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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전위 909호 2008년 2월 29일

독일 사회민주당이 자본주의 반혁명을 부추긴다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를!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을 위하여!

다음 기사는 국제공산주의동맹(제4 인터내셔널주의자)의 지부인 독일 스파르타키스트 노동자 당의 신문 스파르타키스트 169호(2007년-2008년 겨울호)로부터, 편집된 형태로 번역되고 재출판된 것이다.

독일 수상 안겔라 메르켈의 달라이 라마에 대한 영접은 부르주아지 계급과 그 이론가들에 의한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 반대하는 계속적인 반 공산주의 운동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후, 미국 대통령 부시가 달라이 라마를 받아들였다 – 이 두 사건은 우연이 아니다. 중국 공산당(CCP)에게 "인권"을 준수하라고 경고하는 와중에, "티벳에 대한 억압"에 관하여 악어의 눈물을 떨군다. 이 모든 것들이 2008년 베이징에서 있을 올림픽 경기를 앞두고 고조될 것이다. 메르켈의 도발은 베이징에서의 격한 외교적 반응들을 유발했다. 인터넷 신문 Welt는 2007년 11월 15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베이징 전략가들은 EU가 중국에 대하여 취하고 있는 경로들뿐만 아니라, 자크 시라크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하에서 미국으로부터 거리를 두었었던 유럽이 다시 얼마나 가깝게 미국에 접근하고 있는가를 주시하고 있다. 새로운 접근을 베이징은 탐탁치 않게 여긴다. 그래서 신문 글로벌타임즈는 반대하는 머릿기사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이 미국에 알랑거리는 것에서 경쟁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실제로, 11월 말에 EU는 중국 통화인 위안의 가치 재평가를 확보하기 위한 엄청난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비밀스럽지도 않게 중국에 대한 무역전쟁 위협을 제기해왔던 유로 그룹의 의장인 쟝-클로드 융커는 "보호주의의 낌새가 있다"며 경고했다 (한델스블라트[Handelsblatt]], 2007년 11월 29일자). 한편, 미국 제국주의는 일본과 반 중국 군사 협정을 체결했으며, 패트리어트 미사일 체계들로 대만을 무장시키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의 공통의 목적은 중국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압력을 증가시키는 것이고, 새로운 "인권" 공세를 통하여 중국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다.

메르켈의 달리아 라마에 대한 영접은 사회민주당(SPD)과 기독교 민주주의 연합(CDU)의 SPD/CDU 연합 정부 내에서의 논쟁을 유발했다. SPD의 외무장관 슈타인마이어는 CDU의 대결적인 경로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 그리고 외무장관과 수상이 이것에 집착한다 - 그들은 중국에서의 인권 상황의 개선을 위한 서로 다른 접근을 주장하고 있다.... [슈타인마이어]는 독일과 중국의 법학자들의 학문적 프로젝트였던, 7년 전의 법의 지배에 기초한 국가에 관한 대화를 주도했던 슈뢰더의 프로젝트를 상기하면서 [독일의] 중국 정책에서 '장기적 체계들’을 주창하고 있다. 경제적 접촉들을 위해서는 법의 지배가 필수적이라고 주장되었으며 - 당시 베이징은 이것에 혹하고 있었다 -, 이것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인권들이었다."

- FAZ.NET 2007년 11월 23일

SPD와 CDU는 공히 반혁명으로 중국 노동자 국가를 파괴하고 싶어하지만, 독일 제국주의가 자신의 이해를 성취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전략들을 추구하고 있다. SPD는 메르켈의 미국에 대한 접근이 중국(그리고 러시아)에서 독일의 이해관계들에 타격을 줄 수 있음을 염려하고 있다. 수상으로서 슈뢰더는 거의 매년 경제 대표단과 함께 중국에 갔다. SPD도 마찬가지로 반공산주의 "인권" 공세를 취하고 있지만, 이것이 그들의 초점은 아니다. 메르켈은 2차 냉전 때의 로날드 레이건을 상기시키는 발언을 하지만, SPD 정책은 60년대 중반 (SPD의) 에곤 바르에 의해 발전되었고, "접근을 통한 변화"로 설명되었던 동독(DDR)에 대한 그들의 "동방정책"의 연속이다. 여기서 "변화"는 언제나 "민주주의", "사회적 시장 경제", "인권" - 심지어 더욱 냉소적으로 - "노동자의 권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본주의 반혁명을 의미했다.

소련에 대한 냉전에서와 같이, 제국주의자들은 "인권"을 무엇보다도 한가지로 이해한다: 노동 대중들에 대한 무제한의 착취와 노예화를 위한 부르주아지 계급의 권리. 그리고 이 "권리"가 부르주아지 계급을 중국 본토 밖으로 내 쫓았던 1949년 혁명에 의해 중국에서 "침해"되었다. 시장 개혁들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외국 회사들을 포함하여 시장 개혁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적 부문은 대부분 경공업이다. 철강, 비철 금속, 중기계 생산, 통신, 에너지, 석유화학 등 중공업은 국가 소유의 기업들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것들이 전략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다. 토지에 대한 국유제도는 지방을 지배하는 부유한 거대 지주층의 발전을 막아왔다. 금융 체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너무나도 많은 신식민지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를 초토화시켰던 투기자본의 조작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을 아직까지는 보호할 수 있었다.

잔존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로서, 중국은 특히 동유럽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의 반혁명적 파괴, 그 중에서도 1991-92년 소련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의 파괴 이래 제국주의자들의 표적으로 있었다. "일국 사회주의"라는 배신적인 스탈린주의 정책과 중국 노동자 국가와 제국주의 사이의 "평화공존"이라는 이것과 연결된 환상의 결과, 중국 관료집단은 제국주의자들에게 양보를 해오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은 "테러와의 전쟁", 이란에 대한 봉쇄들, 그리고 북한의 핵무장 폐기를 위한 공세를 지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은 미국의 군사 기지들의 전체 체계에 의해 포위 당해 있다. 북한과 함께, 중국은 펜타곤의 미국에 의한 선제 핵 공격의 잠재적 타겟 명단에 올라 있으며, 한편으로 미국의 국가 미사일 방어 계획은 중국의 온화한 핵 능력에 대한 중립화를 전략적 목적으로 한다. 일본과 미국은 자신의 경쟁관계를 아시아에 있는 노동자 국가들에 대한 그들의 공통의 적의에 종속시키면서 군사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과 북한이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하여 그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핵무기들 개발하고 실험하고 생산하는 것을 찬성한다. 우리는 중국과 기타 북한, 쿠바 그리고 베트남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 대한 무조건적 군사적 방어를 위해 투쟁하며, 내부의 반혁명에 맞서 투쟁한다.

"티벳 해방" 운동은 중국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을 조장하는 것에 목적을 둔 미국 CIA와 기타 제국주의 세력들의 음모들로 시작되었다. 1949년 중국 혁명에 의해 타도될 때까지, 티벳의 "승려귀족"들은 노예로 넘쳐나며, 후생의료가 없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이 (일부) 지배 승려 계층의 영역이었던 사회를 지배했다. 다른 참혹하게 미개하고 후진적인 나라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작은 근대화마저도 외부로부터만 얻어질 수 있다.

1950년, 미국 제국주의와 대만에 의해 조장되었던 반혁명적 저항에 대한 대응으로 중국 인민 해방군(PLA)는 티벳을 점령했다. 1959년에, CIA(대만과 인도의 도움과 함께)에 의해 조장되고, 무장되었으며 재정지원을 받던 반란이 라사(Lhasa)에서의 승려/귀족이 지도한 봉기에서 극에 달했고, 이것은 PLA에 의해 분쇄되었다. "가엾은 힘없는 티벳"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악다구니에 반대하여,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올곧게 중국을 방어했다. 1959년 반혁명적 봉기를 패배시키고,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는 울락(농민의 강제 노동), 노예제, 그리고 귀족과 수도원들에 납부되는 많은 수의 의무적인 세금들을 폐지시켰다. 도망쳐 망명길에 오른 귀족들의 땅, 가축 그리고 장비들은 농민들에게 분배되었으며, 봉기에 참여했었던 수도원의 땅과 비품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명이 극적으로 늘어났으며(1950년대 35.5세에서 2001년 67세로) 유아 사망률이 극적으로 감소한(1959년에 1000명에 430명이던 것이 6.61명으로 줄었다) 것은 티벳이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현재 "티벳 독립"의 주장은 자본주의 반혁명을 주장하는 시위만 될 수 있을 뿐이다. 동시에, 중국 프롤레타리아트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한민족 배외주의에 맞서 투쟁해야만 하며, 티벳 민족, 신장의 이슬람 위구르인, 그리고 다른 소수 민족에 대한 차별에 반대해야만 한다. 티벳 인민의 운명은 중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과 인도로부터 일본과 다른 제국주의 중심 국가들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에 긴밀하게 긴박되어 있다.

1949년 혁명으로 부르주아지 계급이 몰수당한 지구상 최대 인구의 땅 중국의 운명은 세계 모든 노동자들의 중심적 이해관계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내부의 반혁명과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 계급들에 대항하여 중국을 방어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쪽으로 획득되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중국에서의 정치혁명만이 노동자 소비에트의 지배로 귀결될 수 있으며, 오직 중국혁명의 확장만이 혁명의 성과들에 대한 방어와 발전을 보장할 수 있다. 독일에서, 이러한 혁명적 의식에 대한 중심적인 장애물이 민족주의적 보호주의와 국내에 있는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계급협조를 추구하며,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잔존하는 노동자 국가들에서의 반혁명을 추진하는 사회민주주의 강령이다.

"시장 개혁들"은 중국 노동자 국가에서 모순을 날카롭게 한다

반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제국주의자들은 중국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더욱 가하는 한편으로 중국의 "시장 개혁들"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경제적 침투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시장개혁들은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서 모순을 엄청나게 날카롭게 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자본주의라거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자본주의가 되고 있다는 널리 퍼진 좌익의 믿음과는 반대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위로부터 자본주의의 복귀를 냉정하게 한 단계 한 단계 실행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 1936년 배반당한혁명에서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와 관련하여 "축적되고 있는 모순들의 더욱 더한 발전은 사회주의로 귀결될 수도 있고 자본주의로의 후퇴로 귀결될 수도 있다: h) 자본주의로의 길에서는 반혁명이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해야만 할 것이다. i) 사회주의로의 길에서는 노동자들이 관료집단을 타도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스탈린주의 지배 관료집단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균일적인 계급이 아니라 깨지기 쉽고 모순적인 계층이다. 중국에서 축적되고 있는 모순들은 머지않아 스탈린주의 보나파르티즘의 붕괴와 지배 공산당의 정치적 파열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 노동계급의 저항을 분쇄하고 노동자 국가를 파괴하는 자본주의 반혁명이 이것에 뒤따를지 혹은 중국에서 노동자 소비에트의 정치적 지배를 수립하고 중국 혁명을 국제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지배를 타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이 이것에 뒤따를지는 투쟁의 문제가 될 것이다. 제국주의의 공격과 내부적 반혁명에 맞서는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에 우리 스스로를 기초하면서, 우리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들을 타도하고 노동자 소비에트들의 지배를 수립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들을 위해 투쟁한다.

1949년 중국혁명과 함께, 자본주의 지배는 박살 났고, 중국 사회는 근본적으로 변형되었다. 이 승리는 농민에 기초했던 모택동의 인민해방군에 의해 성취되었다. 자본가들과 대지주들은 미국 제국주의에 의해 보호를 받던 대만으로 도망갔다.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분열되고 약탈당하던 중국 본토는 통일되었다. 중국은 중앙계획경제를 가지는 노동자 국가로 재건되었다; 이것은 거대한 사회적 도약이었다. 이후 수년 동안, 토지는 농민들에게 분배되었고, 핵심 산업들은 몰수되었으며, 국가 소유 산업의 중요한 부분들이 건설되었다. 혁명의 해방의 효과는 전족이라는 야만적 인습으로 상징되는 처참한 과거 존재로부터의 거대한 진보를 이룩했던 중국 여성의 지위에서 분명하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노동계급에 기초한 당이 아니었다; 그렇기 보다는 당은 농민에 의존했다. 1927년 부르주아지 국민당이 봉기에 나선 상하이 노동자들을 학살 한 이후, 공산당은 노동계급을 포기했다. 오로지 예외적인 역사적 상황의 덕분으로 공산당은 20년이 지난 후 자본주의를 분쇄할 수 있었다. 노동계급은 국민당과 일본 제국주의자들 모두의 잔혹한 억압에 의해 원자화되어 있었다. 2차 대전에서의 일본의 패전 이후,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불안정했고 국민당 정권은 내부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새로운 인민들의 공화국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었던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의 존재가 하나의 추가적인 요소였다. 출발부터 CCP 정권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잘못되게 주장하는 한편으로 노동 계급에 의한 독립적인 행동을 진압했다. 이것은 맑시즘을 실천의 영역으로 이행시켰던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당이 지도했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인 1917년의 10월 혁명에서 소련의 출발과 날카롭게 모순되는 것이었다. 10월 혁명은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노동자 소비에트들을 통하여 그것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초기의 국제주의적 소련은 전세계 노동계급과 피억압 인민들의 등불이 되었다.

볼셰비키 지도부에게, 보다 선진적인 국가들에서의 노동자 혁명들이 평등에 기초하며 궁핍이 없는 사회인 사회주의를 위한 필수적인 기초인 국제적인 계획 경제를 수립하고 사회 성장률과 풍요를 산출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1차 대전 이후의 혁명적 봉기들이, 특히 독일에서, 친 자본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배신에 의해 분쇄되었는데 이것은 볼셰비키와 같이 대중들을 국가권력 장악으로 지도할 수 있었던 경험 많은 정당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패배들의 결과, 특히 1923년 독일혁명 패배의 결과, 1923년 말에서 1924년 초에 보수적인 민족주의 관료집단이 소련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노동자 국가의 퇴행화의 과정에서, 스탈린과 그의 도당은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로부터 등을 돌렸고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반 맑스주의적 교조를 만들어냈다. 수년 후,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을 추구하면서 그들은 국제적으로 혁명적 가능성들을 사보타지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1925-27년 2차 중국혁명에서 그들은 신생 중국 공산당을 부르주아지 국민당에 종속시킴으로써 혁명을 배신했다.

역사적으로, 중국 관료집단의 반혁명적 성격은 소련에 대항한 미제국주의와의 동맹에서 보여지는데, 이것은 워싱턴의 지배자들과의 "평화공존"에 대한 추구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1972년 폭탄들이 베트남에 쏟아지고 있을 때에 모택동은 미국 대통령 닉슨을 베이징에서 영접했다. 이들 정책들은 모택동의 계승자 등소평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영웅적인 베트남 인민들이 미국을 패배시킨 4년 후인 1979년에, 중국의 군대들이 범죄적으로 베트남을 침략했다. 그 직후, 중국은 소비에트 적군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던 살인적인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무자헤딘을 지지했다. 많은 측면에서, 모[택동]과 등[소평]의 관료집단 분파들은 제국주의가 소련을 파괴시키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등[소평]에게 제국주의 경제가 중국에 침투할 수 있도록 문을 열기 위한 길을 준비하게 해 준 것은 모[택동]의 미국 제국주의와의 동맹이었다.

1978년 등[소평]에 의해 시작되었던 시장지향의 개혁들은 모[택동] 하에서의 이전의 계획경제의 성공들에 의해 가능했다. 그것들은 스탈린주의 보나파르티즘의 테두리 내에서 관료적 명령 경제의 무능력에 태클을 가하기 위한 시도였다. 우리가 1980년대에 다음과 같이 썼던 것처럼:

"스탈린주의의 테두리 내에, 중앙화된 계획과 경영을 시장 기제들로 대체하려고 하는 고유의 경향이 있다. 경영인들과 노동자들을 소비에트 민주주의(노동자위원회들)의 규율에 복종시킬 수 없기 때문에, 관료집단은 경제활동가들을 시장경쟁의 규율에 종속시키는 것을 경제적 비효율에 대한 유일한 답으로 점점 더 바라본다."

-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통한 중앙계획을 위하여", 1988년 7월, 스파르타시시트 팜플렛, 동유럽에서의 "시장사회주의"에서 출판됨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국가를 제국주의 투자에 개방했고,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는 기업들을 사유화했으며, 궁극적으로 외국 무역에 대한 국가 독점을 포기했다. 계획 경제는 시장 기제들로 대체되었으며, 농업은 집산화에서 풀려서 농민 가족들이 장기 대부로 그들 자신의 작은 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권은 노동자의 직업을 팽생 동안 보장해주는 것에 기초했으며, 도시 노동자들에게 1949년 혁명의 중요한 성과로서 인식되던 "철밥통"을 폐지했다. 그러나 중국처럼 가난하고 후진적인 국가는 분명하게 국가소유 산업에서 수억에 달하는 농민들에게 직업을 제공할 수 없었고, 평생 동안 직업을 보장해 줄 수도 없었으며, 중요하게는 지방 공동체 구성원들의 수입보다 높은 비율의 임금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산업은 엄청나게 성장했고 노동 인구의 절반 이상이 현재 제조업, 운송, 건설 그리고 공공 서비스 영역에 고용되어 있다. "시장 개혁"이 시작된 이래 1억 5천만 명의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었다. Monthly Labor Review(2005년 7월)에 따르면, G-7 국가 전체에서 보다 2배가 많은 산업 노동자들이 중국에 있다. 이것은 중대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는 진보적 발전이다. 중국의 발전은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독립을 했으나 자본주의로 남아 있는 인도네시아, 남한과 같은 "호랑이 국가들" 혹은 인도 등의 신식민지 나라들의 성장을 무색하게 한다. 인도의 일인당 국내 총생산은 중국의 절반에 불과한 한편, 중국의 빈곤지수는 인도의 절반에 불과하다. 아동 영양실조는 인도에서보다 중국에서 75% 낮다. 중국에서는 여성의 90%가 읽고 쓸 수 있는데, 이것은 인도의 거의 2배에 달한다.

오늘날 중국은 불만이 들끓고 있는 나라이다. 한편으로,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경제적 침투가 내부적 반혁명 세력들을 엄청나게 강화시켰다. 자본가 기업가들의 계급이 CCP 관료집단과 대만과 홍콩에 있는 중국 자본가들 모두와의 가족적인, 재정적인 연결들을 가지면서 성장했다. 서구에서와 같은 생활 스타일을 즐기는 잘 나가는 경영인들, 전문직업인들, 그리고 전문 기술인들의 층이 창출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베이징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수행된 정책들은 가난으로 내몰린 상당 부분의 노동계급과 지방의 노동인민들의 희생의 대가였다. 건강관리와 같은 중요한 사회적 성취들이 침식되었으며 수백만의 실업자들이 새로운 직업들을 찾고 있으며, 이들이 결국 직업을 찾는다고 해도, 국가부문의 어떠한 사회적 혜택도 없는 훨씬 좋지 않는 조건들 하에 있는 사적 부문에 고용된다. 약 1억 5천만 명의 이주 노동자들이 시골에서 도시들로 이동했는데, 도시들에서 이들은 정치적 권리가 거의 없는 비참한 조건에서 일하고 있으며 종종 도시 노동자들에게 경멸당하곤 한다. 그 결과는 거대한 투쟁들이다: 체불임금들, 정리해고들, 혹은 열악한 노동 조건들에 대하여 항의하는 노동자들; 당 관료들에 의한 자신들의 땅에 대한 불법적 도둑질과 당 관료들의 부패, 혹은 환경 오염에 대하여 항의하는 농민. 우리는 이들 투쟁들을 지지한다. 지배 관료집단은 경제 "개혁"을 줄이지 않고 추진하기를 원하는 인자들, 국가 개입을 더욱 늘리기를 원하는 인자들과 관료적인 계획경제로의 복귀를 원하는 인자들로 분명하게 분열되어 있다.

관료들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05년 한 해에만 87000건의 항의들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 수준에서의 전투성으로는 부족하다. 노동계급은 투쟁을 정치적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려야만 한다. 이것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중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을 위하여 투쟁하기 위한 혁명적 전위당이다. 그러한 혁명적 전위당은 지방 노동자들과 도시의 빈민들과의 동맹 속에서 노동계급의 모든 부문들 통합하기 위하여 투쟁하게 될 것이다. 이주 노동자들은 건강관리, 주택과 공공교육에 대한 접근을 포함하는 모든 합법적 거주자로서의 권리를 받아야만 하며, 동일한 노동에 대하여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만 한다. 사적 부문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투자는 노동계급의 이해에 따라서 다시 협상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의 기사 "중국의 '시장 개혁들' - 트로츠키주의자의 분석"(노동자전위 874호와 875호, 2006년 8월 4일과 9월1일자)에서 설명하였듯이,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를 진정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원들에 대한 대량의 재분배와 재배치가 필요하다. 시골에 현대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보다 질적으로 높은 산업적 기반이 필요하다. 상응하게, 농경 생산의 성장은 시골에서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 거대한 노동력을 흡수하기 위하여 도시 지역들에서 산업 일자리들의 거대한 확장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것은 특히 중국의 산업적 기반의 여전히 제한적인 규모와 상대적으로 낮은 생산성이라는 조건에서 분명히 긴 과정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일본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로의 중국 혁명의 확대와 국제적인 계획 경제의 수립의 전략적 필요성을 보여준다; 이 전망의 템포와 궁극적으로 생존능력 모두가 이것에 달려있다. 노동자위원회들의 붉은 중국은 아시아와 전 세계의 억압받는 노동 대중들을 위한 등불이 될 것이다.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은 부르주아지의 "공산주의의 사망" 선전에 치명타를 날릴 것이며, 구 소련과 동유럽의 짓밟힌 대중들을 분기시키고 서유럽의 노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중국에 대한 보호주의 공세

독일 부르주아지 계급은 "중국의 위협"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점증적으로 공세를 편다. 2007년 8월 27일자에서, 슈피겔은 자신의 머리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호되게 꾸짖고 있다: "황색 스파이들 - 중국은 어떻게 독일의 기술을 정탐하는가". 이 기사는 자신의 인종주의, 반공산주의 마녀사냥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실행한다: 중국으로부터 온 "모든 학생들, 모든 사업가들"을 "밀고자, 끄나풀"로 여긴다. 전 세계적으로 "80만 명의 밀고자들", "독일에만 2만7천명보다 많은 중국 학생들이 있다." 그리고 나서 중국은 정부 컴퓨터들을 "트로이 [목마]"에 감염시켜왔다는 비난을 받는다 - 이제 독일 정부가 자기 자신의 시민들에 대하여 뭔가를 기획하고 있다는 액션!

슈피겔은 중국 노동자 국가에 대한 분노를 증대시키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중국은 정부 기밀들을 도둑질 -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쁘다 - 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동시에, 중국은 국가의 부, 즉 독일의 노하우를 도둑질하고 있다. 이것은 연방공화국이 번영을 위하여 국제 경쟁에서 내놓을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원이다." 이것은 독일 노동 계급의 생활수준을 위협하는 것이 끊임없이 독일에서의 착취를 강화하고 있는 독일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중국의 경제 발전이라는 거짓말을 조장한다. 이런 공세는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하여 제국주의 경쟁자들에 대항하여 팽창하기 위하여 노동 인구로부터 임금과 사회복지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모든 측면에서의 도둑질이 더욱 강화될 수 있도록 의도된 것이다.

"독일의 노하우와 관련된" 한에서, 역사를 대충 살펴보는 것으로도 우리는 배외주의자 슈피겔이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독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독일에서 산업혁명은 당시 선두의 산업열강이었던 영국의 발사장치, 총열, 개머리판[모든 것]이었던 노하우를 도둑질해서 수행되었다. 증기엔진, 베틀직기들, 철강생산 이건 무엇이건 - 이 모든 것들은 영국 공장 방문으로부터 정탐하여 복제한 것이거나 영국 엔지니어들을 고용함으로써 독일 내로 들여온 것들이다. 영국 이후에 발전했던 일본과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은 모두 같은 과정을 거쳤다.

보다 근본적으로, 모든 민족주의적 보호주의자들의 공세들은 임금과 사회복지를 방어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들을 목 조르는데 복무한다. 노동조합 관료집단은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강령을 노동계급에게 실행하는 전동벨트를 구성한다. 사장들에 맞서는 계급 투쟁에서 노동자들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을 투쟁으로 동원하는 대신에, 노동조합 관료들은 그들의 계급협조의 강령으로 어떻게 공장을 더 잘 운영할 것인가에 관한 자본가들을 위한 고문관들으로서 행동한다.

보호주의가 부르주아지 계급에게는 하나의 가능한 선택 중의 하나인 반면, 노동계급에게는 노동계급을 민족에 따라 분열시키고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종속시키는 치명적인 독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를 들면, "중국 혹은 동유럽으로부터의 "저임금 경쟁"에 맞서, 노동조합 관료집단이 다민족 독일 노동계급을 다른 국가들의 노동계급들과 싸움 붙이는 방식이다. 독일의 복지는 수출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노동조합 관료집단은 "Standort Deutschland"(독일: 투자와 산업을 위한 장소)라는 민족주의적 논리를 깊게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의식적으로 수입 통제들이나 관세들에 대한 요구들을 자제한다.

함부르크가 한 예이다. Port Package[EU 반노동자 항만법]의 임금과 노동 조건들에 대한 공격들에 대항하여 투쟁하고자 하는 항만노동자들의 의지는 직접적으로 선원들을 겨냥하는 "항만 노동자들을 위한 항만 일자리"라는 슬로건을 사용하는 노동조합 관료집단에 의해 그들 "자신의" 사장들 배후에 있는 보호주의의 경로로 돌려졌다. 이것과 함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2006년 1월 11일의 시위에서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약 앞으로 홍콩과 싱가포르의 강력한 국제적인 자본이 함부르크 항만 회사를 사들일 수 있게 된다면, 오래지 않아 날품팔이 노동, 저임금, 그리고 고용과 해고에 대한 아시아적인 사회적 표준이 이곳에 적용될 것이다." ver.di[통합서비스노조] 서비스 부문 노동조합 관료들에 의해 여기서 그려진 그림은 관료들이 그들 "자신의" 사장들과 그들의 정부 뒤에 노동자들을 동원하려고 시도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민족주의 선전으로 복무한다. 실제로, 함부르크 항구에서는 독일 사장들에 의한 잔인한 공격들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파업이 없었으며, 2006년 1월 11일에 있었던 24시간 파업조차 사장들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조직되었다. 민족주의적 고립이라는 독에 반대하여, 노동계급은 국제주의적 기초 위의 계급 투쟁 강령으로 획득되어야만 한다: 누구의 노동이건, 동일 노동에는 동일 임금을! 항만 노동자들은 그들이 선원이건 이민자들이건 배에서 짐을 부리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들을 하나의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며, 모든 이들의 완전한 계약 임금을 위하여 투쟁해야만 한다. 똑같은 것들이 항만에 있는 트럭운전 노동자들과 항구에서 계약 임금들 미만의 노예로 일해야만 하는 다른 모든 노동자들에게 적용된다. 항만에서의 일자리를 위한 항만 계약! 미조직자들을 조직하라! 모든 이민자들에게 완전한 시민의 권리를! 동유럽 노동자들에 대한 작업 금지를 타도하라!

IG 메탈 금속 노동조합의 볼프스버그 로칼의 2005년 4월 21일자 기사는 폭스바겐과 다임러 크라이슬러와 같은 노동계급의 전략적 부분들에 대한 사장들의 대규모 공격들에 맞서 진행되고 있던 투쟁들을 팔아 넘기려는 노동조합 관료들이 활용했던 보호주의적 합리화들을 요약하고 있다.

"IG 메탈 볼프스버그 2인자인 [프랭크] 파타에 따르면, 조만간 [가능한] 재배치를 선언하는 것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니라 현실이다. 노동조합 관계자들은 '독일에서 매일 1천 개의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계산한다.... 그러나, 파타는 일자리들을 지키는 것이 그들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의 공정들과 구조들이 다시 한번 더욱 효율적으로 되어야만 한다. 오직 우리가 폭스바겐에서 경쟁력 있는 자동차들 만들고 파는 경우에만, 우리의 일자리는 안전하게 보존될 것이다 - 2011년 그리고 그 이후까지’."

IG 메탈 볼프스버그가 폭스바겐 사장들에게 양보들을 한 후, 브뤼셀스와 남아프리카에서 조립되던 모델들의 생산이 볼프스버그로 이동되었으며, 부뤼셀스에서 절반 이상의 일자리들이 날아갔다. 비록 IG 메탈 관료들과 공장위원회 공자님들이 가끔씩 국제적인 연대에 관하여 지껄이기는 하지만, 일자리들을 지키기 위한 벨기에 폭스바겐 노동자들의 투쟁은 폭스바겐 사장들과의 더러운 추가 협상을 위하여 여기에서 잔혹하게 배신 당했다.

독일의 노동계급은 공동의 적인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하여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의 방어라는 기초 위에서 중국의 강력한 프롤레타리아트와 연대해야만 한다. 중국에서의 반혁명은 단지 동유럽과 구 소련의 경우보다 격심한 중국 노동 대중들의 처참한 상황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 제국주의자들이 동독과 소련을 파괴시킨 후 했던 것처럼, 반혁명은 또한 제국주의자들이 이곳의 노동계급에 대하여 또 다른 공격들의 공세를 취하도록 고무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반혁명적 역할

민족주의적 보호주의를 통한 노동조합 관료집단과 사회민주주의의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이런 지지는 부르주아지 계급의 "인권" 공세를 그들이 세차게 다시 내 뿜는 것에 의해 증폭되며 그들은 그것들을 훨씬 더 위험스러운 변형체인 "노동자의 권리"들로 확대한다. 1917년 10월 혁명이래,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노동자 국가들에 반대하여 지껄여왔다. 이것은 기반은 - 무엇보다도 그들의 노동조합들과의 연결을 통하여 - 노동계급에 있지만 강령과 지도부는 완전하게 자본주의에 헌신하는 부르주아지노동자당들로서의 SPD와 링크스파르타이[Linkspartei](좌익당) 양자의 성격으로부터 기인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신식민지 인민들에 대한 착취에서 나오는 초(超)이윤을 챙기는 부르주아지 계급으로부터 뇌물을 받는 노동귀족의 엷은 특권층에 기초한다. 1914년 8월 제국주의 정복전쟁인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을 다른 나라들의 계급 형제들에 맞서는 대포의 밥으로 동원하면서, 공개적으로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 계급들의 편으로 넘어갔다.

1차 세계 대전에 뒤이어, 혁명의 파도가 자본주의 세계를 강타했다. 1917년 10월,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가 이끌었던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 계급을 타도했고 그들의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했으며 노동자 국가를 세웠다. 서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는 새로이 건설되어 경험이 없던 신생 공산당들 때문에 부르주아지 지배를 구원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SPD가 프라이코르프스(Freikorps)라는 준 군사조직들을 조직했으며, 신생 독일 공산당(KPD)의 목을 자르면서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했다. 프리드리히 에버트(Friedrich Ebert), 필립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 그리고 구스타프 노스케(Gustav Noske) 등 SPD 지도자들은 수십 만 명의 노동자들의 피 속에 혁명을 빠뜨려 죽였던 반면, 사회 평화주의 독립사회민주당의 "좌익" 사회민주주의자 칼 카우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큰소리로 호통치면서 "순수한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선전했다. 1918년, 프롤레타리아트독재와배교자카우츠키에서 레닌은 "민주주의"는 국가의 형태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국가는 - 경찰, 군대 그리고 법원과 같은 그것의 핵심은 - 중립적이지 않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에게 제기되는 문제는 항상 다음과 같다: 어떤 계급을 위한 민주주의인가? 맑스는 1871년 파리 코뮌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순히 부르주아지 국가 기제를 넘겨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쇄해야만 하고, 그것을 "박살내야"만 하며, 그것을 자기 자신의 국가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대체해야만 한다는 결정적인 교훈을 도출했다. 그리고 이것이 정확하게 1917년 10월 혁명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들이 했던 것이다.

적절하게 이름 붙인다면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FES)이 SPD의 모든 종류의 반혁명 활동들을 위한 감춰진 기관이다. 사회민주당의 에버트는 1918-19년의 11월 혁명을 교수형 집행했던 자이며,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만약 카이저가 퇴위하지 않는다면, 사회혁명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나는 그것을 엄청나게 증오한다." FES는 DGB(노동조합 연맹)와 SPD 지도부들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전형적인 "비"정부조직(NGO)이다. 가끔 FES는 스스로를 독일 노동자 운동의 조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FES는 독일 제국주의에 복무하며, 독일 제국주의의 전세계적 이해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애쓴다. 그래서 FES는 1974년 포르투갈에서의 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CIA와 다른 자금들을 위한 전동벨트로서 활동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좌익 반정부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려 하자, FES는 그들이 쿠바의 길을 따라서 자본주의를 분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깊숙이 개입했다. 그리고 FES는 동유럽과 소련에서의 반혁명 공세를 위한 최전선에 있었다. FES는 약간의 노동자 참여(Mitbestimmung), 그리고 물론 "민주주의"와의 교환을 대가로 반혁명을 중국 노동자들의 구미에 맞는 것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기구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FES는 착취, 엄청나게 열악한 노동조건, 그리고 기타 비슷한 상황들에 반대하여 자신들이 노동자들의 편에 있다는 이미지를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중국 사회에 있는 실제 분쟁들을 활용한다.

사회민주주의 DGB 관료집단도 같은 활동을 한다. IG메탈 볼프스버그는 1989년 천안문 학살 이후 DGB 대표단의 첫 번째 공식 방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전했다:

"ACFTU[전 중국 노동조합 연맹]은 1억 이상의 조합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의 의미에서의 노동조합은 아니다. 이것으로 인해, 연맹은 정치적 독립성, 반대파들을 위한 자유, 민주적인 구조들과 같은 필수적인 선행조건들을 결여하고 있다. 중국 노동조합들은 스스로를 공산당의 전선 조직으로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노동조합들은 중국 조직과의 비판적인 대화를 가지고자 한다. 방문 이후, [DGB의 국제부장] 칼 펠덴구트[Felengut]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했다: '우리는 그곳에서의 자유노조, 상호결정, 그리고 단체협약에 기초한 임금들을 추진하기 위하여 우리의 중국과의 증가하고 있는 경제 협정들을 활용하고자 한다.'" (2005년 4월 19일)

DGB 노동조합 관료들에게는, "민주적 구조들"와 "반대파들을 위한 자유"의 부재에 관하여 중국 노동조합 연맹에 대하여 강연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DGB는 사회민주주의 - SPD, 그리고 1990년 이후에는 점점 더 PDS/Linkspartei - 에 의해 관료적으로 통제되고 있다. 이 통제는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좌익주의 반대파들에 반대하여 끝까지 싸우는 속에서의 숙청과 축출을 통해서 사회민주주의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중국에서 스탈린주의 관료로부터 노동조합의 독립을 위한 투쟁은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에 기초해야만 한다. 독립적인 노동조합들은 제국주의자들과 FES와 같은 제국주의의 이론적 기관들, 그리고 모든 반혁명적 NGO들에 대하여 비타협적인 반대의 입장에 서야만 한다.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방어는 무엇보다도 중국 노동자 국가와 노동자 국가의 집산화된 경제에 대한 방어를 전제로 한다.

SPD "동방정책": "노동자들의 권리"라는 이름의 반혁명

"자유노조"와 관련되는 한, 폴란드 솔리다르노스크는 중국 노동자들과 좌익들을 위한 경고로서 복무해야 한다. 폴란드에서 노동계급의 열망들이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실망했고, 그래서 1980년이 되면서는 전통적으로 친 사회주의적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는 카톨릭 교회의 품으로 인입 되었다. 1981년 9월이 되어, 솔리다르노스크는 자본가 반혁명의 강령 주변에서 강화되었다. - "자유 선거들”에 대한 그들의 요구는 의회 정부 활동이라는 덮개 아래에서 자본주의의 복귀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는 솔리다르노스크를 CIA와 은행가들로부터 수백만 달러를 지원받던 그들을 위한 어용노조로 설명했고, "솔리다르노스크 반혁명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폴란드 노동계급에게 트로츠키주의 당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81년 12월 장군 야루젤스키가 솔리다르노스크의 권력장악을 탄압했을 때, 우리는 이 방책을 지지했다. 동시에 우리는 스탈린주의자들은 그들이 1989-90년에 종국적으로 그렇게 했듯이, 폴란드 노동자 국가를 자본주의에 팔아 넘길 수 있음을 경고했다. 반대로,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좌익은 "솔리다르노스크와의 연대"에서 허우적거렸고 SPD가 충분히 공격적이지 않다(!)고 비난했다. 오늘날 폴란드에서는 SPD식의 "노동자들의 권리"의 방어의 결과를 볼 수 있다: 많은 부분의 폴란드 경제 - 광산, 중공업과 섬유산업 - 이 대량으로 파괴되었으며, 실업률은 20%에 이르며 거의 어떠한 실업수당도 없다. 여성의 권리는 박살이 났으며, 반동적 종교 자본주의 체제가 수립되었다.

공장위원회들과 노동자 경영참여 운동들이 어떻게 반혁명에 복무하는 가에 대한 좋은 예가 1989-90년 동독이다.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 봉기 몇 개월 후인 1989년 가을에 스탈린주의 호네커 정권이 붕괴했다. 동독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동독 노동자들과 함께 혁명적 지도부를 조직하기 위하여 우리의 국제조직의 모든 역량들을 동원했다. 우리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 반혁명에 맞서 투쟁했다. 우리는 독일의 혁명적 재통일을 위하여 투쟁했다. - 즉, 동독에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과 서독에서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타도하기 위한 사회혁명, 그리고 붉은 독일 노동자위원회들을 위하여. 우리는 대자적 계급으로서, 정치적 지배를 위한 주창자로서 노동계급을 조직하기 위하여 노동자와 병사위원회 건설을 주장했다. SED-PDS가 개혁 가능하다는 환상들에 반대하여, 우리는 새로운 평등주의 레닌주의 당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했다. 우리는 SPD가 반혁명을 위한 트로이 목마라고 경고했다. 자세한 내용은 2000년 2월 25일과 3월 10일에 발행된 노동자전위 730, 731호의 "1989-90년 독일에서의 혁명 대 반혁명"에 있다. 우리의 개입에 대한 평가는 1992 겨울에서 93년에 발간된 스파르타시스트(영어판) 47-48호에 있다.

그리고 SPD도 마찬가지로 개입했다. 1989년 10월 초에, 동독 사회민주주의당(SDP)이 건설되었다; 이 당은 핵심적으로 신교(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는데, 시작에서부터 독일 신교회(EKD)가 사민당의 "동방정책" 수행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65년에 이미 "동방에 대한 공식보고"에서 EKD는 동독과의 더욱 가까운 연결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당시 번성하던 실지회복주의로부터 돌변하여 오데르-나이세[Order-Neisse]라인을 동독과의 국경으로 승인할 것을 주장했다. 1970-91년까지 SPD 집행부 성원이었던 에어하르트 에플러[Erhard Eppler]는 신교회와 SPD 사이의 중심적인 연결고리였다. 1980년대 초반에, 서독에서 민족주의적 평화운동이 고조되자, SPD는 EKD를 통하여 동독에 있는 소부르주아지 평화주의 반대파 그룹들과의 접촉을 강화했다.

1989-90년 우리의 "노동자 병사위원회를 권력으로!"라는 주장과는 반대로, 자본가들, 사회민주당들, 스탈린주의 산업 감독들, 그리고 통합 좌파(VL)같은 동독의 반대파 그룹들은 공장위원회들과 노동자 경영참여를 주장했다. 우리는 1990년 3월 1일 스파르타키스트 68호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PDS(민주적 사회주의당) 의장 그레고르 기시(Gregor Gysi)는 1월 7일 선거운동을 시작하는 연설에서 '노동 인민의 경영참여’는 '조인트 벤쳐들'의 경우에 필요하며, 공장위원회들은 추정상 '경제를 민주화하는' 형식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동독 노동자들의 경제, VEB들[국가소유 공장들]을 팔아 넘기는 것이다." 동독 노동자들의 공장들을 서독 자본에 팔아 넘기면서,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능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위장하려는 것이 그들의 의도이다. "노동자 경영참여"는 피착취자들의 이해를 착취자들의 이해와 화해시키겠다는 계급 협조주의적 환상이다; 이것은 트로이한트(Treuhand/동독 산업을 사유화하기 위하여 설립된 기관)을 통하여 동독의 산업이 부르주아지 계급에 의하여 박살 났던 때인 재통일 이후에 쓰디쓰게 증명되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노이에스도이치란트(Neues Deutschland)([1990년] 2월 5일자)에 따르면, VL 주도 그룹에 의해 소집된 공장위원회 총회에서 연방공화국에서의 '노동자 경영참여'의 실제 조건들에 대한 보고들은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효과를 나타냈다.

"그래서 종종 공장위원회들에 대한 주장은 자본주의 복구를 위한 강령을 위장하기 위해 복무한다. 이것에 반대해서, 독일 스파르타키스트 노동자 당은 ‘노동자와 병사위원회를 권력으로’를 주장한다. 우리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공개서한'([1990년] 1월 12일자 아르프레코르(Arprekorr) 18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SED-PDS는 현재 "자본이 오기에 앞서" 공장위원회들의 건설을 제안한다([1990년] 1월 11일 ND). 스파르타키스트들은 자본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노동자와 병사위원회들을 건설할 것을 주장한다!'"

동독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의 잠재력이 1990년 1월 3일의 베를린 트레프토프에 있는 소비에트 전쟁 기념관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모독에 반대하고, 동독과 소련 노동자 국가들을 방어하기 위한, 우리가 주도하고 SED-PDS가 받아 안았던 친 사회주의, 공동전선 집회에서 표현되었다. 25만이 넘는 시위자들 앞에서, 우리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정치혁명을 주장했고, SPD가 반혁명의 트로이 목마라고 경고했다. 고르바쵸프는 소련으로까지 확대될 수도 있는 정치혁명의 위험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제국주의와의 그의 술책들이 위험에 처한 것을 깨닫고는 당시 수상이었던 CDU의 헬무트 콜과 함께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독일의 자본주의적 재통일을 밀어 부쳤다.

SED는 이런 배신에 동의하고, 모드로브(Modrow)의 "독일 하나의 조국!"이라는 슬로건 하에 사회민주주의적인 PDS가 되었다. 이 굴종은 SED-PES가 반혁명에 대한 장애물이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SED-PDS를 바라보았던 친 사회주의 노동자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합병(Anschluss)을 통한 사회 복지에 대한 환상들의 먹이가 되었었던 동독의 소부르주아지 계급과 노동계급의 보다 후진적인 부분이 힘을 받았다. 그래서 수백만 독일 마르크를 서독 부르주아지 계급으로부터 지원 받았던 보수적 선거 연합이 1990년 3월 18일의 포크스카머(Volkskammer/동독의회) 선거들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것이 동독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우리가 우리의 2차 국제 ICL 대회 문서에서 썼듯이, 동독에 대한 ICL의 개입은 정치혁명과 10월 혁명의 성과들에 대한 방어라는 우리의 강령은 굴종과 반혁명의 스탈린주의 강령과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한다(1992-93년 겨울, 스파르타시스트[영어판] 47, 48호를 보시오).

1992년에 SPD는 그들이 충분하게 반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SED에 청혼을 했다는 부르주아지 진영으로부터의 비난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스스로를 방어했다: "아니다, 사민당은 자신의 행위를 감출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들의 동방정책은 성공적이었다: 그 정책은 우리의 우정 어린 포옹 안에서 SED가 마침내 숨이 막힐 때까지 상대방인 SED를 끌어안았다. 이것이 정신 바싹 차리고 어떠한 이론적인 이상화도 없이 바라보아야 하는 방식이다" ("새로운 사회", Frankfurter Hefte, 1992년). 참으로, 그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반혁명을 위한 트로이 목마이다.

사이비 좌익이 사회민주당의 꽁무니를 쫓다

노동조합의 좌익은 사회민주당의 꽁무니를 따라 걷는다. 노동조합 좌익의 포럼인 Labournet.de에서 반 공산주의 "인권"과 "노동자들의 권리"를 불러내는 많은 수의 중국관련 기사들을 볼 수 있다. "민주주의"와 생태학과 관련되어 있는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감독하고 있는 에센에 있는 "아시아 하우스"가 여기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아시아 하우스는 다른 누구보다도 신교회의 개발서비스, 북라인 베스트팔리아의 환경과 개발 기금 그리고 그린당의 하인리히 뵐 기금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다. 아시아 하우스와 제휴하고 있는 타쯔의 한 편집인은 아시아 하우스의 인터넷 신문에 메르켈의 중국 정책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머리기사로 비판했다: "새로운 곡조가 다른 정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2007년 9월 3일). 이것은 메르켈이 그들에게는 여전히 충분한 반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서 그 편집인은 제국주의의 반 중국 공세의 모든 추문들을 되풀이한다: "여기 국내에서, 위험스러운 값싼 상품들, 생태학적인 초과착취, 그리고 정부 컴퓨터들에 대한 뻔뻔스러운 첩자 행위 등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근래에 급격하게 나빠졌다." 비록 심각한 인종주의적 "황색 공포"의 어조가 말끔하게 청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슈피겔에서 처럼, 독일, 실로 유럽전체에 "위협"을 불러일으킨다:

"여기 이 나라에서 중화왕국의 성장은 점점 더 적은 기회로, 그리고 점점 더 강력한 위협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일의 이미지 공세와 같이, 이것은 단지 실제 힘의 관계를 보여줄 뿐이다. 중국 사람들은 그들의 계속되는 정치적, 경제적 상승을 확신하고 있는 반면, 독일 사람들은 한편으로 역시 중국에 구애할 수밖에 없으면서, 같은 패거리에 있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Labournet는 중국 노동통신(CLB/中國勞工通報)의 기사들에 대한 링크들로 가득 차 있다. CLB와 그 창설자 한동방[韓東方]은 유럽과 미국 제국주의에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솔리다르노스크의 지도자를 따라 "중국의 레흐 바웬사"로도 불리는 한[동방]은 수년 동안 워싱턴의 라디오 자유 아시아(RFA)의 정식 대변인으로 있었고, CLB 웹사이트는 RFA에 대한 링크를 제공한다. RFA는 다른 누구보다도, 방송국의 이사 자리에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의 지휘 아래 운영되는 CIA의 라디오 방송국이다. 유럽에서, CLB 대변인 카이 총구오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중국 "전문가"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프랑스의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인 LO[Lutte Ouvirere/노동자 투쟁]는 그들의 매년 열리는 LO Fete[정치 박람회]에 카이 총구오를 초대했고, 개막연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골적으로 인정했다: "나는 일주일에 서너번을 BBC, RFA, Radio France Internationale, 그리고 Deutsche Welle를 위하여 발언한다. 그리고 또한 자연스럽게 가끔 미국의 소리의 중국 부서를 위하여 말한다." 이 보다 2주일 전에, 카이는 "노동법"에 관한 주제로 베를린에서 연설하기 위하여 EU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초대는 중국 정부의 뒤따른 항의들에 의해 취소되었다. LTF의 우리의 프랑스 동지들은 LO가 카이를 초대한 것과 소련에 맞선 냉전에서 비슷한 반혁명 세력들에 대한 LO의 계속적인 지지를 비난했다(2007년 8월 3일자 노동자전위 896호를 보시오).

2007년 3월 14일에, Labournet, 아시아 하우스, 그리고 Linkspartei와 제휴하고 있는 노동조합 좌익주의자들의 그룹 "Jour Fixe"가 주최한 포럼이 함부르크에서 있었는데, 거기서 중국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과 다른 여성 노동자들이 카드뮴에 중독되어 있는 골드 피크[Gold Peak] 상사에서의 처참한 노동 조건들에 관하여 보고했다. 포럼이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연대의 종류가 통합서비스노조 연사에 의해 시작부터 바로 분명해졌다. 그는 노동자 투쟁들에 대한 자신들의 "성공적인 지지"의 역사, 특히 그들이 당시 지지했던 솔리다르노스크의 대표자들에 대한 그들의 초대에 관해서 지적했다. 우리의 동지들은 한동방 같은 반혁명 분자들에 대하여 경고했고, 어떻게 솔리다르노스크의 반혁명이 폴란드 노동자들을 가난의 늪에 빠뜨렸는가에 관하여 설명했다. 포럼 조직자들은 반혁명의 목적을 위하여 골드피크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을 부당하게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반혁명을 원하는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적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 다수가 중국은 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분석에서의 실수가 아니라 반혁명을 위한 반공산주의 강령이다. 그 수단은 새롭지 않은 것이다. 중도주의적 사민주의자 칼 카우츠키는 자신의 반[反]볼셰비키 장광설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소련에 "국가자본주의"라는 딱지를 붙였다. 50년대 초 한국 전쟁 동안, 토니 클리프가 자기 자신의 영국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북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 대한 방어에 대한 자신의 공개적인 거부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 "이론"을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이것은 당시 집권하고 있던 노동당에 대한 비열한 굴종이었고, 이로 인해 클리프의 추종자들은 제4 인터내셔널로부터 축출되었다. 토니 클리프 추종자들이 옐친과 바리케이드의 같은 편에 서 있었고, 그의 반혁명 쿠데타를 환영했던 1991년에 클리프 추종세력들의 관념적인 "제3 진영"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분명해졌다: "’공산주의는 붕괴했다,’ 우리의 신문과 텔리비젼은 선언한다. 이것은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기뻐해야만 하는 사실이다"(사회주의노동자[영국], 1991년 8월 31일자). 바로 이 날에 대하여 클리프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옆 걸음"이기는 커녕, 소련에서의 반혁명은 처참한 후퇴였다. 경제 붕괴는 현대 사회에서 유례가 없었다. 1991년에서 1997년 사이에, 러시아의 국민총생산은 80%보다 많이 떨어졌다. 2000년 평균 수명은 19세기 보다 낮았다. 실업과 궁핍이 넘쳐 났다. 중국에서의 반혁명은 소련에서 보다 훨씬 더 처참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노동자 국제 위원회(CWI), 독일에서는 사회주의 대안(Socialist Alternative/SAV), 도 또한 중국이 자본주의라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중국에서의 자본주의는 국제화의 과정을 통한 해외 자본주의와의 긴밀한 교류 속에서 스탈린주의 지배당의 지도 아래 재창조 되었다. 중국 자본가 계급은 주로 노동계급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 국가에 극단적으로 의존적이며, 이것으로 이해 그들의 민주주의적 의욕들, 그리고 정권의 교체를 위한 열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 "갈림길에 서 있는 중국", www.chinaworker.tk, 2007년 5월 24일자

그래서 CWI에 따르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변형시켰고, 이 간단한 방식으로 노동자 국가는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 트로츠키가 1933년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서 설명하였듯이, 이것은 CWI의 지극히 사회민주주의적 강령이 실제로 예언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단계적인 평화적 이행이라는 개량주의자들의 영화 필름을 거꾸로 감는 것이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지 의회에서 사회민주주의적 다수파에 의한 "은행과 회사들의 공공소유로의 전환"이다. 실제로는, 자본주의 반혁명이 정치적 수준에서 승리를 거두어야만 하고, 중국 노동자 국가를 파괴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이 자신들의 사회민주주의적 똘마니들과 함께 "민주주의"에 관하여 비명을 지르면서, 그토록 뿌리깊게 중국 노동자 국가에 적대적인 이유이다.

그래서 CWI는 중국에서 "민주적 변화"를 위한 "영구혁명"을 요구한다. 이것은 트로츠키의 영구혁명 이론에 대한 곡해이며,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를 파괴하기 위한 반혁명 세력들과의 공통의 대의를 만들기 위한 중국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부정이다. 이것은 CIA가 좋아하는 한동방에 대한 CWI의 비판에서 분명하게 보인다. CWI는 한동방이 공식 노동조합 연맹을 "민주적이고 투쟁적인 관점"으로 획득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가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들은 이것이 "완전하게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CWI는 1980년대에 솔리다르노스크 건설을 그들이 도왔을 때 했던 것처럼 "독립적인" 노동조합들을 지지한다. 참으로 CWI는 1949년 혁명에 의해 본토에서 쫓겨났던 완전히 반혁명적인 국민당(GMD)의 합법화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거의 감추지 않는다: "맑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과 모든 민주적 권리에 대해 테러를 사용하는) 파시스트들을 제외하고는 국가와 독립적으로 조직할 모든 정당들의 권리를 지지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국민당의 반 노동계급 정책들을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국민당의 합법화에 반대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완전하게 CWI의 동유럽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과 소련의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에서의 반혁명에 대한 지지라는 연장선에 있다. 1991년에, 그들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소련에서 옐친의 반혁명적 쿠데타를 지지했다. 오늘날 그들은 자신들의 지지로 만들었던 자본주의 러시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잔소리를 한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러시아와 인도네시아는 민주주의를 거의 꽃피우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양국은 실제 권력이 선출되는 정치인들보다는 선출되지 않는 엘리트들에게 여전히 더 있는 사이비 민주주의들이다." 여기에서 이들 의회 숭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를 찬양한다. 그들의 고전적 사회민주주의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 의회에서 다수 장악을 통해 "진정한 권력"을 장악하는 "선출되는 정치인들"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맑스와 레닌이 설명하였듯이, 정부의 민주적인 형식들이 부르주아지 계급의 지배를 특별히 효과적으로 가려주는 현대 부르주아지 공화국을 포함하여 모든 국가는 계급지배의 도구이다. 레닌은 마치 그가 오늘날의 CWI에게 물었을 수도 있는 질문을 칼 카우츠키에게 했었다: "민주주의가 더욱높게 발전할수록, 부르주아지 의회들이 더욱 더 주식시장과 은행가들에 종속된다는 것을 박식한 카우츠키가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 가능한가?"(프롤레타리아트혁명과배교자카우츠키[1918]). 필요한 것은 카우츠키가 그랬던 것처럼 CWI가 몹시 혐오하는 사실, 부르주아지 국가 기제를 분쇄하고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대체하는 사회주의 혁명이다.

CWI는 심지어 더욱 후진적인 "사이비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보다 더 선호한다. 예를 들면, CWI는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는데, 그들은 이것을 별개의 민족으로서 대만을 재정의 함으로써 합리화한다. 피터 타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재 대만이라는 별개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 분명하게 존재하며, 인구의 대다수 사이에 폭넓은 '민족 의식'이 있다"("맑스주의자들, 대만과 민족 문제", 중국노동자 온라인, 2005년 8월 26일). 수세기 동안 대만은 중국의 한 부분이었다. 1949년에, 중국 부르주아지 계급이 모택동의 군대들로부터 그곳으로 도망을 쳤고, 미 제국주의의 보호 아래 그곳을 지배했다. 제국주의자들에게, 무엇보다도 일본과 미국에게, 대만은 중국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의 목 줄기 앞에 있는 칼이었으며, 본토에서의 반혁명을 위한 도약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만을 중무장시켰다. 중국과 대만의 - 확실하게 중국에 대한 반혁명적 제국주의자들의 공격으로 귀결될 수 있는 - 군사적 분쟁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군사적 방어를 하는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의 편에 선다. 베이징 관료들은 "1국, 2체제들"의 정책을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관료가 재통일의 경우에 중국 부르주아지 계급의 재산을 존중할 것이라는 신호를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본토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과 대만에서 중국 부르주아지 계급을 타도하기 위한 사회혁명을 통하여 중국과 대만의 혁명적 재통일을 위해 투쟁한다.

이것과 반대로, CWI는 그들이 지지하는 대만 부르주아지 계급과 제국주의자들의 편에 선다.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 지지가 또 다시 진정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정권은 독재정권이다. 게다가, 대만 대중들의 관점에서, 그들은 중국의 지배하에 스스로를 두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제한적일 지라도 대만에서와 같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정권에서 그들이 향유하는 민주주의적 권리들을 더 선호한다." 오늘날 중국처럼, 자본주의적 재통일이 되었을 때까지는 계급 라인으로 분리되어 있는 하나의 민족이었던 1989-90년의 독일에서 CWI는 반대로 주장했다. 당시 그들은 "우리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발전과 민주적 권리로서 모든 민족의 재통일 - 독일의 그것까지도 - 을 지지한다"(Voran 특별호, 1990년 1월 25일)라고 말하면서, “SPD의 독일 정책 - 단결과 사회주의에 대하여 공세적일 필요가 있다”(1990년 2월)라고 떠벌렸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CWI에게 똑같은 것 하나는 남는다: 그들은 언제나 비록 퇴행화되었지만 실제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형태였던 "스탈린주의 독재"에 반대하여 반혁명,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편에 선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에는 분명히 잘 먹히지 않는다. 특히, 자신들의 가족들과 함께 직접적으로 구 동독에서 탈산업화, 17%의 실업률, 1990년 이후 백만이 넘는 탈 이민자, 좌익들과 이민 온 사람들에 대한 "민족 해방 구역들" 바로 밑에 있는 길거리들에서의 나찌의 테러 등의 자본주의적 의회 민주주의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는 그들의 동독 조직원들에게.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타페 추종자들이 서독의 SAV 지도부가 1990년 2월 당시 "독일이 하나의 사회주의적 기초에서만 재통일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있어서 실수를 했다고 말하면서, 1989-90년 동독에서의 반혁명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정당화하려고 애쓰는 이유이다. 이것은 단순히 은폐이며, 그들의 사회민주주의적 정치에서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 오늘날, 그들은 또다시 그들 자신의 "민주적"인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계급들과 손에 손을 잡고 최악의 회유를 밀어 부치면서, 중국에는 방어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독일의 노동자들과 좌익 청년들에게 설득하면서 중국에서 반혁명을 지지하고 있다.

한편으로, 시장 개혁들이 중국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을 위한 세력들을 엄청나게 성장시켜왔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에서는 자신의 경제적 이해들을 방어하기 위한 수많은 투쟁들로 이끌리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들 중의 하나가 성장해왔다. 트로츠키가 다름과 같이 말했듯이:

"노동자 국가는 사색적으로 자신의 콧 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비는 '사회주의' 교수의 상상으로부터가 아니라 가차없는 역사의 실험실로부터 등장해온 것으로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비록 노동계급의 성과들이 적대적인 세력들의 압력에 의해 왜곡될 지라도 노동계급의 모든 성과를 방어하는 것은 혁명가들의 임무이다. 이미 장악한 위치를 방어하지 못하는 자들은 결코 새로운 것들을 장악할 수 없다."

- "핀란드 사태들에 대한 대차대조표", 1940년

중국에서 혁명과 반혁명의 문제에 전세계 노동계급의 중심적인 이해가 걸려있다. 우리는 전세계에 걸쳐 트로츠키주의 정당들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한다. 독일의 노동계급은 독일 부르주아지 계급과 그들의 사회민주주의적 대리인에 맞서 중국을 방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으로 획득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들로부터 노동자들을 분리시켜 내고, 궁극적으로 독일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유럽 사회주의 합중국의 한 부분으로서의 노동자위원회들의 붉은 독일을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투쟁으로 조직하기 위한 중심적인 구성부분을 구성한다.