추종하는 국제맑스주의자그룹은 “비록 그들의 본성에 따른 비유들은 결코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지만, 만약 그[호메이니]가 무엇인가 케렌스키와 보다 밀접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면"("이란의 2월혁명", 사회주의적 도전, 2월 15일)이라고 언급한다. 이 특정한 비유는 단순히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엉뚱해서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방식으로 다루기가 어렵다. 러시아 2월혁명과 이란에서 벌어졌던 것 사이의 비유들은 만약 짜르가 러시아 정교회의 메트로폴리탄 티혼이 이끄는 운동에 의하여 타되었다면 오직 근거가 있을 것이다.
케렌스키는 혁명에 의하여 상승한 우연한 인물이었다. 그는 1917년 2월 이전에는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를 부르주아지 자유주의 카데트, 소부르주아지 민중주의 사회혁명가들, 그리고 노동운동 개량주의 멘셰비키가 용인할 수 있는 "지도자"로 만든 것은 정확하게 그의 정치적 선명도와 강한 정당 유대들의 부재였다. 호메이니는 샤의 타도에 있어서 우연적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압도적인 종교적 종파의 확고한 지도자였다. 그는 정확하게 왕조의 피상적인 서구화(1963년 "백색 혁명") 시도를 둘러싸고, 특히 이슬람 사원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손상을 가했던 토지개혁과 여성의 법적권리를 둘러싸고 샤에 대한 반대로 나섰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호메이니-케렌스키 비유에 대한 가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집착에는 이면의 정치적 논리가 있다. 케렌스키가 권력에 오르고 몇달 만에 볼셰비키에 의하여 쉽게 타도되었던 과도적 인물에 불과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호메이니-케렌스키 비유를 함에 있어서, 우리의 수정주의 "트로츠키주의" 반대자들은 "호메이니 다음은 (곧이어) 우리"라는 그들의 믿음(혹은 어쨌든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아마도 우리는 좌익들이 이란에서 반동적 종교운동을 분명하게 지지했던 근원적인 이유에 이른다. 혁명의 "불가피한 급진화" ("객관적 동학")이 좌익을 권력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하여 샤에 대항하는 뮬라들을 지지하려는 냉소적인 술책이 그것이었다. 이 퇴영적인 종교적 광신도를 일종의 급진적 민주주의자로 미화하려는 좌익들의 노력의 많은 부분은 의심의 여지없이 호메이니의 이란 추종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위선적 몸짓이었다.
아마도 샤에 반대하여 뮬라들을 지지했던 것에 대한 가장 정교한 방어가 냉조주의와 객관주의의 혼합일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호메이니가 종교적 반동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만약 그가 권력에 오르고 자신의 지배를 강화한다면, 이것은, 적어도 국내정책들에서는, 심지어 샤보다도 더 반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반동 이슬람공화국은 그렇지 않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샤를 타도하기 위하여, 호메이니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고 그가 그의 강령을 실행하는 것을 막을 인민들의 세력들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샤의 몰락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좌익들은 호메이니에 대항하여 지지를 획득할 것이다. 비록 호메이니에 대한 좌익의 지지가 기회주의적 정책이기는 하지만, "히틀러 다음은 우리"로 표현되었던 초좌익 제3기 스탈린주의 입장과의 일정정도의 방법론적 유사성이 여기에 있다.
독일 스탈린주의자들은 모든 주장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대자본과 몰락한 소부르주아지 계급의 곧 폭발할 불안정한 연합의 선두에 서 있으며, 그는 그의 악선동적인 사회적 강령을 결코 실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추종하는 광신적 대중과 무장 군대들의 융합된 힘을 가지고, 히틀러는 조직화된 노동자 운동의 부러진 뼈들 위로 자신의 제3제국을 건설했다. 호메이니가 자신의 승리 직후에 타도될 수 있다고 계산을 하면서, 샤에 반대하여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냉소적인 정책은 탄창에 다섯발의 탄들을 넣고 러시안 룰렛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비록 확고하게는 아니지만, 현재 호메이니는 자신의 수중에 국가권력의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 분명히 그는 좌익 혹은 노동자 운동과의 싸움에서 아직 손상되지 않고 온전한 장교계층에게 충성을 명령할 것이다. 더 나아가, 호메이니는 신실한 성직자로서뿐만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던 샤를 물리친 사람으로서 (특히 후진적인 지방 대중들 사이에서) 엄청난 대중적 권위를 구가한다.
혁명가들로서, 우리는 반혁명의 승리에 관하여 결코 숙명론적이지 않다. 1933년 초에 히틀러가 수상에 임명되자, 트로츠키는 그에 대항하여 봉기에 나설 것을 독일 노동자계급에게 호소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란에서, 우리는 이슬람 반동의 임박한 테러에 맞서는 노동자운동, 좌익, 그리고 비종교적 민주주의 세력들의 공동전선적 방어를 요구한다:
"페다이인으로부터 거리들의 여성들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비이슬람 부문은 무슬림 광신도들의 총구 아래에 있다. 테란에서의 여성들의 항의들에 대한 페다이인의 보호는 좌익,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비종교적 민주주의 세력들의 공동전선적 방어를 위한 기초가 존재한다는 고무적인 신호이다.
"이란의 혁명가들이라면 뮬라들의 지배에 맞서는 그러한 공동전선의 등뼈로서 공장위원회들과 노동조합 조직들에 기초한 노동자 민병대의 구성을 위하여 선동할 것이다!"
- "베일에 반대한다!" 노동자 전위, 227호, 3월 16일
그러나 우리는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이점들이 현재는 이슬람 혁명위원회에 있으며, 이란 좌익의 자살적인 기회주의자들과 비극적으로 잘못 지도되고 있는 노동계급에게 있지 않음을 이해한다. 호메이니가 아래와 같이 위협을 할 때에, 그가 공허한 허풍을 떨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통합지도부가 모든 그룹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이슬람 혁명에 반대하는 봉기로 여길 것이며, 우리가 샤와 그의 악마적 정권을 파괴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들을 상대하기에 충분히 강력하다는 것을 이들 노상강도들과 불법적 인자들에게 경고한다."
- 뉴욕타임즈, 2월 20일
그리고 호메이니는 어떻게 샤를 파괴할 힘을 획득했는가? 이슬람 사원의 전통 소부르주아지적 기초, 전통시장 상인들, 그리고 유사한 사회계층이 그것을 제공했다. 이뿐만 아니라, 또한 이제는 자신들을 향하여 호메이니가 돌릴 무기들을 그에게 주었던 이란 좌익(친모스크바 스탈린주의 투데당과 절충주의적 반(半)스탈린주의 페다이인)의 지지였다. 그리고 거리의 뮬라들을 위한 외국의 좌익 응원단들(잭 바르네스 지지자들, 어네스트 만델 지지자들, 그리고 게리 힐리 지지자들) 또한 이란에서 늘어나고 있는 반동테러에 대한 책임이 있다. 폭행을 당하는 베일을 벗은 모든 여성들, 태형을 당하는 모든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이슬람 사바크에 의하여 고문들 당하는 모든 노동자 투사가 그들의 고통을 가하는 새로운 인물을 권력으로 데려가는 것을 도왔던 모든 자들을 저주하는 것은 올바른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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